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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잠언 26장 묵상 |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

    잠언 26장을 묵상하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보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소망이 있음을 배운다. 부족함과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는 믿음의 걸음을 살펴보자. 잠언 26장 말씀 묵상으로 삶에 적용해 보자.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는 어리석은 자에게 더 소망이 있느니라.” (잠언 26:12, 흠정역)

    어리석은 자는 쓸모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절뚝거리더라도 앞으로 걸어간다. 반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게으른 자는 제자리에서 돌고 돈다. 문짝이 돌쩌귀 위에서 도는 것처럼, 그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맴돌고 있다면, 그곳에서 나는 게으른 자다. 곧 교만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나에게 내려온 독불장군 같은 기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고자 한다. 절름거리더라도, 어리석은 자의 길을 택하겠다. 부족함을 드러내며, 사람들 앞에 서겠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용서와 관계 회복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프다면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나는 권위의 자리에서 절름거리며 내려와야 한다. 자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내가 먼저 말을 건다.

    기도만으로는 관계의 골이 메워지지 않는다. 권위자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부끄럽지만, 그것이 진짜 회복의 시작이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그 길에서 예수님이 강함이 되신다.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겠다.


    묵상 원본

    어리석은 자, 쓸데없다. 그러나 저는 자가 아무리 절뚝거려도 그는 앞으로 걸어간다. 절뚝절뚝 뒤뚱거려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게으른 자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빙글빙글 그 자리에서 돌고 돌 뿐이다. 문 밖에 사자가 있으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게으른 자는 곧 교만한 자이다.

    만일 내가 어느 영역에서 맴돌고 있다면 그 영역에서 나는 게으르다는 말이 된다. 곧 교만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독불장군 같은 것이 있다. 전쟁을 두 번 겪으신 나의 조부모와 홀로 자수성가하신 아버지에게서 내려받은 것이다. 내가 보고 배운 것이 그것이다. 홀로 삶의 난관들을 헤쳐가는 것.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려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자보다 어리석은 자에게 소망이 있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교만함을 버리고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택하겠다. 부족하고 절름거리는 모습 그대로 사람들 앞에 서 보겠다. 내겐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리 큰 상처도 시간이 가면 아물고 통증은 사라진다. 내가 과거에 용서했다고 하는 사건들이 충분히 아물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프다면 그건 아직 용서를 못한 것이다. 그러니 누구나 그렇듯이 내게도 그 아픔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누구나 이런 과정을 통과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비록 불의하지만 그래도 아빠이고 남편이지 않은가. 이따금씩 큰아이와 아내가 과거의 아픔을 이야기하면 내 마음도 무너진다. 나도 나의 아픔이 있다. 주님만 아시는… 그러나 외면하지 않고 들으려 한다. 내가 잘못한 것은 미안하다고 한다.

    자녀가 부모에게 먼저 섭섭함을 고백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늙으신 부모가 세상을 떠나려고 하실 때나 하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에게는 부모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걸어야 한다. 내가 가끔씩 큰아이하고 몇 시간이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서로 언성을 높이고 다투고, 미안하다고 고백하고 용서하며 밤을 샌다. 내 속을 다 뒤집어 보여준다. 나는 권위자에게 그런 것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비난을 받아도 권위자가 늘 옳았지. 내가 더 늙기 전에, 아이가 장성하여 집을 떠나기 전에 풀어야지 않겠는가.

    기도만 한다고 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게 아빠라는 권위자와 상처받은 자녀 사이에 삶의 깊이 파인 골을 풀어가는 방법이다.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권위자의 수치를 가족들 앞에서 절름거리며 드러내는 것이다. 나도 사랑한다. 무지무지 사랑한다. 그러니 내 것을 다 내어주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권위자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으면 결코 풀어지지 않는 문제가 반드시 있다. 네 분의 어르신 장례를 치르면서 배운 것이다. 그것을 안 한 권위자는 평생 자녀의 얼굴을 못 보거나, 아니면 임종 앞에서라도 자녀들에게 섭섭한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기 싫다. 내가 먼저 하겠다.

