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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잠언 8장 묵상 – 다른 방법, 지혜의 길을 찾다

    세상의 길이 막힐 때에도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여호와의 지혜를 구하라. 은과 금보다 귀한 지혜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말씀: 잠언 8:10-13
    “은 말고 내 훈계를 취하고 정제된 금보다 지식을 취하여라. 이는 지혜가 진주보다 좋으니 어떤 진귀한 것도 그것과 같을 수 없다. 나는 지혜라, 영리함과 함께 거주하고 지식과 판단력을 내가 발견할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니.” (직역성경)

    잠언 8장 말씀에서 배운 지혜는 세상의 부보다 더 귀하다. 사람들은 은과 금을 얻기 위해 많은 시간을 쏟는다. 불안한 미래를 대비해 재물을 모으려 하지만, 정작 지혜를 구하는 데에는 인색하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지혜는 은금보다 귀하고, 그 어떤 보물과도 비교할 수 없다.

    지혜는 영리함과 함께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세상의 부를 얻는 자들도 생각이 견고하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하물며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자라면 더욱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1. 같은 방법의 한계

    오늘 아침, 아이가 장난감의 건전지를 열지 못해 도움을 구했다. 나는 “같은 방법으로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라”고 말했다. 아이는 곧 그것을 해냈다. 이 단순한 사건이 나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나도 같은 방법으로만 살아왔던 것은 아닌가. 지혜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불의한 방법을 미워하고, 새로운 판단력과 분별력을 얻게 된다.
    요약: 지혜는 선택의 방향을 바꾼다.

    2. 다른 방법, 지혜의 길

    수련회 이후, 내 삶의 길이 막힌 듯 보인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이 ‘다른 방법’을 찾을 때이다.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엎드리는 길 말이다. 재물을 내려놓고도 주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것이 참된 지혜의 길이다. 잠언 8장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진정한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음을 강조한다.

    아브라함처럼, 나는 의심하지 않겠다. 근심하지 않겠다. 오히려 예수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다리겠다. 지극히 크신 나의 기업이요 상급 되신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 나의 참 소망이다.
    요약: 여호와를 경외함이 참된 지혜의 길이다.

    적용

    오늘 나는 어떤 ‘다른 방법’을 시도할 것인가? 세상의 방법이 아닌,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의 길로 나아가자. 오늘 나는 지혜를 선택하겠다.


    묵상 원본

    은과 정제된 금, 사람들은 이것을 얻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돈을 벌거나, 직접 캐거나, 그 밖에 많은 방법을 동원하여 은과 금을 얻으려 한다. 요즈음은 금을 사려고 해도 다 동이 나서 살 수가 없다고 하더라. 미래가 불안하니 이런 거에 투자하여 안전을 담보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은금보다 더욱 귀하여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지혜는 영리함과 함께한다. 우리가 이렇게 진귀한 지혜를 얻으려면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욱 자신을 다스리고 생각과 마음을 더욱 지켜야 할 것이다. 세상 부를 가진 자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생각이 견고하고, 소셜미디어 등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일 따위는 아예 하지도 않는다. 일단 이게 되어야 부를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 그러니 세상 보물보다도 더욱 진귀한 지혜를 얻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오늘 아침에 아이가 장난감의 건전지 뚜껑을 열다가 잘 안 열려서 내게 도움을 구하였다. 나는 아이에게 “같은 방법으로 안 될 때는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는 거야.”라며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아이는 곧 그것을 해내었다.

    그래, 다른 방법! 이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며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지혜는 영리함과 함께한다. 그녀는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는 것을 미워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지혜를 발견하고, 그때에 영리함과 지식, 판단력이 함께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래, 다른 방법. 지금까지 근근이 살아왔다. 그러나 이번 수련회 이후로 다 막혔다. 우리 집에 돈을 버는 사람이 지금은 나밖에 없으니 돈 벌어야지. 매달 지출해야 할 돈을 벌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은 사방이 막히고 오히려 겹겹이 둘러 막혔다. 기도하지만, 부르짖지만, 여전히 다른 일을 구하며 이것저것 시도하는 중이다. 늘 하던 대로 하고 있었다.

