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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언 24장 묵상: 오만을 버리고 회개로 일어서라

    잠언 24장 성경묵상으로 오만을 버리고 회개와 인내로 다시 일어서라. 잠언 24장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지혜와 명철로 세워지는 성전의 삶을 묵상하며 실천하자.

    잠언 24:9-10
    “우둔한 자의 간계는 죄며 오만한 자는 사람에게 가증하다. 네가 환난 날에 약해지는 것은 네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직역성경)

    오만은 하늘과 땅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사탄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천사들의 1/3을 꾀었다. 오만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모를 거역하며 형제를 원수로 만든다. 오만한 마음은 파괴를 낳고, 입술은 고생을 말한다. 오만은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오만을 깨닫는 순간이 회개의 시작이다. 내 속의 오만함은 여전히 나를 괴롭게 하지만, 회개할 때마다 마음이 새롭게 된다. 마음이 상한 만큼 회개하지 못하면, 복수심과 비뚤어진 말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진실한 회개는 내 안의 성전을 다시 세운다.

    환난 날에 약해지는 이유는 내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지혜와 명철로 집이 세워지고, 나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내 안의 지혜께서 그분의 집을 짓도록 맡겨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인내로 구원을 이루고, 회개로 믿음을 지켜야 한다.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고, 주님의 은혜로 굳건히 서야 한다. 각 단락의 시작부터 ‘오만’, ‘회개’, ‘인내’ 키워드를 반복 강조하며 메시지를 강화한다. 그렇게 할 때 여호와의 성전의 기둥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 믿음과 구원의 길은 인내로 완성된다.

    나의 목숨을 지키시는 여호와께서 각자의 행위대로 보상하신다. 그러니 달려가자. 끝까지 인내하며 여호와를 경외하자. 주님이 도우시고 지키시며 붙들어 주신다. 아멘.


    묵상 원본

    오만함은 하늘과 땅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사탄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천사들의 1/3을 꾀어냈다. 오만하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모를 거역하며 스스로 형제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파괴를, 입술은 고생을 말한다.

    그것이 내 속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나를 괴롭게 한다. 나의 마음이 상해 있는 만큼, 깨닫지 못해 회개하지 않은 만큼, 복수하려는 마음과 비뚤어진 입의 말들이 나가는 것이다.

    환난 날, 오만한 자의 지배를 당할 때 약해지는 이유는 나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할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묵상하는 것이다. 지혜와 명철로 집이 지어진다. 나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집이다. 그러니 내 안에 계신 지혜께서 그분의 집을 지으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오직 다시 일어나는 것뿐이다. 인내함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 회개하여 일어나고, 또다시 회개하여 일어나고를, 다시는 넘어지지 않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여호와의 성전의 기둥과 같은 존재가 되어져간다. 나의 목숨을 지키시는 여호와께서 각자의 행위대로 보상하신다.

    그러니 달려가자. 끝까지 인내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자. 주님이 도우시고 지키시고 붙들어 주신다. 아멘.

  • 잠언 21:2 묵상 – 여호와께서 마음을 달아보신다

    잠언 21:2 말씀 묵상. 사람은 자기 길이 옳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진심과 동기를 보신다. 삶의 서투름 속에서도 하나님은 교훈과 회개의 길로 인도하시며, 중심을 중요시하시는 주님의 시선을 묵상한다. 오늘의 삶에서 존중과 사랑을 실천하며 마음을 점검하는 도전과 울림을 제공한다.

    “각 사람의 모든 길이 자기 눈에는 바른 듯하나 여호와께서 마음들을 달아보신다.” (잠언 21:2, 직역성경)

    마음 중심을 보는 하나님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믿지만 하나님은 겉보다 마음을 보신다. 인간은 미숙하고 불완전하며, 권위자조차 완전하지 않다. 하나님은 결과보다 마음의 방향을 달아보신다. 마치 어린아이가 넘어지면서도 손길과 사랑을 배우듯,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선한 마음을 보신다.

