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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언28장: 숨긴 죄는 형통을 막고, 자백은 자비를 부른다

    잠언 28장 13절은 우리에게 죄를 숨기면 형통하지 못하지만,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자비를 얻는다고 말한다. 속사람 치유의 과정에서 우리는 과거의 죄뿐 아니라 지금의 죄까지 고백하며 진정한 회복을 경험한다.

    “자기 범죄들을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자비를 얻을 것이다.” (잠언 28:13, 직역성경)

    하나님께서는 숨김없는 자를 기뻐하신다. 속사람의 치유는 단순한 감정 회복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죄를 직면하고 자백하는 과정이다. 과거의 잘못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관계 속의 죄까지 함께 고백할 때 진정한 회복이 일어난다.

    자녀를 향한 부족함을 깨닫고 미안함을 표현하는 일, 오래된 상처를 남긴 이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일은 믿음의 실천이다. 용서는 나의 몫이지만, 회개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신다.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도, 가족에게도 숨김없이 진심으로 사과할 때 그곳에 은혜가 임한다. 숨긴 죄는 형통을 막지만, 고백은 하나님의 자비를 여는 열쇠다. “예수님, 내 속의 악한 것들이 다 드러나게 하소서.” 기도합니다.


    묵상 원본

    속사람 치유를 받을 때마다 숨겨진 자신의 범죄함을 깨닫고 회개하며 돌이키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자녀들이 자라가면서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몫이다. 그러나 작은 자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속사람 치유를 받을 때 과거의 잘못만 회개하는가? 나는 그렇게 않되더라. 그 사건으로 인해 지금 나의 자녀들에게 내가 그렇게 악하게 하였음을 함께 깨닫고, 지금 나의 죄를 동시에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누구에게든 범죄함이 드러났으면 반드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은 당연하다. 더하여 이웃을 찾아가 미안하다고, 용서의 한마디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속사람 치유도 받고, 국민학생 때 욕하고 떠나간 선생님도 찾아가 죄송하다고 말하고 하는 것이다.

    나도 소문난 장난꾸러기였다. 사촌 누나 얼굴에 불침 한 방 놓고 고모한테 마빡 맞은 적도 있고 그러지 않았나. 나중에 미안하다고 다 고백했다. 내 동생은 오빠가 자기 발가락에 불침 놨다고 아직도 말하고 다닌다. “너 자다가 새끼발가락에 불침 맞아봤어?” 인상 깊었나 보다.

    아이들에게도, 아내한테도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지. 입 다물겠는가? 나의 권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입 다물겠는가? 권위자는 무조건 선인가? 아니다. 그러니 자기 범죄를 숨기지 못한다. 할 수 있는 한 나의 범죄함을 다 고백하겠다. 그러니 예수님, 더욱 내 속의 악한 것들이 다 드러나게 해주세요. 아멘.

  • 잠언 21:2 묵상 – 여호와께서 마음을 달아보신다

    잠언 21:2 말씀 묵상. 사람은 자기 길이 옳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진심과 동기를 보신다. 삶의 서투름 속에서도 하나님은 교훈과 회개의 길로 인도하시며, 중심을 중요시하시는 주님의 시선을 묵상한다. 오늘의 삶에서 존중과 사랑을 실천하며 마음을 점검하는 도전과 울림을 제공한다.

    “각 사람의 모든 길이 자기 눈에는 바른 듯하나 여호와께서 마음들을 달아보신다.” (잠언 21:2, 직역성경)

    마음 중심을 보는 하나님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믿지만 하나님은 겉보다 마음을 보신다. 인간은 미숙하고 불완전하며, 권위자조차 완전하지 않다. 하나님은 결과보다 마음의 방향을 달아보신다. 마치 어린아이가 넘어지면서도 손길과 사랑을 배우듯,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선한 마음을 보신다.

    삶에서 배우는 교훈

    나의 인생도 그렇다. 대인관계에 서툴고 표현이 부족했지만 마음까지 거짓된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고 싶었으나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런 나의 중심을 아신다. 아이들이 나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배움을 주고,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는 순간, 나는 겸손과 존중을 새롭게 배운다. 이러한 경험은 독자들에게도 삶의 교훈과 공감을 남길 것이다.

