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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행복하다: 잠언 16장 20절 – 믿음과 분별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하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하지 않는다. 악을 분별하고 주님께 신뢰를 두는 자가 참된 행복을 누린다. 오늘도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삶을 선택하라.

    말씀:
    “어떤 일을 분별하는 자는 복을 발견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행복하다.”
    잠언 16:20 (직역성경)

    누구를 의지한다는 것은 전적인 신뢰를 뜻한다. 막내를 어린 형제에게 맡기고 외출할 수 있을까. 마음이 불안할 것이다. 그러나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맡긴다면 근심이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이와 같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마음의 평강을 얻는다.

    예전에 아이들을 믿음의 사람에게 맡겼을 때 마음에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것이 내가 예수님께 내 자녀를 올려드릴 수 있는 이유다. 많은 사람이 걱정할 때에도 나는 주님께 맡기고 기도한다. 그분이 기다려주셨듯, 우리도 기다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나를 처음 부르신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를 잃지 않으셨다. 그분이 내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내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는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근심이 사라진다.

    어린아이는 집의 형편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부모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하나님을 믿기에 오늘도 행복하게 하루를 보낸다. 내일도, 어떤 상황이 와도 예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릴 것이다.

    오늘의 적용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은 현실의 불안보다 크다. 오늘 하루, 근심 대신 신뢰를 선택하라. 주님께 맡길 때 마음의 평강이 임한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모든 상황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일을 분별하는가. 악을 분별하여 떠나는 자가 복을 얻는다. 사탄의 왜곡된 말들을 분별하여 거절하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한다. 그것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이다. 아멘.


    원 본

    누구를 의지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를 들어 내가 막내를 9살 셋째에게 맡기고 외출할 수 있을까. 어린아이들을 위의 사춘기 형, 누나에게 맡기고 영화 한 편 볼 수 있을까. 불가능하거나 마음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할 것이다.

    전에 딱 한 번 어느 분께서 나의 아이들을 며칠 맡아주신 적이 있었다. 아무 걱정도, 어떤 근심도 없었다. 내가 큰아이와 둘째 아이를 예수님께 올려드리고 룰루랄라 하는 이유다.

    큰 아이를 염려하는 소리들이 있다. 그 아이를 위해 중보해 주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왜 염려해야 하나. 미혹에 가린 거 맞다. 그래서 저러고 있는 거 맞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또 다른 무엇을 푸시해야 하나. 부담을 줘야 하나. 그 아이, 참 많이 아프다. 누구나 겪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는 가장 아픈 것이다.

    내가 그 아이만 할 때, 내 아빠를 칼로 찌르려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은 그저 “기범아,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가 다였다. 예수님께서 나 같은 자도 기다려주셨으니 그 아이 역시 기다려주실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이 수십 년 뒤로 더 밀린다 해도 말이다. 나는 그저 주님께 맡기고 기도할 뿐이다. 나도 사명이 있고 그 아이도 사명이 있다면 때가 이를 때까지 기다려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실 그때부터 주님은 나를 조금이라도 잃어버릴 만한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내게 무엇을 하시던, 그것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얻고 또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는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특히 오늘날의 세상에서 물질적인 부분까지도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한다면 어떤 근심도 걱정도 없는 것이 정상인 거다. 어린아이는 자기 집의 재정 형편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아기들은 돈 없이도 하루를 아주 행복하게 보낸다. 그러면 나도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보냈는가. 그랬다.

    나는 내일도 행복하게 지낼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떤 희한한 상황이 주변을 우겨싸도 예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릴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선포이다. 무화과나무 잎이 어쩌고저쩨도 난 그저 예수님만으로 즐거워한다.

    어떤 일을 분별하는가. 악을 분별하여 악에서 떠나는 자가 복을 발견한다. 사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왜곡되고 뒤틀린 말들을 온전히 분별하여 쳐내고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하겠다. 아멘.

  • 지혜의 꿀과 음녀의 꿀, 분별하기 – 잠언 5장

    잠언 5:1-4을 통해 ‘지혜의 꿀’과 ‘음녀의 꿀’을 분별하는 길을 묵상합니다.
    겉보기에는 비슷하지만 열매가 다릅니다. 지혜에 경청하고 명철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이 오늘 나를 인도하심을 느낍니다.