    내 비록 부족하고 절름거릴지라도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겠다. 내가 가장 약할 그때에 나의 강함이 되시는 예수님을 소망하겠다. 아멘.

  • 잠언 25장 묵상 – 왕 같은 제사장의 삶과 하나님의 숨은 보물

    잠언 25장을 묵상하며 하나님이 숨기신 보물을 발견하고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배우세요. 겸손과 경외로 지혜를 구하며 감사와 신뢰로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일을 숨기는 것이고 왕들의 영광은 일을 살피는 것이다.” (잠언 25:2, 직역성경)

    왕의 교과서, 잠언

    믿는 자들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다고 기록되었다. 우리는 모두 왕이다. 잠언 25장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왕의 교과서다. 하나님이 숨기신 보물을 찾도록 부르신 책이다. 잠언은 반복해서 말한다. 은과 금보다 지혜를 구하라, 지혜가 더욱 귀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재물과 영광이 따를 것이다, 훈계를 버리지 말라.

    겸손이 왕의 지혜다

    하나님의 일을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겸손히 그분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로 기뻐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신뢰하며 감사하라. 그러면 지나온 모든 시간이 해석될 것이다.

    단 한 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 나의 실수까지도 아시고 피할 길을 미리 준비하신 그분의 손길을 보게 된다.

    과거 속에 숨은 하나님의 포석

    과거의 모든 사건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왕으로 세우기 위한 포석이었다. 바둑의 한 수, 체스의 한 칸처럼 그분의 계획에는 의미 없는 일이 없다.

    이제 우리는 과거를 감사로 보고, 현재를 신뢰로 살며, 숨겨진 하나님의 일을 찾아가야 한다.

    “너희는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아멘.

  • 잠언 21:2 묵상 – 여호와께서 마음을 달아보신다

    잠언 21:2 말씀 묵상. 사람은 자기 길이 옳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진심과 동기를 보신다. 삶의 서투름 속에서도 하나님은 교훈과 회개의 길로 인도하시며, 중심을 중요시하시는 주님의 시선을 묵상한다. 오늘의 삶에서 존중과 사랑을 실천하며 마음을 점검하는 도전과 울림을 제공한다.

    “각 사람의 모든 길이 자기 눈에는 바른 듯하나 여호와께서 마음들을 달아보신다.” (잠언 21:2, 직역성경)

    마음 중심을 보는 하나님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믿지만 하나님은 겉보다 마음을 보신다. 인간은 미숙하고 불완전하며, 권위자조차 완전하지 않다. 하나님은 결과보다 마음의 방향을 달아보신다. 마치 어린아이가 넘어지면서도 손길과 사랑을 배우듯,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선한 마음을 보신다.

    삶에서 배우는 교훈

    나의 인생도 그렇다. 대인관계에 서툴고 표현이 부족했지만 마음까지 거짓된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고 싶었으나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런 나의 중심을 아신다. 아이들이 나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배움을 주고,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는 순간, 나는 겸손과 존중을 새롭게 배운다. 이러한 경험은 독자들에게도 삶의 교훈과 공감을 남길 것이다.

    연약함 속에서도 회복을 원하시는 하나님

    중독이나 습관 같은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정죄보다 회복을 원하신다. 선한 마음을 가진 자는 넘어져도 괴로워하며 다시 일어나려 한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달아보시고 고치시며 새롭게 하신다. 이는 마치 불완전한 도자기를 조심스럽게 빚어 완전하게 만드시는 장인처럼, 우리의 마음을 다루시는 섬세한 손길을 보여준다.

    가정을 통한 배움과 겸손

    가정 안에서도 배움이 있다. 아내를 통해, 자녀를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보고 교만을 버린다. 존중과 사랑을 배우며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곧아진다. 오늘도 나는 결심한다. 존중과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마음을 따라 살아가겠다고. 이 결단을 마음에 새기고 매일 실천하며, 독자도 자신의 삶에서 동일한 결단을 실천하도록 도전받기를 바란다. 이 결단이 반복될 때, 삶 속에 깊은 울림으로 남게 될 것이다.