    연약함 속에서도 회복을 원하시는 하나님

    중독이나 습관 같은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정죄보다 회복을 원하신다. 선한 마음을 가진 자는 넘어져도 괴로워하며 다시 일어나려 한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달아보시고 고치시며 새롭게 하신다. 이는 마치 불완전한 도자기를 조심스럽게 빚어 완전하게 만드시는 장인처럼, 우리의 마음을 다루시는 섬세한 손길을 보여준다.

    가정을 통한 배움과 겸손

    가정 안에서도 배움이 있다. 아내를 통해, 자녀를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보고 교만을 버린다. 존중과 사랑을 배우며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곧아진다. 오늘도 나는 결심한다. 존중과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마음을 따라 살아가겠다고. 이 결단을 마음에 새기고 매일 실천하며, 독자도 자신의 삶에서 동일한 결단을 실천하도록 도전받기를 바란다. 이 결단이 반복될 때, 삶 속에 깊은 울림으로 남게 될 것이다.


    묵상 원본

    왜 여호와께서 마음들을 달아보실까. 사람은 미련하고 미숙하기 때문이다. 모든 권위자가 다 불의하기 때문이다. 나의 자녀들만 해도 나와 아내보다는 더 좋은 환경에서 조금 더 나은 권위자 아래에서 성장하지 않는가. 그러니 자녀들이 나보다 모든 면에서 탁월한 것이다. 나처럼 대인관계가 서투른 사람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그 부분에서는 아이들이 나의 선생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사람이 하는 어떤 일들의 결과물을 보시지 않는다. 그 마음들을 보시는 것이다. 나처럼 서투르고 모난 곳이 많은 사람은 정말 모르니 그게 최선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선생님들에게 많이 맞았고, 악명 높은 배문중고등학교에서는 왜 맞는지 이유도 모르고 맞았고, 시험 점수 떨어졌다고 맞았고, 숙제 놓고 와서 맞았고, 쳐다본다고 맞았고, 출석부로 얼굴도 맞고, 허구한 날 단체 기합에, 이래저래 맞았고, 주일에 교회 간다고 맞았고, 기계공으로, 그다음 군대, 거반 30살까지 남자들만 득실대는 세상에서 살면서 매 맞고, 수근거림당하고, 뭐 그랬다. 그때는 다 그리 살았다. 당연한 건 줄 여기고 살았다. 그러니 어찌 알겠는가.

    나도 존중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나의 마음이 여호와 앞에서 굽어졌는가. 악한 마음으로 그리 하였는가. 아닐 것이다. 인간관계하는 법을 모르니, 표현하는 법을 모르니,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하니,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했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닐 뿐이다. 그렇다고 나의 마음까지 거짓된 것은 아니다.

    몰라도 괜찮다. 배우면 된다. 잘못을 깨달으면 회개하면 된다. 그러나 마음의 근본 동기는 어떻게 하겠는가. 예를 들어 습관적인 중독이 있다고 하자. 마음이 선한 자는 그것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끌려간다. 좋아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안 되는 것 알면서도 끌려간다. 나도 아직 끊어야 할 그리 좋지 않은 습관들이 있다. 버럭하는 것, 조급한 것, 가끔 뉴스 보는 것 등.

    그러면 그들의 마음도 악한 것인가. 아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마음들을 달아보신다고 생각한다. 달아보시고 도와주시려고, 고쳐주시려고, 구원하시려고, 새롭게 하시려고, 알려주시려고, 새 힘 주시려고, 존중하고 섬기는 사람 되라고, 사랑을 배우게 하시려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시려고, 기쁘게 받고, 자기 짐을 나누어 지는 방법을 알게 하시려고, 붙들고 있는 우상을 놓을 수 있게 하시려고 등등…

    우리 집의 아내는 나의 도움이요, 큰아이들은 나의 선생들이고, 어린아이들은 나의 과거를 비추는 거울들이다. 아직도 나는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내가 전에는 알지도 못했고 깨닫지도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고 회개하면서 이제서야 하나하나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교만하겠는가.

    어제도 하나 배웠다. 아빠, 잘해주려고만 하지 말고 존중해주려고 해보세요. 그래서 그걸 해보려고 한다. 여호와께서 오늘 나의 마음 달아보시고 기뻐하신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아멘.

  • 잠언19 말씀묵상 – 조급함의 함정과 기다림의 축복

    잠언 19장은 조급함과 믿음 없는 서두름의 위험을 경고하고, 주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축복을 가르친다. (145자)

    잠언 19:2-3 (직역성경)
    “지식이 없는 사람도 좋지 않고, 발을 재촉하는 자는 죄짓는다. 사람의 우둔함이 자기 길을 치우치게 하고는 여호와께 그의 마음이 화를 낸다.”

