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12장을 읽으며 거역과 완고함의 문제를 살피고, 자아의 우상 앞에서 점치는 죄를 돌아보고, 성령 안에서 치유받는 길을 묵상한다. (직역성경 포함)
잠언 12:1 [흠정역]
“훈계를 사랑하는 자는 지식을 사랑하나 책망을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자아의 우상과 거역의 뿌리
오만한 자는 책망 받기를 싫어하고, 주님의 명령과 가르침을 밀어낸다. 나도 그런 경우가 많다. 이유는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의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거역을 주술과 같다고, 완고함을 우상숭배와 같다고 말한다. 나도 스스로 자아라는 우상을 섬기며 그 앞에서 점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악한가. 속히 돌이켜야 한다.
주님께서는 어느 정도 이해해주실 것이다. 5살 아이에게 청년의 것을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언제까지 용납되겠는가. 글쎄다.
세대의 상처와 치유의 길
“사악한 자들의 말들은 숨어 기다리다가 피를 흘리기 위한 것들이지만, 올바른 자들의 입은 그들을 구출하리라.” 저들은 실수하거나 내 뜻대로 안 따라주면 책잡아 비난하려 한다. 나도 자녀를 대할 때 그런 모습이 있었다.
조상에게 받은 상처가 ‘소울 타이’로 흘러 자녀에게 전해진다. ‘소울 타이’는 영적·정서적 유대가 끊어지지 않아 세대 간 영향을 주는 상태를 말한다. 이 고리를 끊는 유일한 길은 조건 없는 사랑과 긍휼의 회복이다. 여호와께서 나아만 장군을 치유하셨듯, 나도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듯 치유받기를 구할 뿐이다.
성령 안에서의 죽음과 적용
문둥병이 무엇인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영적으로 감각이 둔하면 나도 문둥병에 걸린 것이다. 죄의 대가다. 나는 지금 어떤 완고함에 머물러 있는가. 오직 성령께 완전히 잠겨 죽는 길만이 해답이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자.
“거역하는 것은 마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숭배와 같으니이다.” (삼상 15:23, 흠정역)
원본 교정본
오만한 자는 책망받기를 싫어하여 주님의 명령과 가르침들을 밀어낸다. 나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다. 주된 이유는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의 반응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 말하는가. 거역은 주술과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숭배라 말한다. 그렇다면 나도 스스로 자아라는 우상을 섬기며 그 앞에서 점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악한 죄인가. 속히 돌이켜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주님께서는 어느 정도 이해해주실 것이다. 5살 아이에게 청년의 것을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언제까지 용납되겠는가. 글쎄다.
오늘의 잠언을 주욱 읽으면서 완고하여 거역하는 자들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내게 크게 닿는 말씀이 있었다.
“6 사악한 자들의 말들은 숨어 기다리다가 피를 흘리기 위한 것들이지만 올바른 자들의 입은 그들을 구출하리라.”
저놈이 잘하나 못하나 보는 것이다. 실수하거나 나의 뜻대로 안 따라주면 책잡아 비난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긍휼을 베풀어준 만큼 너도 이 정도는 해야지, 이런 것이다. 참 잔인하지 않은가.
어쩌면 자녀들을 향한 나의 모습이다. 내가 조상에게 받았고 ‘소울 타이’가 되어 자녀들에게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조상들보다 얼마나 더 잔인한 사람인가.
나는 언제나 조건 없는 사랑, 무조건적인 긍휼을 베풀어줄 수 있을까. 속사람의 치유, 곧 트라우마의 치유이다. 여호와께서 나아만 장군도 치료해 주셨다면 내게도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글 수 있는 축복을 달라고 구할 뿐이다.
문둥병이 무언가. 고통을 못 느끼면, 영적으로 감각이 둔하면 나도 문둥병 걸린 것이다. 죄의 대가이다. 그러니 무엇을 구할까. 성령께 완전히 잠겨 죽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있을까.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실 때 성령께서는 문 밖에서 기다리셨을까. 나는 지금 이대로 요단강에 몸을 담글 수 없는 것일까. 성령의 강에 문둥이 몸을 담그는 것과 성령께서 내게 임재하시는 것은 다른 것인가. 내 육체도 죄인의 집인데 내게는… 괴롭다.
“거역하는 것은 마술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 숭배와 같으니이다.” (삼상 15:23, 흠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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