    한순간 재물을 획득하고도 주께서 부르실 때에 베드로처럼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준비가 내게는 되어 있는가.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시는 자마다 한결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주님을 따라갔다. 내게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어제 금요예배 때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그것을 감당할 준비가 내게는 되어 있는가.

    다른 방법,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심으로 주님 발앞에 엎드릴 때인가. 돈은 누가 버나. 관리비, 학비, 생활비 등등… 다른 방법, 그래서 더욱 여호와를 경외하려 하는 것이다. 백세에 여호와의 말씀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브라함처럼.

    나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 안에서 더욱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겠다. 지극히 크신 나의 기업이요 상급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소망하며 바라보겠다. 예수, 나의 참 소망! 아멘.

  • 잠언28장: 숨긴 죄는 형통을 막고, 자백은 자비를 부른다

    잠언 28장 13절은 우리에게 죄를 숨기면 형통하지 못하지만,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자비를 얻는다고 말한다. 속사람 치유의 과정에서 우리는 과거의 죄뿐 아니라 지금의 죄까지 고백하며 진정한 회복을 경험한다.

    “자기 범죄들을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자비를 얻을 것이다.” (잠언 28:13, 직역성경)

    하나님께서는 숨김없는 자를 기뻐하신다. 속사람의 치유는 단순한 감정 회복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죄를 직면하고 자백하는 과정이다. 과거의 잘못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관계 속의 죄까지 함께 고백할 때 진정한 회복이 일어난다.

    자녀를 향한 부족함을 깨닫고 미안함을 표현하는 일, 오래된 상처를 남긴 이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일은 믿음의 실천이다. 용서는 나의 몫이지만, 회개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신다.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도, 가족에게도 숨김없이 진심으로 사과할 때 그곳에 은혜가 임한다. 숨긴 죄는 형통을 막지만, 고백은 하나님의 자비를 여는 열쇠다. “예수님, 내 속의 악한 것들이 다 드러나게 하소서.” 기도합니다.


    묵상 원본

    속사람 치유를 받을 때마다 숨겨진 자신의 범죄함을 깨닫고 회개하며 돌이키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자녀들이 자라가면서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몫이다. 그러나 작은 자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속사람 치유를 받을 때 과거의 잘못만 회개하는가? 나는 그렇게 않되더라. 그 사건으로 인해 지금 나의 자녀들에게 내가 그렇게 악하게 하였음을 함께 깨닫고, 지금 나의 죄를 동시에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누구에게든 범죄함이 드러났으면 반드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은 당연하다. 더하여 이웃을 찾아가 미안하다고, 용서의 한마디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속사람 치유도 받고, 국민학생 때 욕하고 떠나간 선생님도 찾아가 죄송하다고 말하고 하는 것이다.

    나도 소문난 장난꾸러기였다. 사촌 누나 얼굴에 불침 한 방 놓고 고모한테 마빡 맞은 적도 있고 그러지 않았나. 나중에 미안하다고 다 고백했다. 내 동생은 오빠가 자기 발가락에 불침 놨다고 아직도 말하고 다닌다. “너 자다가 새끼발가락에 불침 맞아봤어?” 인상 깊었나 보다.

    아이들에게도, 아내한테도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지. 입 다물겠는가? 나의 권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입 다물겠는가? 권위자는 무조건 선인가? 아니다. 그러니 자기 범죄를 숨기지 못한다. 할 수 있는 한 나의 범죄함을 다 고백하겠다. 그러니 예수님, 더욱 내 속의 악한 것들이 다 드러나게 해주세요. 아멘.

  • 잠언 27장 묵상 – 사랑이 있는 책망, 상처 주는 비난

    공개적인 책망은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공개적인 비난은 관계를 무너뜨린다. 잠언 27장을 통해 사랑의 언어와 관계 회복의 지혜를 배운다.