    묵상 원본

    왜 여호와께서 마음들을 달아보실까. 사람은 미련하고 미숙하기 때문이다. 모든 권위자가 다 불의하기 때문이다. 나의 자녀들만 해도 나와 아내보다는 더 좋은 환경에서 조금 더 나은 권위자 아래에서 성장하지 않는가. 그러니 자녀들이 나보다 모든 면에서 탁월한 것이다. 나처럼 대인관계가 서투른 사람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그 부분에서는 아이들이 나의 선생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사람이 하는 어떤 일들의 결과물을 보시지 않는다. 그 마음들을 보시는 것이다. 나처럼 서투르고 모난 곳이 많은 사람은 정말 모르니 그게 최선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선생님들에게 많이 맞았고, 악명 높은 배문중고등학교에서는 왜 맞는지 이유도 모르고 맞았고, 시험 점수 떨어졌다고 맞았고, 숙제 놓고 와서 맞았고, 쳐다본다고 맞았고, 출석부로 얼굴도 맞고, 허구한 날 단체 기합에, 이래저래 맞았고, 주일에 교회 간다고 맞았고, 기계공으로, 그다음 군대, 거반 30살까지 남자들만 득실대는 세상에서 살면서 매 맞고, 수근거림당하고, 뭐 그랬다. 그때는 다 그리 살았다. 당연한 건 줄 여기고 살았다. 그러니 어찌 알겠는가.

    나도 존중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나의 마음이 여호와 앞에서 굽어졌는가. 악한 마음으로 그리 하였는가. 아닐 것이다. 인간관계하는 법을 모르니, 표현하는 법을 모르니,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하니,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했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닐 뿐이다. 그렇다고 나의 마음까지 거짓된 것은 아니다.

    몰라도 괜찮다. 배우면 된다. 잘못을 깨달으면 회개하면 된다. 그러나 마음의 근본 동기는 어떻게 하겠는가. 예를 들어 습관적인 중독이 있다고 하자. 마음이 선한 자는 그것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끌려간다. 좋아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안 되는 것 알면서도 끌려간다. 나도 아직 끊어야 할 그리 좋지 않은 습관들이 있다. 버럭하는 것, 조급한 것, 가끔 뉴스 보는 것 등.

    그러면 그들의 마음도 악한 것인가. 아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마음들을 달아보신다고 생각한다. 달아보시고 도와주시려고, 고쳐주시려고, 구원하시려고, 새롭게 하시려고, 알려주시려고, 새 힘 주시려고, 존중하고 섬기는 사람 되라고, 사랑을 배우게 하시려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시려고, 기쁘게 받고, 자기 짐을 나누어 지는 방법을 알게 하시려고, 붙들고 있는 우상을 놓을 수 있게 하시려고 등등…

    우리 집의 아내는 나의 도움이요, 큰아이들은 나의 선생들이고, 어린아이들은 나의 과거를 비추는 거울들이다. 아직도 나는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내가 전에는 알지도 못했고 깨닫지도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고 회개하면서 이제서야 하나하나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교만하겠는가.

    어제도 하나 배웠다. 아빠, 잘해주려고만 하지 말고 존중해주려고 해보세요. 그래서 그걸 해보려고 한다. 여호와께서 오늘 나의 마음 달아보시고 기뻐하신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아멘.

  • 거만 뒤 따라오는 수치, 겸손이 부르는 지혜 – 잠언 11:2

    잠언 11:2 말씀과 나의 경험을 통해 거만과 수치, 겸손과 지혜를 깨닫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묵상. 본문 전체의 중심 말씀으로, 묵상과 경험의 배경을 안내한다.

    잠언 11:2 [직역성경] – “거만함이 들어올 때 수치가 들어오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지혜가 있다.”

    거만함과 수치

    잠언 11:2 [직역성경] 말씀처럼, 혈기를 부린 후 대부분 혼자 있고 싶었다. 집에서든 어디서든 화를 낸 뒤에는 씩씩거리며 담배 한 가치 물고 혼자 어딘가로 가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이게 바로 수치가 거만함을 따라오는 것이다.