    조급함의 위험 | 잠언19 말씀묵상

    잠언19의 말씀은 조급함의 위험을 경고한다. 조급함, 잠언19, 말씀묵상은 믿음의 결핍을 보여준다. 세상은 늘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재촉한다. 그러나 조급한 발걸음은 결국 함정으로 인도한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는다. 기도의 골방에서 기다릴 줄 안다.

    기다림의 믿음 | 믿음으로 응답을 기다리라

    잠언19의 교훈은 기다림 속에 믿음이 자란다는 것이다. 기도의 시간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응답을 기다릴 여유가 없기에 스스로 발을 재촉하고 사탄의 올무에 걸린다. 그러나 믿는 자는 다르다. 주님의 때를 신뢰하며, 과거의 인도하심을 기억한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길을 예비하신다.

    자녀양육과 인내 | 주님의 타이밍을 신뢰하라

    자녀에게도 조급함은 독이 된다. 부모의 과도한 푸시는 자녀를 망가뜨린다. 영적 문제는 인간의 말이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주님의 초자연적 사랑만이 개입하셔야 한다. 주님은 가장 좋은 타이밍을 재고 계신다. 그러므로 나는 재촉하지 않는다. 기다린다. 주님을 신뢰한다. 아멘.


    묵상 원본

    발을 재촉하는 자, 곧 조급하게 행하는 자이다. 어떤 상품을 팔거나 보험 등의 영업을 할 때,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 “마지막 혜택이 사라진다”와 같은 표현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유도하여 그 자리에서 계약하도록 만든다.

    조급하게 재촉하는 자가 혈기를 낸다. 조급한 자는 대체로 속도광이다. 상대방을 조정하는 무당의 영이 강할수록 조급하게 발을 재촉한다. 조급한 사람일수록 예수님 앞에서 기도의 시간을 내는 것을 어려워한다. “지금 일해서 돈 벌어야지. 더 열심히 일해야지.” 그렇지 않나.

    왜 조급하게 행동하는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기도해서 응답을 받을 여유가 없다. 그러니 자기 발을 재촉하여 사탄의 올무에 걸리는 것이다.

    나도 조급하다. 그러니 더욱 순종하여 골방에서 몇 시간이고 머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 많은 위기의 순간들에 주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보이지 않는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주님이 나의 앞길을 축복으로 바꾸시려고 어떻게 예비하셨는지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최소한 의식주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지금 조금 불편할 뿐이다. 자녀들도, 큰아이도 마찬가지다. 조급하게 푸시할수록 자녀들을 망가뜨릴 뿐이다.

    큰아이는 나하고 소울 타이가 되어 있다. 내가 아빠를 용서하지 못했던 모습 그대로 큰아이는 자기 아빠의 권위자를 향하는 것뿐이다. 그 아이는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이가 정말 용서해야 할 대상은 나, 즉 그 아이의 아빠이다.

    사람의 힘으로, 어떤 말로도 해결할 수 없다. 주께서 직접 개입하셔야 할 문제이다. 주님의 초자연적인 사랑이 개입하셔야 한다. 주님은 가장 좋은 타이밍을 재고 계신다. 나는 주님을 기다릴 것이다. 재촉하여 망치지 않을 것이다. 아멘.

  • 포도주와 독주, 그리고 용서 – 잠언 20장

    잠언 20장 말씀을 통해 포도주와 독주가 사람을 속이는 것처럼, 우리의 분노와 조롱이 삶을 가리운다는 깨달음을 나눕니다. 건망증과 실수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닮아가는 삶, 용서와 사랑의 변화를 묵상합니다.

    잠언 20
    1 포도주는 조롱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날뛰게 하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그것들에 의해 속는 자는 지혜롭지 아니하니라. (흠정역).

    나는 오늘 누구를 조롱하였는가, 분하여 날뛰었는가. 밤에, 졸릴 때 짜증 부리는 어떤 아이를 조롱하였나. 그렇진 않았다. 최근에 교회 가는 길에 아내가 무엇을 집에 놓고 왔다. 예전의 나였으면 어떠했겠나. 길길이 날뛰었겠지.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한마디 하려는데 자동으로 입이 닫혔다. 속에선 부글부글 끌었지. 그리고 잠시 후에 사랑스러운 얼굴로 “여보 최고, 엄지 척, 여보가 제일 이뻐”가 나왔다. 나 많이 변했다.

