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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언28장: 숨긴 죄는 형통을 막고, 자백은 자비를 부른다

    잠언 28장 13절은 우리에게 죄를 숨기면 형통하지 못하지만,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자비를 얻는다고 말한다. 속사람 치유의 과정에서 우리는 과거의 죄뿐 아니라 지금의 죄까지 고백하며 진정한 회복을 경험한다.

    “자기 범죄들을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자비를 얻을 것이다.” (잠언 28:13, 직역성경)

    하나님께서는 숨김없는 자를 기뻐하신다. 속사람의 치유는 단순한 감정 회복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죄를 직면하고 자백하는 과정이다. 과거의 잘못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관계 속의 죄까지 함께 고백할 때 진정한 회복이 일어난다.

    자녀를 향한 부족함을 깨닫고 미안함을 표현하는 일, 오래된 상처를 남긴 이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일은 믿음의 실천이다. 용서는 나의 몫이지만, 회개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신다.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도, 가족에게도 숨김없이 진심으로 사과할 때 그곳에 은혜가 임한다. 숨긴 죄는 형통을 막지만, 고백은 하나님의 자비를 여는 열쇠다. “예수님, 내 속의 악한 것들이 다 드러나게 하소서.” 기도합니다.


    묵상 원본

    속사람 치유를 받을 때마다 숨겨진 자신의 범죄함을 깨닫고 회개하며 돌이키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자녀들이 자라가면서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몫이다. 그러나 작은 자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속사람 치유를 받을 때 과거의 잘못만 회개하는가? 나는 그렇게 않되더라. 그 사건으로 인해 지금 나의 자녀들에게 내가 그렇게 악하게 하였음을 함께 깨닫고, 지금 나의 죄를 동시에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누구에게든 범죄함이 드러났으면 반드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은 당연하다. 더하여 이웃을 찾아가 미안하다고, 용서의 한마디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속사람 치유도 받고, 국민학생 때 욕하고 떠나간 선생님도 찾아가 죄송하다고 말하고 하는 것이다.

    나도 소문난 장난꾸러기였다. 사촌 누나 얼굴에 불침 한 방 놓고 고모한테 마빡 맞은 적도 있고 그러지 않았나. 나중에 미안하다고 다 고백했다. 내 동생은 오빠가 자기 발가락에 불침 놨다고 아직도 말하고 다닌다. “너 자다가 새끼발가락에 불침 맞아봤어?” 인상 깊었나 보다.

    아이들에게도, 아내한테도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지. 입 다물겠는가? 나의 권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입 다물겠는가? 권위자는 무조건 선인가? 아니다. 그러니 자기 범죄를 숨기지 못한다. 할 수 있는 한 나의 범죄함을 다 고백하겠다. 그러니 예수님, 더욱 내 속의 악한 것들이 다 드러나게 해주세요. 아멘.

  • 잠언 27장 묵상 – 사랑이 있는 책망, 상처 주는 비난

    공개적인 책망은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공개적인 비난은 관계를 무너뜨린다. 잠언 27장을 통해 사랑의 언어와 관계 회복의 지혜를 배운다.

    공개적인 책망이 비밀을 지켜주는 사랑보다 낫다. 사랑하는 자의 상처들은 신실한 것들이지만 미워하는 자의 입맞춤들은 속이는 것들이다. (잠언 27:5‑6,직역성경)

    잠언 27장 말씀 묵상을 통해 오늘 우리의 말과 태도를 돌아보자.

    비난과 책망의 차이

    청년 시절 피지에서 학교를 섬길 때의 일이 있었다. 어느 날, 함께 일하던 현지인 친구에게 이유도 모른 채 따귀를 맞았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은 내가 그의 문화 속에서 공개적인 비난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큰 수치를 느끼고 공동체를 떠났다. 당시 나는 그것이 단순한 ‘책망’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비난’이었다.

    사랑의 언어 배우기

    우리 문화 속에서도 ‘책망’이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집안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렇다. 비난은 상대의 마음을 닫게 하지만, 신실한 사랑의 책망은 관계를 세운다.