    삶에서 배우는 교훈

    나의 인생도 그렇다. 대인관계에 서툴고 표현이 부족했지만 마음까지 거짓된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고 싶었으나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런 나의 중심을 아신다. 아이들이 나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배움을 주고,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는 순간, 나는 겸손과 존중을 새롭게 배운다. 이러한 경험은 독자들에게도 삶의 교훈과 공감을 남길 것이다.

    연약함 속에서도 회복을 원하시는 하나님

    중독이나 습관 같은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정죄보다 회복을 원하신다. 선한 마음을 가진 자는 넘어져도 괴로워하며 다시 일어나려 한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달아보시고 고치시며 새롭게 하신다. 이는 마치 불완전한 도자기를 조심스럽게 빚어 완전하게 만드시는 장인처럼, 우리의 마음을 다루시는 섬세한 손길을 보여준다.

    가정을 통한 배움과 겸손

    가정 안에서도 배움이 있다. 아내를 통해, 자녀를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보고 교만을 버린다. 존중과 사랑을 배우며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곧아진다. 오늘도 나는 결심한다. 존중과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마음을 따라 살아가겠다고. 이 결단을 마음에 새기고 매일 실천하며, 독자도 자신의 삶에서 동일한 결단을 실천하도록 도전받기를 바란다. 이 결단이 반복될 때, 삶 속에 깊은 울림으로 남게 될 것이다.


    묵상 원본

    왜 여호와께서 마음들을 달아보실까. 사람은 미련하고 미숙하기 때문이다. 모든 권위자가 다 불의하기 때문이다. 나의 자녀들만 해도 나와 아내보다는 더 좋은 환경에서 조금 더 나은 권위자 아래에서 성장하지 않는가. 그러니 자녀들이 나보다 모든 면에서 탁월한 것이다. 나처럼 대인관계가 서투른 사람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그 부분에서는 아이들이 나의 선생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사람이 하는 어떤 일들의 결과물을 보시지 않는다. 그 마음들을 보시는 것이다. 나처럼 서투르고 모난 곳이 많은 사람은 정말 모르니 그게 최선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선생님들에게 많이 맞았고, 악명 높은 배문중고등학교에서는 왜 맞는지 이유도 모르고 맞았고, 시험 점수 떨어졌다고 맞았고, 숙제 놓고 와서 맞았고, 쳐다본다고 맞았고, 출석부로 얼굴도 맞고, 허구한 날 단체 기합에, 이래저래 맞았고, 주일에 교회 간다고 맞았고, 기계공으로, 그다음 군대, 거반 30살까지 남자들만 득실대는 세상에서 살면서 매 맞고, 수근거림당하고, 뭐 그랬다. 그때는 다 그리 살았다. 당연한 건 줄 여기고 살았다. 그러니 어찌 알겠는가.

    나도 존중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나의 마음이 여호와 앞에서 굽어졌는가. 악한 마음으로 그리 하였는가. 아닐 것이다. 인간관계하는 법을 모르니, 표현하는 법을 모르니,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하니,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했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닐 뿐이다. 그렇다고 나의 마음까지 거짓된 것은 아니다.

    몰라도 괜찮다. 배우면 된다. 잘못을 깨달으면 회개하면 된다. 그러나 마음의 근본 동기는 어떻게 하겠는가. 예를 들어 습관적인 중독이 있다고 하자. 마음이 선한 자는 그것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끌려간다. 좋아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안 되는 것 알면서도 끌려간다. 나도 아직 끊어야 할 그리 좋지 않은 습관들이 있다. 버럭하는 것, 조급한 것, 가끔 뉴스 보는 것 등.

    그러면 그들의 마음도 악한 것인가. 아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마음들을 달아보신다고 생각한다. 달아보시고 도와주시려고, 고쳐주시려고, 구원하시려고, 새롭게 하시려고, 알려주시려고, 새 힘 주시려고, 존중하고 섬기는 사람 되라고, 사랑을 배우게 하시려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시려고, 기쁘게 받고, 자기 짐을 나누어 지는 방법을 알게 하시려고, 붙들고 있는 우상을 놓을 수 있게 하시려고 등등…

    우리 집의 아내는 나의 도움이요, 큰아이들은 나의 선생들이고, 어린아이들은 나의 과거를 비추는 거울들이다. 아직도 나는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내가 전에는 알지도 못했고 깨닫지도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고 회개하면서 이제서야 하나하나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교만하겠는가.