    포도주와 독주는 속인다. 자신을 못 보게 한다. 자기 눈의 들보를 가린다. 차 키를 깜박하여 자동차 옆에서 온 가족 기다리게 한 적이 한두 번이었나. 우산통에 열쇠 던져 넣고 한 시간 반을 씩씩거리며 찾아 헤맨 적도 있었다. 나로 말하면 건망증 대환자이다. 깜박 깜박! 그러나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아빠 하나님은 감사하지 않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자비하시다. 그러니 너희도 아빠를 닮아 긍휼을 베풀라. 판단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라, 아낌없이 주라고 하시는 것이다. 내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말은 곧 이웃을 판단 정죄 안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악나무의 열매, 포도주와 독주를 입에도 대지 않는 자가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먼저는 자신을 위한 것이요 둘째는 선악나무의 열매를 초월하여 예수님처럼 아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 잠언 29장 11절: 화를 다스리고 영을 가라앉히는 지혜

    잠언 29:11을 통해 화를 내는 순간과 지혜로운 마음의 차이를 배우고, 속사람의 회복과 영적 성장을 경험하는 방법을 알아봅니다.

    잠언 29
    1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모든 영을 나오게 하나, 지혜로운 자는 뒤로 가라앉힌다. (직역성경).

    화가 납니까? 네, 화가 납니다. 왜 화가 납니까? 이래저래서 화가 납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가, 화를 내고 있는가. 씩씩거렸는가, 콧김이 나오나. 당신은 또 졌다. 뭐, 내 얘기인 것이다. 나는 가끔씩 진다. 그래도 얼른 회개한다. 그러나 비슷한 영역에서 자꾸 지다 보면 맷집이 쌓인다. 이거 은근히 중요하다. 맷집 없으면 한 방에 나가떨어지거든. 그런데 맷집 있으면 버틸 수는 있다. 속은 뒤집어져도 입이 전처럼 안 열리거든. 일단 버티기라도 해야 나중에 돌파를 하든 할 것 아닌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면 이길 재간이 없다. 내 모든 영을 확 다 쏟아붓고는 뻗어버린다. 그러나 스무 대를 버틸 수 있으면, 그 사이에 한 방을 노릴 틈이 보이는 것이다.

    맞고 있는 줄도 모르면 어렵겠지만, 그것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어디에서 어떻게 뚫리는지도 관찰하고 있다면 대적이 공격하는 패턴도 곧 읽히게 된다. 그 틈을 타서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나의 영을 나오게 하는 영역이 있다. 왜 그 부분에서 나의 모든 영을 나오게 하는지 관찰하고 또 관찰한다. 요즘은 모두는 아니다, 아주 일부분의 영만 나오게 한다. 묻고 또 묻다 보면, 동시에 회개하고, 또 넘어지면 또 회개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주께서 치유해 주시는 영역이 있다. 그럼 내가 승리한 것이다. 일단은. 이제는 뇌와 신경을 타고 반사적으로 흐르는 회로를 다시 그려야 한다. 뒤로 가라앉히는 회로를 신경줄기에 새겨야지.

    특별히 주일예배는 나의 속사람이 치유받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난 주일에는 주님께서 나의 발을 씻겨 주셨다. “기범아, 너도 해야지” 하시면서 말이다. 미치는 줄 알았다. 그만 씻기시라고요. 완전히 내게 입 틀막을 하신 것이다. 오늘은 손가락으로 나의 이마를 톡톡 치시는 것 같았다. 행복했다. 주님은 나를 온유한 자로 만들어 가신다. 아멘

  • 부지런함과 탐욕, 하나님 신뢰의 삶 – 잠언 21장

    잠언 21장을 통해 입과 혀를 지키고, 탐욕을 제거하며 하나님 신뢰를 쌓는 방법을 배워보세요. 자녀와 가정을 위한 진정한 부지런함과 감사의 삶을 탐구합니다.

    잠언 21
    23 그의 입과 그의 혀를 지키는 자는 그의 목숨을 환난에서 지킨다. 25 게으른 자의 탐욕은 자신을 죽이니, 이는 그의 손이 일하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26 온종일 그는 탐욕을 내나, 의인은 아낌없이 준다. (직역성경).

    가만히 앉아서 어떤 대가 지불도 없이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것도 탐욕이다. 누구는 직장에서, 누구는 기도로, 금식으로 나아가는 이때에, 성경은 부지런히 빵으로 배부르게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모든 것에 감사하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입과 혀를 지키는 것 역시 자기 힘으로 되지 않는다.

