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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웃을 대하는 태도와 명철한 자의 삶 – 잠언 11장

    잠언 11장 12-14절 말씀을 통해 이웃을 멸시하거나 험담하는 삶이 아닌, 명철하고 신실한 삶의 길을 묵상합니다. 성경 66권을 자문관 삼아 살아가는 지혜와 자녀 교육의 교훈까지 함께 나눕니다.

    잠언 11
    12-14 그의 이웃을 멸시하는 자는 생각이 부족한 자나 명철한 사람은 가만히 있다. 험담하고 다니는 자는 비밀을 드러내나 영이 신실한 자는 일을 숨긴다. 전략이 없으면 백성이 쓰러지니 승리는 많은 자문관으로 인해 생긴다. (직역성경).

    이웃을 멸시하는 자, 험담하고 다니는 자, 자녀들에게 함부로 말하고 다니는 일반적인 혈기 많은 부모의 모습이다. 직장 상사나 동료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군대에서도 그런 사람을 만난다. 나는 이런 부류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나도 어느 때에는 이웃을 멸시하고 험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략을 받아 명철하여 영이 신실한 자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다. 이웃의 험담거리를 숨기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럼 전략이 오는 많은 자문관들은 누구인가. 멀리 볼 것 없다. 바로 성경이다. 성경 66권, 모세로부터 사도 요한의 글들까지, 이 모든 저자들이 곧 나의 자문관들이다.

    무개념, 노개념의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하나하나 가르치는 생활 규범들, 성도로서 살아가는 방법과 이유들, 왜 서로 사랑하는지 등등의 수많은 가르침들이 아이들 뒤를 따라가나, 나는, “우와, 이런 것도 가르쳐야 돼? 우와, 이것도 알려줘야 하는 거야? 우와, 당연한 것 아니야?” 하고 있다.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아이들에게는 전혀 생소하며 왜 그러면 안 되는지 이해를 못 하는 경우도 참 많지 않은가. 아이들과 다니다 보면 정말이지 당혹스러운 노개념에 아연실색하며 실소를 머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런 것들을 인식이나 하며 세상을 사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몸이 그냥 알아서 반응하는 것이다. 마치 운전할 때처럼 그렇게 가는 것이다. 운전할 때 별의별 희한한 사건들을 다 만나지 않는가. 정말 골 때리는 현장이다.

    그러니 그때그때, 날마다, 오늘 내게 필요한 자문관들을 찾아 그들의 글을 읽고 기도하며 그대로 행하려고 날마다 연습하는 것이다. 한 권 한 권씩 정독하며 저자의 신앙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 열정, 순종하는 모습들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운전 연습할 때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인 하루하루가 나의 삶을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오늘로 만들어간다. 생각이 부족한 내가 명철한 사람이 되어가며 이웃의 비밀을 드러내던 입이 점차 다물어지는 것이다. 나의 입이 멸시하며 험담하는 말들을 잊을 때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멘.

  • 지혜와 예배로 하루를 채우는 삶 – 잠언 8장

    잠언 8장을 통해 주님의 지혜와 예배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삶의 무게 속에서 회개와 순종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법을 배워 보세요.

    잠언 8
    내 입의 모든 말은 의롭고 그것들 안에는 비뚤어짐이나 굽어짐이 없으니 깨달은 자에게는 그것들 모두가 정직하며 지식을 발견한 자들에게는 바르다. 은 말고 내 훈계를 취하고, 정제된 금보다 지식을 취하여라. (직역성경).

    주님의 지혜는 그것을 깨달은 자에게만 꿀 같고 진주 같은 것이다. 그분의 지혜를 듣는 자는 먼저 그분의 훈계를 듣고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속도가 빠르다. 오늘 아침, 또 다른 삶의 무게가 나를 누르려고 한다. 이때 나는 무엇을 하겠는가. 그 무게의 감정을 내가 받아들이려 하는 자신을 보면 회개하고, 동시에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니 주님 손에 던져버린다. 나의 감정을 주님께 다 쏟아 드린다.

    예배는 매주 몇 번 교회 가서 드리는 것이 다가 아니다. 매일, 시간마다, 순간순간 주님을 경험하며 양처럼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양들이라면 모두가 다 그렇게 할 것이다. 세상의 어떤 은금보다도 지금 이 시간에 주님을 만나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 가장 귀하다. 이처럼 나의 하루를 온전히 예배로 채우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나의 친밀한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땅, 즉 내 안에 이루어지도록, 그래서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모든 시험에서 주님이 지켜주시도록, 그분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잘 따라가는 것이다. 오늘 일용할 양식은 내 알 바 아니다. 그것은 목자가 주시는 것이다. 나는 그저 오늘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그것 한 가지를 붙들고 순종하면 그만이다. 입을 닫는 것이다. 교만하여 패역한 입(이것을 지혜가 미워한다)을 닫는 것이다. 내 입이 언어를 잃어버릴 때까지 입을 닫는 것이다. 모세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다.