    공개적인 책망이 비밀을 지켜주는 사랑보다 낫다. 사랑하는 자의 상처들은 신실한 것들이지만 미워하는 자의 입맞춤들은 속이는 것들이다. (잠언 27:5‑6,직역성경)

    잠언 27장 말씀 묵상을 통해 오늘 우리의 말과 태도를 돌아보자.

    비난과 책망의 차이

    청년 시절 피지에서 학교를 섬길 때의 일이 있었다. 어느 날, 함께 일하던 현지인 친구에게 이유도 모른 채 따귀를 맞았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은 내가 그의 문화 속에서 공개적인 비난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큰 수치를 느끼고 공동체를 떠났다. 당시 나는 그것이 단순한 ‘책망’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비난’이었다.

    사랑의 언어 배우기

    우리 문화 속에서도 ‘책망’이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집안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렇다. 비난은 상대의 마음을 닫게 하지만, 신실한 사랑의 책망은 관계를 세운다.

    나 또한 자녀들에게 공개적인 비난을 자주 했다. “아가야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는 괜찮지만, 그 앞에 “너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라는 말이 붙으면 비난이 된다. “밖에 추우니 따뜻하게 입어”는 사랑이지만, “추우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는 비난이다. 나는 그렇게 자주 입으로 상처를 주었다.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

    비난을 멈추려면 스스로 권위자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불의한 권위자처럼 느낀다면 이미 비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낮아짐에서 시작된다. 자녀가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함부로 말해요?”라고 말할 때, “미안해, 아빠가 몰랐어”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때 아이는 “아빠, 내가 용서해드릴게요”라며 마음을 연다.

    묵상과 적용

    공개적인 책망은 관계를 세우지만, 공개적인 비난은 관계를 무너뜨린다. 오늘 말씀은 나의 동기를 주님께 맡기라고 가르친다. 사랑하는 자의 상처는 신실하다. 예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주 앞에 엎드리면 된다.
    묵상 포인트: 오늘 나는 사랑으로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비난으로 말하고 있는가?
    적용: 이 말씀을 묵상하며 나의 언어를 돌아보세요.


    묵상 원본

    청년때 피지에서 학교를 섬길 때 일이다. 8-9개월쯤 되는 어느 날, 함께 성실하게 함께 섬기는 나의 동갑 현지인 친구에게 어느 날 갑자기 따귀를 후려 맞았다. 평소 나를 좋아하던 고2 남학생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고 아 아이가 알려주는데로 친구를 찾아가서 나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던 적이 있다. 그 이후, 그 지역 최고의 존칭인 마스터라는 호칭으로 학생들이 나를 불렀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나라 문화권에서 공개적인 비난을 했던 것이다. 그 친구는 큰 수치감에 결국은 공동체를 떠났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는 책망을 한다고 하면서 공개적인 비난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집에서는 식구들 끼리니까 괜찮을 수 있다. 직장이야 뭐 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니 그렇다고 하자. 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생기더라. 어늘 날, 몇 달 전에 나의 아들이 내게 불편한 말을 건냈다. “아빠 그때 정말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내 맘을 이해해주는 아들에게 얼마나 고마왔던지… 그러나 나도 누군가에게 그러지 않았을까.

    나도 자녀들에게 공개적인 비난 많이 한다. “아가야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 이건 괜찮다. 그러나 그 앞에 “너 지금 아무것도 않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비슷한 말이 붙으면 이건 비난이다. 내가 잘 하는 짓이다. “밖에 추우니 따뜻하게 잆어” 이거 좋다. 그러나 뒤에 “추우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 요 말도 딱 비난이다. 내가 많이 했던 말들이다. 나도 입이 험하고 거칠다.