    어제도 하나 배웠다. 아빠, 잘해주려고만 하지 말고 존중해주려고 해보세요. 그래서 그걸 해보려고 한다. 여호와께서 오늘 나의 마음 달아보시고 기뻐하신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아멘.

  •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행복하다: 잠언 16장 20절 – 믿음과 분별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하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하지 않는다. 악을 분별하고 주님께 신뢰를 두는 자가 참된 행복을 누린다. 오늘도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삶을 선택하라.

    말씀:
    “어떤 일을 분별하는 자는 복을 발견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행복하다.”
    잠언 16:20 (직역성경)

    누구를 의지한다는 것은 전적인 신뢰를 뜻한다. 막내를 어린 형제에게 맡기고 외출할 수 있을까. 마음이 불안할 것이다. 그러나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맡긴다면 근심이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이와 같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마음의 평강을 얻는다.

    예전에 아이들을 믿음의 사람에게 맡겼을 때 마음에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것이 내가 예수님께 내 자녀를 올려드릴 수 있는 이유다. 많은 사람이 걱정할 때에도 나는 주님께 맡기고 기도한다. 그분이 기다려주셨듯, 우리도 기다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나를 처음 부르신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를 잃지 않으셨다. 그분이 내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내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는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근심이 사라진다.

    어린아이는 집의 형편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부모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하나님을 믿기에 오늘도 행복하게 하루를 보낸다. 내일도, 어떤 상황이 와도 예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릴 것이다.

    오늘의 적용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은 현실의 불안보다 크다. 오늘 하루, 근심 대신 신뢰를 선택하라. 주님께 맡길 때 마음의 평강이 임한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모든 상황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일을 분별하는가. 악을 분별하여 떠나는 자가 복을 얻는다. 사탄의 왜곡된 말들을 분별하여 거절하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한다. 그것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이다. 아멘.


    원 본

    누구를 의지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를 들어 내가 막내를 9살 셋째에게 맡기고 외출할 수 있을까. 어린아이들을 위의 사춘기 형, 누나에게 맡기고 영화 한 편 볼 수 있을까. 불가능하거나 마음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할 것이다.

    전에 딱 한 번 어느 분께서 나의 아이들을 며칠 맡아주신 적이 있었다. 아무 걱정도, 어떤 근심도 없었다. 내가 큰아이와 둘째 아이를 예수님께 올려드리고 룰루랄라 하는 이유다.

    큰 아이를 염려하는 소리들이 있다. 그 아이를 위해 중보해 주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왜 염려해야 하나. 미혹에 가린 거 맞다. 그래서 저러고 있는 거 맞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또 다른 무엇을 푸시해야 하나. 부담을 줘야 하나. 그 아이, 참 많이 아프다. 누구나 겪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는 가장 아픈 것이다.

    내가 그 아이만 할 때, 내 아빠를 칼로 찌르려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은 그저 “기범아,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가 다였다. 예수님께서 나 같은 자도 기다려주셨으니 그 아이 역시 기다려주실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이 수십 년 뒤로 더 밀린다 해도 말이다. 나는 그저 주님께 맡기고 기도할 뿐이다. 나도 사명이 있고 그 아이도 사명이 있다면 때가 이를 때까지 기다려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실 그때부터 주님은 나를 조금이라도 잃어버릴 만한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내게 무엇을 하시던, 그것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얻고 또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는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특히 오늘날의 세상에서 물질적인 부분까지도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한다면 어떤 근심도 걱정도 없는 것이 정상인 거다. 어린아이는 자기 집의 재정 형편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아기들은 돈 없이도 하루를 아주 행복하게 보낸다. 그러면 나도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보냈는가. 그랬다.