    언쟁 후 성찰

    말씀처럼,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조근조근 입을 열었더라도 언쟁 후 숨고 싶다면 스스로 거만하다는 증거다. 누가 처음부터 지혜롭고 겸손하겠는가? 우리 모두 처음에는 거만했다. 나도 자녀, 아내, 아랫사람들에게 불완전한 권위자였다.

    겸손과 지혜의 길

    딸이 말했다. “아빠, 그때 나 14살이었어.” 나는 웃으며 갱년기 같다고 말했지만, 혈기 많은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그러하다. 입을 열고 난 후 수치심을 안다. 거만이 따른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지혜를 구한다. 잠언 11:2 [직역성경]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겸손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예수님을 신뢰하며 거만을 끊기 위해 오늘도 걸어간다. 아멘.


    원본

    나의 경험상, 혈기를 부린 후 대부분 혼자 있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는 말이다. 일을 하며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집에서든 어디서든 화를 낸 이후에는 대부분 씩씩거리며 담배 한가치 물고 혼자 어디론가 가더라. 이게 다 무엇인가. 바로 수치가 거만함을 따라 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꼭 큰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도, 잔잔히, 조근조근 입을 열었다 하여도 언쟁이 끝난 후에 혼자 어디론가 숨고 싶다면 이는 분명 본인이 거만하다는 증거임을 기억하자.

    그러나 어느 누가 처음부터 지혜롭겠는가. 누가 처음부터 성숙한 권위자이겠는가. 누가 처음부터 겸손하겠는가. 권위자의 상처가 나의 부모님만 해당되겠는가. 아니다. 학교, 상사, 영적 권위자 다 포함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처음에는 모두 거만하였다. 나도 자녀들에게, 아내에게, 그리고 나의 아랫사람들에게 똑같이 불의한 권위자이다. 그러니 할 말 있는가. 나의 딸이 “아빠 그때 나 이제 14살이었어” 라는 말을 잊을만 하면 한번씩 한다. 그 아이 14살때 나는 딸에게 어떤 아빠였는가. 불과 5년 전 나의 모습이다.

    딸이 내게 그러더라. 아빠 요즘 갱년기 같다고. 내가 웃었다. 갱년기는 홀몬의 변화 반응이지. 그 혈기 많고 소리 지르던 아빠의 요즘 모습이 딱 갱년기 증상이라는 것이다. 내가 아직 육십도 안 되었는대 무슨 갱년기인가. 그런데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 혈기 충만한 80세 여성도 나는 보았다. 우렁찬 목청으로 엄청 지르더라. 갱년기를 격는다고 혈기가 빠지나.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입이 열린 후의 수치심을 이제 나는 안다. 내가 거만하여 그것이 따라온것도 안다. 그 느낌이 싫다. 그래서 지혜를 더욱 구하는 것이다. 겸손하려고, 겸손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려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자 되어 거만, 곧 선악나무의 열매들을 끊기 위하여 지금도 걸어가는 것이다. 아멘. 예수님 도와주세요.

  • 잠언 26장 묵상: 교만과 어리석음, 그리고 말씀 앞에서의 깨달음

    잠언 26장은 교만과 어리석음의 위험을 경고하며,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자의 끝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 묵상을 통해 교만의 견고한 진을 허물고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길을 함께 생각해 봅니다.

    잠언 26
    12 너는 자기 눈에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을 보았느냐? 그보다는 어리석은 자에게 희망이 있다. 16 게으른 자는 판단력 있는 충고자 일곱 명보다 자신을 더 지혜롭게 여긴다. (직역성경).

    잠언 26장은 온갖 악의 모음집처럼 읽혀진다. 소식과 잠언을 어리석은 자에게 두는 것 자체가 죄악일 수 있다. 그는 우둔하여 온갖 죄악을 짓고 다니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많은 악이 어리석은 자의 입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럼에도 이 모든 악을 무색하게 하는 단 하나의 성경 말씀이 있다면 12절이 아닐까 한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 즉 모든 지혜자들보다 자신을 더욱 지혜롭게 여기는 자이니 곧 교만하여 누구의 말도, 어떤 조언과 책망도 듣지 않는 자이다.