    혹시 나도 그런가, 궁굼하다면 스스로 분별하는 법이 있다. 자신을 불의한 권위자라고 생각한다면 거의 100% 그렇게 하고 있다 여기면 되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더 예뻐하고 그 옆의 아이는 모른체 한다면 그것도 비난이다. 옆에 있는 아이는 그저 멍 때리며 바라볼 뿐이다. 소외된 마음과 함께… 정작 비난하는 자는 자기가 무얼 하는지 모른다.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함부로 말해요?” 이런 비슷한 말을 자주, 가끔 듣는다면 그는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하나. 미안해, 아빠가 잘 몰랐어. 무조건 해야 한다. 그러면 6살짜리가 뭐라는지 아는가. “아빠 내가 용서해드릴게요” 한다. 그래, 나도 용서를 받아야지. 그런데 권위자는 미안하다는 말을 안하더라.

    그래서 다시 회개한다. 공개적인 책망이 아니라 공개적인 비난을 했던 모든 말들을 회개한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이 있다. 사랑하는 자의 상처들은 신실하다고 인정해주는 오늘 잠언의 말씀이 내게 말하지 않는가. 내 마음의 동기를 주께서 알아주시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말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도 괜찮아, 주님 앞에 엎드리면 되, 예수님이 알아주시면 되는 것이다. 아멘.

  • 제목: 잠언 26장 묵상 |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

    잠언 26장을 묵상하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보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소망이 있음을 배운다. 부족함과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는 믿음의 걸음을 살펴보자. 잠언 26장 말씀 묵상으로 삶에 적용해 보자.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는 어리석은 자에게 더 소망이 있느니라.” (잠언 26:12, 흠정역)

    어리석은 자는 쓸모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절뚝거리더라도 앞으로 걸어간다. 반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게으른 자는 제자리에서 돌고 돈다. 문짝이 돌쩌귀 위에서 도는 것처럼, 그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맴돌고 있다면, 그곳에서 나는 게으른 자다. 곧 교만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나에게 내려온 독불장군 같은 기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고자 한다. 절름거리더라도, 어리석은 자의 길을 택하겠다. 부족함을 드러내며, 사람들 앞에 서겠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용서와 관계 회복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프다면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나는 권위의 자리에서 절름거리며 내려와야 한다. 자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내가 먼저 말을 건다.

    기도만으로는 관계의 골이 메워지지 않는다. 권위자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부끄럽지만, 그것이 진짜 회복의 시작이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그 길에서 예수님이 강함이 되신다.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겠다.


    묵상 원본

    어리석은 자, 쓸데없다. 그러나 저는 자가 아무리 절뚝거려도 그는 앞으로 걸어간다. 절뚝절뚝 뒤뚱거려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게으른 자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빙글빙글 그 자리에서 돌고 돌 뿐이다. 문 밖에 사자가 있으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게으른 자는 곧 교만한 자이다.

    만일 내가 어느 영역에서 맴돌고 있다면 그 영역에서 나는 게으르다는 말이 된다. 곧 교만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독불장군 같은 것이 있다. 전쟁을 두 번 겪으신 나의 조부모와 홀로 자수성가하신 아버지에게서 내려받은 것이다. 내가 보고 배운 것이 그것이다. 홀로 삶의 난관들을 헤쳐가는 것.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려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자보다 어리석은 자에게 소망이 있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교만함을 버리고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택하겠다. 부족하고 절름거리는 모습 그대로 사람들 앞에 서 보겠다. 내겐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리 큰 상처도 시간이 가면 아물고 통증은 사라진다. 내가 과거에 용서했다고 하는 사건들이 충분히 아물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프다면 그건 아직 용서를 못한 것이다. 그러니 누구나 그렇듯이 내게도 그 아픔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누구나 이런 과정을 통과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비록 불의하지만 그래도 아빠이고 남편이지 않은가. 이따금씩 큰아이와 아내가 과거의 아픔을 이야기하면 내 마음도 무너진다. 나도 나의 아픔이 있다. 주님만 아시는… 그러나 외면하지 않고 들으려 한다. 내가 잘못한 것은 미안하다고 한다.