    나 또한 자녀들에게 공개적인 비난을 자주 했다. “아가야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는 괜찮지만, 그 앞에 “너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라는 말이 붙으면 비난이 된다. “밖에 추우니 따뜻하게 입어”는 사랑이지만, “추우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는 비난이다. 나는 그렇게 자주 입으로 상처를 주었다.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

    비난을 멈추려면 스스로 권위자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불의한 권위자처럼 느낀다면 이미 비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낮아짐에서 시작된다. 자녀가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함부로 말해요?”라고 말할 때, “미안해, 아빠가 몰랐어”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때 아이는 “아빠, 내가 용서해드릴게요”라며 마음을 연다.

    묵상과 적용

    공개적인 책망은 관계를 세우지만, 공개적인 비난은 관계를 무너뜨린다. 오늘 말씀은 나의 동기를 주님께 맡기라고 가르친다. 사랑하는 자의 상처는 신실하다. 예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주 앞에 엎드리면 된다.
    묵상 포인트: 오늘 나는 사랑으로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비난으로 말하고 있는가?
    적용: 이 말씀을 묵상하며 나의 언어를 돌아보세요.


    묵상 원본

    청년때 피지에서 학교를 섬길 때 일이다. 8-9개월쯤 되는 어느 날, 함께 성실하게 함께 섬기는 나의 동갑 현지인 친구에게 어느 날 갑자기 따귀를 후려 맞았다. 평소 나를 좋아하던 고2 남학생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고 아 아이가 알려주는데로 친구를 찾아가서 나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던 적이 있다. 그 이후, 그 지역 최고의 존칭인 마스터라는 호칭으로 학생들이 나를 불렀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나라 문화권에서 공개적인 비난을 했던 것이다. 그 친구는 큰 수치감에 결국은 공동체를 떠났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는 책망을 한다고 하면서 공개적인 비난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집에서는 식구들 끼리니까 괜찮을 수 있다. 직장이야 뭐 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니 그렇다고 하자. 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생기더라. 어늘 날, 몇 달 전에 나의 아들이 내게 불편한 말을 건냈다. “아빠 그때 정말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내 맘을 이해해주는 아들에게 얼마나 고마왔던지… 그러나 나도 누군가에게 그러지 않았을까.

    나도 자녀들에게 공개적인 비난 많이 한다. “아가야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 이건 괜찮다. 그러나 그 앞에 “너 지금 아무것도 않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비슷한 말이 붙으면 이건 비난이다. 내가 잘 하는 짓이다. “밖에 추우니 따뜻하게 잆어” 이거 좋다. 그러나 뒤에 “추우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 요 말도 딱 비난이다. 내가 많이 했던 말들이다. 나도 입이 험하고 거칠다.

    혹시 나도 그런가, 궁굼하다면 스스로 분별하는 법이 있다. 자신을 불의한 권위자라고 생각한다면 거의 100% 그렇게 하고 있다 여기면 되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더 예뻐하고 그 옆의 아이는 모른체 한다면 그것도 비난이다. 옆에 있는 아이는 그저 멍 때리며 바라볼 뿐이다. 소외된 마음과 함께… 정작 비난하는 자는 자기가 무얼 하는지 모른다.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함부로 말해요?” 이런 비슷한 말을 자주, 가끔 듣는다면 그는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하나. 미안해, 아빠가 잘 몰랐어. 무조건 해야 한다. 그러면 6살짜리가 뭐라는지 아는가. “아빠 내가 용서해드릴게요” 한다. 그래, 나도 용서를 받아야지. 그런데 권위자는 미안하다는 말을 안하더라.

    그래서 다시 회개한다. 공개적인 책망이 아니라 공개적인 비난을 했던 모든 말들을 회개한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이 있다. 사랑하는 자의 상처들은 신실하다고 인정해주는 오늘 잠언의 말씀이 내게 말하지 않는가. 내 마음의 동기를 주께서 알아주시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말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도 괜찮아, 주님 앞에 엎드리면 되, 예수님이 알아주시면 되는 것이다. 아멘.