    잠언 5:1-4 (직역)
    내 아들아, 내 지혜에 경청하고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판단력을 유지하고 네 입술의 지식을 지켜라.
    참으로 부도덕한 여자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녀의 혀는 기름보다 매끄러우나 그녀의 마지막은 쑥처럼 쓰고 양날 선 칼처럼 날카롭다.

    지혜의 꿀과 음녀의 꿀

    잠언 5장은 지혜와 음녀의 입술을 대조하며, 겉보기에는 꿀처럼 달지만 결국 쑥처럼 쓰디쓴 결과를 경고합니다.
    오늘 말씀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지혜에 경청하고 명철에 귀 기울이는 삶을 요구합니다.

    지혜의 꿀과 음녀의 꿀은 처음엔 구분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 지혜: 생명을 낳습니다.
    • 음녀: 멸망을 낳습니다.

    분별하는 삶과 명철

    나는 매일 잠언을 묵상하며 그날의 ‘네비게이션’을 받습니다.
    아직 가지 않은 길의 지도, 예수님께서 오늘 나를 이끌어 가실 방향입니다.
    때로는 음녀의 속임을 분별하지 못하고 아픔으로 배우기도 하지만,
    현실 속에서 분별력과 명철을 몸소 익혀 갑니다.

    오늘의 네비게이션: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은 병자를 위해 오십니다.
    상처받은 자, 저주 속에서 몸부림치는 자,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은 자에게 오십니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셔야만 하는 자리입니다.

    오늘도 나는 그분의 말씀을 네비게이션 삼아 나아갑니다.
    “예수님, 당신이 곧 말씀이시죠. 이제 어떻게 하실래요?”


    원본 묵상 글

    무엇으로 음녀의 속임을 간파하는가. 지혜가 내 혀에 꿀과 같은데, 음녀의 입술도 꿀을 떨어뜨린다. 다른 것이 있다면 열매이다. 열매가 다르다. 그러나 그 처음은 너무도 비슷하여 무엇이 음녀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지혜처럼, 내 혀의 꿀처럼 위장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서는 경청하라고 한다. 지혜에 경청하라. 명철에 귀를 기울이라. 이는 단순히 말씀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적으로 깨달으라는 말은 더욱 아니다. 나는 매일 아침 지식으로 공부한 잠언을 묵상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하나도 기록하지 않는다. 매일의 잠언을 읽으면서 내게 다가오는 것들을 붙잡는다. 붙잡고 그 시에 받은 감동들을 적어 나간다. 내가 살아낸 말씀들을 적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한다고 감동으로 받은 것 같은 묵상들을 적는 것이다.

    마치 오늘 가야 할 길의 내비게이션 같은 것이다. 오늘의 출발선이다. 아직 가지 않았다. 그 안내대로 가야 할 매일의 숙재가 있는 것이다. 내가 지혜를 경청하고 명철에 귀를 기울이는 나만의 방법이다. 그럼에도 어떤 것은, 어떤 응답은 음녀에게서 온 것임에도 분별하지 못하고 받는 경우가 있는 것 같더라. 그런 것들은 꼭 쓰고 아프다.

    나는 환상 속에서 살지 않는다. 현실을 산다. 양자얽힘이 작용하는 현실에서 산다. 지금의 기범이가 과거의 기범이를 예수님께 안내하듯이, 먼 훗날 예수님 옆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는 기범이가 동일하게 지금의 나를 예수님께서 이끌고 있다. 마치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먼 바울의 환상 속에 펼쳐졌던 미래의 바울이 지금의 자신을 아나니아에게로 이끌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이처럼 나는 현실을 살면서 분별하는 법을 몸소 배우는 것이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려면 먼저 상처를 심하게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저주를 누가 끊는가. 먼저 저주 가운데 파묻혀야 할것 아닌가. 어둠을 뚫고 나오려면 먼저 어둠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적이 속여 빼앗아간 많은 것들을 예수님께서 다 되찾게 해주신다고 전에 내게 말씀하셨다. 그러려면 먼저 수도 없이 속아 빼앗겨야 하지 않겠는가. 죽은 자가 부활하는 것이다. 문둥병에 걸려야 고침을 받지. 아파야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겠는가. 의사는 병자를 위해 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나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내게 오셔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죄인이고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약하고 여전히 혼자서는 아무것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이끌어 가시려고 매일 주시는 네비게이션들, 수도 없이 쌓여 있다. 예수님, 당신께서 곧 말씀이시죠. 이제 어떻게 하실래요? 미래의 기범아, 지금 나를 응원하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