    자녀가 부모에게 먼저 섭섭함을 고백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늙으신 부모가 세상을 떠나려고 하실 때나 하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에게는 부모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걸어야 한다. 내가 가끔씩 큰아이하고 몇 시간이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서로 언성을 높이고 다투고, 미안하다고 고백하고 용서하며 밤을 샌다. 내 속을 다 뒤집어 보여준다. 나는 권위자에게 그런 것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비난을 받아도 권위자가 늘 옳았지. 내가 더 늙기 전에, 아이가 장성하여 집을 떠나기 전에 풀어야지 않겠는가.

    기도만 한다고 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게 아빠라는 권위자와 상처받은 자녀 사이에 삶의 깊이 파인 골을 풀어가는 방법이다.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권위자의 수치를 가족들 앞에서 절름거리며 드러내는 것이다. 나도 사랑한다. 무지무지 사랑한다. 그러니 내 것을 다 내어주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권위자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으면 결코 풀어지지 않는 문제가 반드시 있다. 네 분의 어르신 장례를 치르면서 배운 것이다. 그것을 안 한 권위자는 평생 자녀의 얼굴을 못 보거나, 아니면 임종 앞에서라도 자녀들에게 섭섭한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기 싫다. 내가 먼저 하겠다.

    내 비록 부족하고 절름거릴지라도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겠다. 내가 가장 약할 그때에 나의 강함이 되시는 예수님을 소망하겠다. 아멘.

  • 잠언 25장 묵상 – 왕 같은 제사장의 삶과 하나님의 숨은 보물

    잠언 25장을 묵상하며 하나님이 숨기신 보물을 발견하고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배우세요. 겸손과 경외로 지혜를 구하며 감사와 신뢰로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일을 숨기는 것이고 왕들의 영광은 일을 살피는 것이다.” (잠언 25:2, 직역성경)

    왕의 교과서, 잠언

    믿는 자들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다고 기록되었다. 우리는 모두 왕이다. 잠언 25장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왕의 교과서다. 하나님이 숨기신 보물을 찾도록 부르신 책이다. 잠언은 반복해서 말한다. 은과 금보다 지혜를 구하라, 지혜가 더욱 귀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재물과 영광이 따를 것이다, 훈계를 버리지 말라.

    겸손이 왕의 지혜다

    하나님의 일을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겸손히 그분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로 기뻐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신뢰하며 감사하라. 그러면 지나온 모든 시간이 해석될 것이다.

    단 한 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 나의 실수까지도 아시고 피할 길을 미리 준비하신 그분의 손길을 보게 된다.

    과거 속에 숨은 하나님의 포석

    과거의 모든 사건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왕으로 세우기 위한 포석이었다. 바둑의 한 수, 체스의 한 칸처럼 그분의 계획에는 의미 없는 일이 없다.

    이제 우리는 과거를 감사로 보고, 현재를 신뢰로 살며, 숨겨진 하나님의 일을 찾아가야 한다.

    “너희는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아멘.

  • 잠언19 말씀묵상 – 조급함의 함정과 기다림의 축복

    잠언 19장은 조급함과 믿음 없는 서두름의 위험을 경고하고, 주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축복을 가르친다. (145자)

    잠언 19:2-3 (직역성경)
    “지식이 없는 사람도 좋지 않고, 발을 재촉하는 자는 죄짓는다. 사람의 우둔함이 자기 길을 치우치게 하고는 여호와께 그의 마음이 화를 낸다.”

    조급함의 위험 | 잠언19 말씀묵상

    잠언19의 말씀은 조급함의 위험을 경고한다. 조급함, 잠언19, 말씀묵상은 믿음의 결핍을 보여준다. 세상은 늘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재촉한다. 그러나 조급한 발걸음은 결국 함정으로 인도한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는다. 기도의 골방에서 기다릴 줄 안다.