  • 제목: 잠언 26장 묵상 |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

    잠언 26장을 묵상하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보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소망이 있음을 배운다. 부족함과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는 믿음의 걸음을 살펴보자. 잠언 26장 말씀 묵상으로 삶에 적용해 보자.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는 어리석은 자에게 더 소망이 있느니라.” (잠언 26:12, 흠정역)

    어리석은 자는 쓸모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절뚝거리더라도 앞으로 걸어간다. 반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게으른 자는 제자리에서 돌고 돈다. 문짝이 돌쩌귀 위에서 도는 것처럼, 그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맴돌고 있다면, 그곳에서 나는 게으른 자다. 곧 교만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나에게 내려온 독불장군 같은 기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고자 한다. 절름거리더라도, 어리석은 자의 길을 택하겠다. 부족함을 드러내며, 사람들 앞에 서겠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용서와 관계 회복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프다면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나는 권위의 자리에서 절름거리며 내려와야 한다. 자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내가 먼저 말을 건다.

    기도만으로는 관계의 골이 메워지지 않는다. 권위자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부끄럽지만, 그것이 진짜 회복의 시작이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그 길에서 예수님이 강함이 되신다.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겠다.


    묵상 원본

    어리석은 자, 쓸데없다. 그러나 저는 자가 아무리 절뚝거려도 그는 앞으로 걸어간다. 절뚝절뚝 뒤뚱거려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게으른 자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빙글빙글 그 자리에서 돌고 돌 뿐이다. 문 밖에 사자가 있으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게으른 자는 곧 교만한 자이다.

    만일 내가 어느 영역에서 맴돌고 있다면 그 영역에서 나는 게으르다는 말이 된다. 곧 교만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독불장군 같은 것이 있다. 전쟁을 두 번 겪으신 나의 조부모와 홀로 자수성가하신 아버지에게서 내려받은 것이다. 내가 보고 배운 것이 그것이다. 홀로 삶의 난관들을 헤쳐가는 것.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려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자보다 어리석은 자에게 소망이 있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교만함을 버리고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택하겠다. 부족하고 절름거리는 모습 그대로 사람들 앞에 서 보겠다. 내겐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리 큰 상처도 시간이 가면 아물고 통증은 사라진다. 내가 과거에 용서했다고 하는 사건들이 충분히 아물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프다면 그건 아직 용서를 못한 것이다. 그러니 누구나 그렇듯이 내게도 그 아픔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누구나 이런 과정을 통과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비록 불의하지만 그래도 아빠이고 남편이지 않은가. 이따금씩 큰아이와 아내가 과거의 아픔을 이야기하면 내 마음도 무너진다. 나도 나의 아픔이 있다. 주님만 아시는… 그러나 외면하지 않고 들으려 한다. 내가 잘못한 것은 미안하다고 한다.

    자녀가 부모에게 먼저 섭섭함을 고백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늙으신 부모가 세상을 떠나려고 하실 때나 하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에게는 부모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걸어야 한다. 내가 가끔씩 큰아이하고 몇 시간이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서로 언성을 높이고 다투고, 미안하다고 고백하고 용서하며 밤을 샌다. 내 속을 다 뒤집어 보여준다. 나는 권위자에게 그런 것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비난을 받아도 권위자가 늘 옳았지. 내가 더 늙기 전에, 아이가 장성하여 집을 떠나기 전에 풀어야지 않겠는가.

    기도만 한다고 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게 아빠라는 권위자와 상처받은 자녀 사이에 삶의 깊이 파인 골을 풀어가는 방법이다.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권위자의 수치를 가족들 앞에서 절름거리며 드러내는 것이다. 나도 사랑한다. 무지무지 사랑한다. 그러니 내 것을 다 내어주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권위자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으면 결코 풀어지지 않는 문제가 반드시 있다. 네 분의 어르신 장례를 치르면서 배운 것이다. 그것을 안 한 권위자는 평생 자녀의 얼굴을 못 보거나, 아니면 임종 앞에서라도 자녀들에게 섭섭한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기 싫다. 내가 먼저 하겠다.

    내 비록 부족하고 절름거릴지라도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겠다. 내가 가장 약할 그때에 나의 강함이 되시는 예수님을 소망하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