    사람이 교만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인생의 막대기로 인해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여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왜 교만함을 좋아할까. 아기들과 함께 있다 보면 깜짝 놀라고 당황스러울 때가 참 많다. 무개념, 노개념이 참 무섭다. 그것은 정말 거시기하다. 저러다가 위험할 수도 있겠다 하는 순간들이 이따금씩 발생한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일일이 하나하나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이미 탑재되어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 모든 규칙들이 어쩌면 말씀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견고한 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무너져 내린 나의 사고의 틀만 봐도 참 많지 않은가. 처음에 나는 이렇게, 이러한 가치관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자녀를 양육하리라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무너져 내리지 않았는가. 내가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배웠던 소위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방법들과 규범들은 어찌 보면 시대의 변화에 맞게 재구성되거나 폐기되어야 할 것들이 참 많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것의 견고한 진으로 자녀들을 누르고 있게 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 그러다가 시대의 장벽 앞에서 어느 순간 박살이 나면, 참 마음이 어려운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지. 이러한 견고한 진들이 모이고 모여,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하게 되고 그것이 곧 교만이라는 높은 바벨탑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 결국 내 앞에는 주님의 말씀만 남는다. 저 교만한 자를 정의하는 오늘의 말씀 앞에서, 나는 저기에 지극히 작은 일부분이라도 해당되지 않는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보다 스스로를 더욱 지혜롭게 여기는 부분이 있는가. 말씀을 대적하여 일어선 아직 깨닫지 못한 견고한 진이 있는가, 그것이다.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주님 아니면 안 됩니다. 아멘.

  • 거만과 수치, 그리고 겸손이 주는 지혜 – 잠언 11장

    거만과 수치, 그리고 겸손이 주는 지혜 – 잠언 11장

    잠언 11:2 말씀을 통해 ‘거만함이 수치를 불러오고, 겸손이 지혜를 가져온다’는 영적 원리를 묵상합니다. 가인의 선택과 우리의 일상 속 반응을 연결하며, 수치에서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나눕니다.

    잠언 11:2
    거만함이 들어올 때 수치가 들어오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지혜가 있다. (직역성경)


    오늘은 수치에 관한 메타인지를 하는 날이다. 수치는 거만할 때 들어온다. 예를 들면 아이들에게 버럭 할 때조차도 수치가 들어온다. 그러니 내게는 쌓여 있는 수치가 그만치 많은 것이다. 가장의, 어른의 뜻에 따르지 않는 아이에게 분노가 올라올 때, 왜 씩씩거리나. 그 이면에 있는 것이 두려움과 수치이다.

    가인은 자기의 수치를 해결하려고 그의 근원을 제거(살인)하는 쪽을 택하였다. 오늘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부모를, 권위자를, 자녀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없으니 미워하며 자신을 죽이는 쪽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게 모두 죄의 열매, 즉 선악과의 열매 아닌가. 거만하여 두려움과 수치가 따라오니 다른 사람에게 버럭하며 분을 내는 것이다.

    거만할 때 수치가 들어오지, 혈기를 내야 수치가 오는 것이 아니다. 입을 다물어도, 입술을 지켜도 그 전에 교만하면 수치는 그냥 들어온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할까. 회개해야지. 나의 상처를 계속 내어드려야지. 성령이 만지실 때, 수술하실 때 고통스러워 구르면, 그분은 잠깐 하시고 멈추시는 것 같았다. 그때에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은 여기까지만 하시나 보다 할 것인가, 나 괜찮으니 계속 하시라고, 통째로 다 가져가시라고 힘써 그분의 손을 끌어당기겠는가.


    예수님, 도와주세요, 오늘 나의 상한 심령을 다 가져가 주세요. 나를 긍휼히 여겨 주세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