    기다림의 믿음 | 믿음으로 응답을 기다리라

    잠언19의 교훈은 기다림 속에 믿음이 자란다는 것이다. 기도의 시간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응답을 기다릴 여유가 없기에 스스로 발을 재촉하고 사탄의 올무에 걸린다. 그러나 믿는 자는 다르다. 주님의 때를 신뢰하며, 과거의 인도하심을 기억한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길을 예비하신다.

    자녀양육과 인내 | 주님의 타이밍을 신뢰하라

    자녀에게도 조급함은 독이 된다. 부모의 과도한 푸시는 자녀를 망가뜨린다. 영적 문제는 인간의 말이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주님의 초자연적 사랑만이 개입하셔야 한다. 주님은 가장 좋은 타이밍을 재고 계신다. 그러므로 나는 재촉하지 않는다. 기다린다. 주님을 신뢰한다. 아멘.


    묵상 원본

    발을 재촉하는 자, 곧 조급하게 행하는 자이다. 어떤 상품을 팔거나 보험 등의 영업을 할 때,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 “마지막 혜택이 사라진다”와 같은 표현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유도하여 그 자리에서 계약하도록 만든다.

    조급하게 재촉하는 자가 혈기를 낸다. 조급한 자는 대체로 속도광이다. 상대방을 조정하는 무당의 영이 강할수록 조급하게 발을 재촉한다. 조급한 사람일수록 예수님 앞에서 기도의 시간을 내는 것을 어려워한다. “지금 일해서 돈 벌어야지. 더 열심히 일해야지.” 그렇지 않나.

    왜 조급하게 행동하는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기도해서 응답을 받을 여유가 없다. 그러니 자기 발을 재촉하여 사탄의 올무에 걸리는 것이다.

    나도 조급하다. 그러니 더욱 순종하여 골방에서 몇 시간이고 머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 많은 위기의 순간들에 주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보이지 않는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주님이 나의 앞길을 축복으로 바꾸시려고 어떻게 예비하셨는지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최소한 의식주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지금 조금 불편할 뿐이다. 자녀들도, 큰아이도 마찬가지다. 조급하게 푸시할수록 자녀들을 망가뜨릴 뿐이다.

    큰아이는 나하고 소울 타이가 되어 있다. 내가 아빠를 용서하지 못했던 모습 그대로 큰아이는 자기 아빠의 권위자를 향하는 것뿐이다. 그 아이는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이가 정말 용서해야 할 대상은 나, 즉 그 아이의 아빠이다.

    사람의 힘으로, 어떤 말로도 해결할 수 없다. 주께서 직접 개입하셔야 할 문제이다. 주님의 초자연적인 사랑이 개입하셔야 한다. 주님은 가장 좋은 타이밍을 재고 계신다. 나는 주님을 기다릴 것이다. 재촉하여 망치지 않을 것이다. 아멘.

  • 잠언 15장 4절 묵상 –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 말 한마디가 영혼을 살린다

    잠언 15장 4절 묵상은 온유한 혀가 생명나무임을 보여준다.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요, 패역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우리의 말은 영의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다. 생명을 살리는 말과 성결한 혀를 회복하는 길을 다루는 말씀 묵상.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이나 패역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잠언 15:4 (직역성경)

    잠언 15장 4절 묵상은 우리의 말이 얼마나 깊이 영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은 귀로만 듣지 않는다. 마음과 혼, 그리고 영으로도 듣는다.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영의 흐름이다. 왜곡된 말은 영을 상하게 하고, 온유한 말은 영을 살린다. 말의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힘이 존재한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왜곡된 생각이 영을 상하게 한다. 낙심과 두려움이 밀려올 때, 사탄은 거짓된 말들을 생각 속에 뿌린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영이 약해진다. 이는 참소의 말에 동의한 결과다.

    나 또한 무심코 왜곡된 말로 이웃의 영을 상하게 한 적이 있다. 입술을 통해 생명이 아닌 왜곡이 나간 것을 회개한다. 그리고 내 생각과 혀가 더 이상 대적의 통로가 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한다. 내 마음과 입술이 여호와 앞에서 정결하고 거룩하게 되기를 구한다.