    무엇이 부지런함인가. 그저 가정을 먹여 살리기 위해, 조금 더 풍요롭게 살고 싶어서 열심히 일을 하여 돈을 만드는 것이 부지런함인가. 죽어라 기도하여 필요한 재물을 손에 넣는 것이 부지런함인가. 만약, 하나님이 내게 아버지의 사랑을 가르치시려는데 저 자녀를 바꿔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내게 재정 훈련을 시키시려는데 필요한 재정을 달라고 하고 있다면, 초점이 안 맞는 것 같다. 그럴 때는 자녀들 있는 모습 그대로 끌어안고 범죄를 간과하여 입을 닫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럴 때에는 주님께 올려드리고, 손을 떼고 죽이든지 살리든지, 길거리에 내앉히든지 알아서 하시라는 마음으로 그냥 무릎으로 주님 앞에서 감사함으로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죽을 것 같아도, 미칠 것 같아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모든 부담감도 다 내려놓고 가족들 앞에서 떳떳해야 한다.

    하나님이 내게 하시려는 것은 내 속에 깊이 박혀 있는 탐욕을 제거하시려는 것이다. 기근 때에 까마귀를 경험하고, 이리저리 공급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주를 향한 신뢰를 견고히 만들어가는 과정들이다. 자녀의 사랑, 신부의 사랑을 넘어 아빠의 사랑을 배워가는 과정들이다. 길거리에 나앉을 것 같은 상황에서 주님이 도우시지 않는가. 자녀를 굶긴 적 단 한 번도 없지 않는가. 그럼 된 것이다. 심지어 길거리의 노숙자도 불러내어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사용하시지 않는가. 그들은 미친놈 소리를 들으면서도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예수님을 전하고 있지 않는가. 누구든지 이런저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지 않는가.

    그럼 오늘 내게는 어떠한 기회들이 찾아올까. 바로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나의 시간을, 돈을, 물과 음식을, 그 밖에 많은 것들을 예수님을 위해 내어놓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할 수 있는 무엇을…

  • 오만한 자와 지혜로운 자, 회개와 지혜의 길- 잠언 14장

    잠언 14장을 통해 오만한 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를 묵상합니다. 회개와 예배, 주님 앞에 머무는 삶 속에서 참된 지혜를 얻는 길을 나눕니다.

    잠언 14
    6 오만한 자는 지혜를 찾으나 없고, 깨달은 자는 지식 얻기가 쉽다. 7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 떠나라. 네가 지식의 입술들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직역성경)

    오만한 자는 이미 창조주를 거역하였다. 그분의 모든 지혜와 사랑을 거절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떤 지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오만한 자는 쉽게 욱 하고 분을 낸다. 심판자를 대신하여 자기 눈의 들보로 판단하고 정죄하기 때문이다.

    지혜를 찾으려면, 조언을 들으려면 먼저 창조주를 대적하였던 것과 그분의 사랑을 버린 것부터 회개하여 자신의 뜻과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 그다음 지혜로부터 주어지는 훈계와 책망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쉽지 않다. 아프고 쓰리다. 그러나 그렇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어제 못했어도 괜찮다. 회개하고 오늘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악한 영이 뿌린 생각에 잡힌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그것에 잡혀 순간 욱 하며 열렸던 입을 다시 회개하는 것이다.

    매주 한 번씩 예배를 섬기는 것이 나의 일주일을 그분 앞에 서게 만든다. 지난 50일 특별 기도 때는 매주마다 3일씩 연속으로 예배를 섬겼다. 딴짓할 정신이 없었다. 오로지 주님 앞에여야만 그것을 감당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라. 그때 참 행복하지 않았나.

    오늘 행복하고 싶다면 다른 것 없다. 그냥 주님 앞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주님 집에서의 문지기 하루가 이 땅에서의 천년보다 좋은 것이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을 옆에 두고는 지식의 입술들을 배울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어리석은 자라면 어쩌겠는가. 성령 안에서 자아를, 육체를 쳐서 영에 복종하도록,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십자가 사형틀에 매달아 버리는 것이다. 토설하고, 회개하고, 방언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며 영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육체의 정욕에 끌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혼이 영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의 전에서 문지기라도 좋사오니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다.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지혜의 입술에 날마다 귀 기울이는 것이다. 사랑합니다. 예수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