    외국에 사는 나의 가족을 보니 한국말도 어눌하고, 그렇다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뭐 참 애매하다. 전에 보니 우리 교회 태필린도 잘 못 따라 읽더라. 나의 입도 그렇게 닫혀질 수 있을까. 혀가 어눌하여 패역한 말 자체가 잘 안 나올 때까지 입을 닫을 수 있을까.

  • 잠언 26장 묵상: 교만과 어리석음, 그리고 말씀 앞에서의 깨달음

    잠언 26장은 교만과 어리석음의 위험을 경고하며,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자의 끝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 묵상을 통해 교만의 견고한 진을 허물고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길을 함께 생각해 봅니다.

    잠언 26
    12 너는 자기 눈에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을 보았느냐? 그보다는 어리석은 자에게 희망이 있다. 16 게으른 자는 판단력 있는 충고자 일곱 명보다 자신을 더 지혜롭게 여긴다. (직역성경).

    잠언 26장은 온갖 악의 모음집처럼 읽혀진다. 소식과 잠언을 어리석은 자에게 두는 것 자체가 죄악일 수 있다. 그는 우둔하여 온갖 죄악을 짓고 다니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많은 악이 어리석은 자의 입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럼에도 이 모든 악을 무색하게 하는 단 하나의 성경 말씀이 있다면 12절이 아닐까 한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 즉 모든 지혜자들보다 자신을 더욱 지혜롭게 여기는 자이니 곧 교만하여 누구의 말도, 어떤 조언과 책망도 듣지 않는 자이다.

    사람이 교만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인생의 막대기로 인해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여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왜 교만함을 좋아할까. 아기들과 함께 있다 보면 깜짝 놀라고 당황스러울 때가 참 많다. 무개념, 노개념이 참 무섭다. 그것은 정말 거시기하다. 저러다가 위험할 수도 있겠다 하는 순간들이 이따금씩 발생한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일일이 하나하나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이미 탑재되어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 모든 규칙들이 어쩌면 말씀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견고한 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무너져 내린 나의 사고의 틀만 봐도 참 많지 않은가. 처음에 나는 이렇게, 이러한 가치관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자녀를 양육하리라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무너져 내리지 않았는가. 내가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배웠던 소위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방법들과 규범들은 어찌 보면 시대의 변화에 맞게 재구성되거나 폐기되어야 할 것들이 참 많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것의 견고한 진으로 자녀들을 누르고 있게 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 그러다가 시대의 장벽 앞에서 어느 순간 박살이 나면, 참 마음이 어려운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지. 이러한 견고한 진들이 모이고 모여,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하게 되고 그것이 곧 교만이라는 높은 바벨탑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 결국 내 앞에는 주님의 말씀만 남는다. 저 교만한 자를 정의하는 오늘의 말씀 앞에서, 나는 저기에 지극히 작은 일부분이라도 해당되지 않는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보다 스스로를 더욱 지혜롭게 여기는 부분이 있는가. 말씀을 대적하여 일어선 아직 깨닫지 못한 견고한 진이 있는가, 그것이다.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주님 아니면 안 됩니다. 아멘.

  • 사랑을 구하는 자와 입을 닫는 지혜 – 잠언 17:9 묵상

    잠언 17:9을 통해 배우는 관계의 지혜. 사랑을 구하는 자는 범죄를 덮고, 말이 줄어들수록 가족과 더 가까워지는 신앙적 통찰을 나눕니다.

    잠언 17:9 He that covereth a transgression seeketh love; but he that repeateth a matter separateth very friends. (KJV).

    사랑을 구하는 사람의 태도

    상대의 사랑을 구하게 되면 그의 범죄함을 절대 말하지 않는다. 신부의 사랑을 구하는 신랑 역시 그럴 것이다. 뭐 결혼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문제이지만, 그럼에도 함께 살면서 성숙하게 되면 입을 닫게 되어 있다. 왜냐면, 하나님 앞에서 토설하며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상대방도, 자녀들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품어지는 것이다.

    반복되는 말이 만드는 거리감

    그러나 어떤 사람은 상대의 죄를 계속 되풀이하여 말한다. 니가 그랬지. 과거에 그랬어. 아직도 그러니. 어찌 보면 어린 자녀들 앞에서 나의 모습 같아 부끄럽다. 그러나 나의 입이 바뀔수록, 나의 입이 닫아질수록 자녀들은 그의 아빠에게 이전보다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지르고 보는 경우가 아직 많다. 그러나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주변에서 그런다. 나의 말이 아니다.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길

    내 하늘 아빠가 그러하듯 나도 자녀들에게 사랑을 구한다. 그냥 식구들이 한 집에 다 모여 있으면 행복하다. 그들의 얼굴만 볼 수 있어도 그냥 좋은 것이다. 나의 입이 더욱 닫혀질수록, 그들은 내게 더욱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오늘, 주님 앞에 더욱 머물 수 있도록 붙들어 주세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