    이 묵상을 통해 오늘 다시 선포한다. 나의 혀가 생명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말 한마디로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입술이 되게 하소서.

    주여, 내 생각과 말을 정결케 하소서. 사탄의 참소에 동의하지 않게 하시고, 온유한 혀로 생명의 말을 전하게 하소서. 내 입술을 통하여 영이 살아나게 하소서. 아멘.


    원 본

    잠언 15:4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이나 패역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직역성경)

    사람의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혼으로도 어떤 말과 생각을 듣는다. 패역한 혀, 곧 뒤틀리고 왜곡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말은 곧 영의 세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영의 현실이 말을 통해 전달되어진다. 그러니 사람의 영이 온유한 말을 들을 때 살아나고, 뒤틀리고 왜곡된 말로 인해 상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 특별히 누구로부터 어떤 입의 말을 듣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자신의 영을 상하게 할 때가 나는 있었다. 최근에도 그랬다. 즉 어떤 환경과 상황이 나의 영을 상하게 하였다. 영이 상하여 잠시 낙담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오늘 말씀을 읽으며 깨닫게 되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탄이 나의 생각과 귀에 뒤틀린 혀의 말들을 뿌린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받은 것이다. 즉 대적이 뿌린 참소의 혀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의한 것이다. 나의 영이 상함을 입었다면 이것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입이 비뚤어지고 왜곡된 말들의 통로가 되어 이웃에게 나갈 때도 있다. 이 시간 나도 모르는 사이 사탄의 참소하는 말에 동의한 것을 회개한다. 그리고 나의 입이 대적의 통로로 사용되어진 것들을 회개한다. 그리고 더욱 깨어 생각과 마음을 여호와 앞에서 성결할 것을 다시 선포하며 기도한다. 아멘.

  • 거만 뒤 따라오는 수치, 겸손이 부르는 지혜 – 잠언 11:2

    잠언 11:2 말씀과 나의 경험을 통해 거만과 수치, 겸손과 지혜를 깨닫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묵상. 본문 전체의 중심 말씀으로, 묵상과 경험의 배경을 안내한다.

    잠언 11:2 [직역성경] – “거만함이 들어올 때 수치가 들어오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지혜가 있다.”

    거만함과 수치

    잠언 11:2 [직역성경] 말씀처럼, 혈기를 부린 후 대부분 혼자 있고 싶었다. 집에서든 어디서든 화를 낸 뒤에는 씩씩거리며 담배 한 가치 물고 혼자 어딘가로 가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이게 바로 수치가 거만함을 따라오는 것이다.

    언쟁 후 성찰

    말씀처럼,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조근조근 입을 열었더라도 언쟁 후 숨고 싶다면 스스로 거만하다는 증거다. 누가 처음부터 지혜롭고 겸손하겠는가? 우리 모두 처음에는 거만했다. 나도 자녀, 아내, 아랫사람들에게 불완전한 권위자였다.

    겸손과 지혜의 길

    딸이 말했다. “아빠, 그때 나 14살이었어.” 나는 웃으며 갱년기 같다고 말했지만, 혈기 많은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그러하다. 입을 열고 난 후 수치심을 안다. 거만이 따른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지혜를 구한다. 잠언 11:2 [직역성경]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겸손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예수님을 신뢰하며 거만을 끊기 위해 오늘도 걸어간다. 아멘.


    원본

    나의 경험상, 혈기를 부린 후 대부분 혼자 있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는 말이다. 일을 하며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집에서든 어디서든 화를 낸 이후에는 대부분 씩씩거리며 담배 한가치 물고 혼자 어디론가 가더라. 이게 다 무엇인가. 바로 수치가 거만함을 따라 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꼭 큰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도, 잔잔히, 조근조근 입을 열었다 하여도 언쟁이 끝난 후에 혼자 어디론가 숨고 싶다면 이는 분명 본인이 거만하다는 증거임을 기억하자.