    나는 내일도 행복하게 지낼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떤 희한한 상황이 주변을 우겨싸도 예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릴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선포이다. 무화과나무 잎이 어쩌고저쩨도 난 그저 예수님만으로 즐거워한다.

    어떤 일을 분별하는가. 악을 분별하여 악에서 떠나는 자가 복을 발견한다. 사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왜곡되고 뒤틀린 말들을 온전히 분별하여 쳐내고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하겠다. 아멘.

  • 자녀 양육과 ‘부지런한 손’의 의미 – 잠언 10장

    잠언 10을 중심으로 자녀 양육과 신앙적 책임을 묵상합니다. 부지런함과 방임의 차이, 목자로서의 부모 역할, 실천적 신앙생활에 대한 고백과 적용을 쉽게 정리했습니다.

    잠언 10
    3-5 여호와께서 의인은 굶기지 않으시나 악인들의 탐욕은 밀어내신다. 게으른 손은 빈곤을 만드나 부지런한 손은 부유하게 한다. 여름에 모으는 자는 분별력이 있는 아들이나 추수 때 깊이 잠자는 자는 부끄러운 아들이다. (직역성경).

    자녀를 주님 손에 올려드리는 것과 방임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게으른 손과 부지런한 손의 차이는? 자기 밭에서 부지런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밭에서 모으고 추수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지런한 손이다. 그리고 여력이 있으면 남의 밭을 도와주는 것이다. 언제가 여름이고 추수 때는 어느 때인가. 그러니 남의 일에만 부지런한 것도 내가 보기엔 게으른 손이다. 정작 자기 해야 할 우선순위를 뒤로 미루었기 때문이다. 자녀를 주님 손에 올려드린 자는 아무 염려 없이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겠지만, 방종하는 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술로 인생을 탕진하는 어떤 가장처럼. 어쩌면 억지로 잡아끄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나는 나의 양들을 잘 보살폈는가. 과거를 돌아보면 그렇지 못했다. 분노로 이글거리며 나의 틀에 끼워 넣으려 하였었다. 사랑으로 하지 않았다. 나도 말로 인한 상처를 많이 받고 자라서인지, 가족들에게 말로 상처를 많이 주었었다. 내 것이라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하였었다.

    나도 장남이고, 내 딸도 장녀다. 그러니 내게 있던 그 많은 말의 상처들이 장녀에게로 다 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아이를 망치지 않으려고 주님 손에 올려드린 후에 나는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방임하고 있는가. 저녁에 어린 아이들과 놀아주지 않으면서 그들이 서로 싸운다고 뭐라고 하고 있으면, 그것은 아이들을 방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을 섬기며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배려하는 것을 알려주면서 그들의 마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아빠라면, 더욱이 그들이 내 자녀가 아니라 왕의 자녀들로 인식하며 그렇게 대우하고 있다면, 나는 그들을 방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손에 올려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저녁에 집 근처 놀이터로 나간다. 자기 입에서 “아빠 이제 집에 가요”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실컷 놀아준다. 그러면 나보고 만점아빠란다. 나는 전혀 누려보지 못한 삶이다. 사춘기 장녀에게도 비슷할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바운더리를 잘 쳐주어야지. 학생으로서의 신분을 잘 지키도록 해야지.

    나의 큰 아이에게도 고민이 있다. 둘째에게도 그렇다. 둘이 성향은 다르지만 그렇다. 그때에는 고민이 많을 때라고 그러고 말겠는가. 자기 뜻대로 하도록, 아니면 상황이 안 되니 그냥 체념하도록 두어야 하겠는가. 아빠의 뜻 밖으로 나갔으니 네 아픔에 나는 관심 없다 하겠는가. 자녀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나도 귀하게 여겨야 하고, 자녀가 아파하는 것에 나도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아빠에게 얘기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함께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구해보자고 그들의 마음을 공감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아이들이 내게 툭툭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나도 예수님처럼 선한 목자라면, 그들의 고민을 듣고 흘려버리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기도라도 할 것이다. 왕의 자녀로 든든히 서도록, 마지막 때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기도부터 해야 할 것이다.