    그러나 어느 누가 처음부터 지혜롭겠는가. 누가 처음부터 성숙한 권위자이겠는가. 누가 처음부터 겸손하겠는가. 권위자의 상처가 나의 부모님만 해당되겠는가. 아니다. 학교, 상사, 영적 권위자 다 포함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처음에는 모두 거만하였다. 나도 자녀들에게, 아내에게, 그리고 나의 아랫사람들에게 똑같이 불의한 권위자이다. 그러니 할 말 있는가. 나의 딸이 “아빠 그때 나 이제 14살이었어” 라는 말을 잊을만 하면 한번씩 한다. 그 아이 14살때 나는 딸에게 어떤 아빠였는가. 불과 5년 전 나의 모습이다.

    딸이 내게 그러더라. 아빠 요즘 갱년기 같다고. 내가 웃었다. 갱년기는 홀몬의 변화 반응이지. 그 혈기 많고 소리 지르던 아빠의 요즘 모습이 딱 갱년기 증상이라는 것이다. 내가 아직 육십도 안 되었는대 무슨 갱년기인가. 그런데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 혈기 충만한 80세 여성도 나는 보았다. 우렁찬 목청으로 엄청 지르더라. 갱년기를 격는다고 혈기가 빠지나.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입이 열린 후의 수치심을 이제 나는 안다. 내가 거만하여 그것이 따라온것도 안다. 그 느낌이 싫다. 그래서 지혜를 더욱 구하는 것이다. 겸손하려고, 겸손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려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자 되어 거만, 곧 선악나무의 열매들을 끊기 위하여 지금도 걸어가는 것이다. 아멘. 예수님 도와주세요.

  • 오만한 자와 지혜로운 자, 회개와 지혜의 길- 잠언 14장

    잠언 14장을 통해 오만한 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를 묵상합니다. 회개와 예배, 주님 앞에 머무는 삶 속에서 참된 지혜를 얻는 길을 나눕니다.

    잠언 14
    6 오만한 자는 지혜를 찾으나 없고, 깨달은 자는 지식 얻기가 쉽다. 7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 떠나라. 네가 지식의 입술들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직역성경)

    오만한 자는 이미 창조주를 거역하였다. 그분의 모든 지혜와 사랑을 거절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떤 지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오만한 자는 쉽게 욱 하고 분을 낸다. 심판자를 대신하여 자기 눈의 들보로 판단하고 정죄하기 때문이다.

    지혜를 찾으려면, 조언을 들으려면 먼저 창조주를 대적하였던 것과 그분의 사랑을 버린 것부터 회개하여 자신의 뜻과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 그다음 지혜로부터 주어지는 훈계와 책망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쉽지 않다. 아프고 쓰리다. 그러나 그렇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어제 못했어도 괜찮다. 회개하고 오늘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악한 영이 뿌린 생각에 잡힌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그것에 잡혀 순간 욱 하며 열렸던 입을 다시 회개하는 것이다.

    매주 한 번씩 예배를 섬기는 것이 나의 일주일을 그분 앞에 서게 만든다. 지난 50일 특별 기도 때는 매주마다 3일씩 연속으로 예배를 섬겼다. 딴짓할 정신이 없었다. 오로지 주님 앞에여야만 그것을 감당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라. 그때 참 행복하지 않았나.

    오늘 행복하고 싶다면 다른 것 없다. 그냥 주님 앞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주님 집에서의 문지기 하루가 이 땅에서의 천년보다 좋은 것이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을 옆에 두고는 지식의 입술들을 배울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어리석은 자라면 어쩌겠는가. 성령 안에서 자아를, 육체를 쳐서 영에 복종하도록,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십자가 사형틀에 매달아 버리는 것이다. 토설하고, 회개하고, 방언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며 영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육체의 정욕에 끌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혼이 영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의 전에서 문지기라도 좋사오니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다.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지혜의 입술에 날마다 귀 기울이는 것이다. 사랑합니다. 예수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