    내게 맡겨주신 자녀들이 나의 양떼라면 그들은 주님의 양떼이기도 할까. 저 아이는 내게 순종하지 않으니 내 양이 아니야 하실까. 전에 나는 큰 아이를 그렇게 대했다. 그랬더니 자신이 쓰레기인 줄 알더라. 아빠에게 버림받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더라. 얼마나 많이 회개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가. 순종은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 가치를 깨닫고 스스로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그 아이는 보석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 이제는 그 아이 자신도 인정한다. 정말 감사하다. 그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받을 수 있는 말만 전했다. 오래 걸렸다. 학교 다닐 때도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지만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어쩌겠나. 나도 몇 달, 몇 년을 기다려 한마디 건낸다. 그러나 아직도 어렵다. 방임인지 주께 올려드린 것인지.

    내게 지금까지 어린 아이들을 양육하도록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어린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길에서 처음 보는 아기들도 나를 보고 웃는다. 왜 그들은 주일마다 내게 와서 놀이터 언제 가냐고 삼촌만 쳐다보고 있나. 자기 아빠도 있는데 말이다. 무엇이 부지런한 손인가. 여름은 언제인가. 바로 지금이다. 아이들이 내게 모이는 이때, 내가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베풀 수 있는 이때, 지금이 나의 여름이다. 주께서 내게 허락해주신 작은 행복이고 선물이다. 나의 자녀가 아니어도, 내게 순종치 않아도 괜찮다. 무리 중에 도망가는 양을 위해 목자는 찾아 나선다. 다른 무리들을 뒤로 하고서라도 말이다. 어쩌면 나의 양들이 아니라 나의 주님, 왕의 양떼들이다. 그들이 내게로 올 때 나는 무엇을 하겠는가. 나는 그저 예수님처럼 왕의 양떼를 치는 선한 목자이고 싶을 뿐이다. 그 길을 배워가는 중이다. 아멘.

  • 거만과 수치, 그리고 겸손이 주는 지혜 – 잠언 11장

    거만과 수치, 그리고 겸손이 주는 지혜 – 잠언 11장

    잠언 11:2 말씀을 통해 ‘거만함이 수치를 불러오고, 겸손이 지혜를 가져온다’는 영적 원리를 묵상합니다. 가인의 선택과 우리의 일상 속 반응을 연결하며, 수치에서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나눕니다.

    잠언 11:2
    거만함이 들어올 때 수치가 들어오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지혜가 있다. (직역성경)


    오늘은 수치에 관한 메타인지를 하는 날이다. 수치는 거만할 때 들어온다. 예를 들면 아이들에게 버럭 할 때조차도 수치가 들어온다. 그러니 내게는 쌓여 있는 수치가 그만치 많은 것이다. 가장의, 어른의 뜻에 따르지 않는 아이에게 분노가 올라올 때, 왜 씩씩거리나. 그 이면에 있는 것이 두려움과 수치이다.

    가인은 자기의 수치를 해결하려고 그의 근원을 제거(살인)하는 쪽을 택하였다. 오늘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부모를, 권위자를, 자녀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없으니 미워하며 자신을 죽이는 쪽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게 모두 죄의 열매, 즉 선악과의 열매 아닌가. 거만하여 두려움과 수치가 따라오니 다른 사람에게 버럭하며 분을 내는 것이다.

    거만할 때 수치가 들어오지, 혈기를 내야 수치가 오는 것이 아니다. 입을 다물어도, 입술을 지켜도 그 전에 교만하면 수치는 그냥 들어온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할까. 회개해야지. 나의 상처를 계속 내어드려야지. 성령이 만지실 때, 수술하실 때 고통스러워 구르면, 그분은 잠깐 하시고 멈추시는 것 같았다. 그때에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은 여기까지만 하시나 보다 할 것인가, 나 괜찮으니 계속 하시라고, 통째로 다 가져가시라고 힘써 그분의 손을 끌어당기겠는가.


    예수님, 도와주세요, 오늘 나의 상한 심령을 다 가져가 주세요. 나를 긍휼히 여겨 주세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