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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언 5장 묵상: 음녀의 길 안전하게 피하는 방법

    잠언 5장 6-8절을 통해 음녀의 길이 얼마나 위험하며, 예수님의 순종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묵상합니다. 오늘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지혜와 놀라운 깨달음을 함께 나눕니다.

    “Lest thou shouldest ponder the path of life, her ways are moveable, that thou canst not know them. Hear me now therefore, O ye children, and depart not from the words of my mouth. Remove thy way far from her, and come not nigh the door of her house.” (Pro 5:6-8, KJV)

    음녀의 길의 위험

    오늘 잠언 5장 6-8절을 들여다보면, 음녀의 길이 움직이므로 우리는 그 길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에도 길이 변할 수 있어, 잘못된 발걸음은 끝없는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그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퍼즐처럼 비밀을 아는 자만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 길을 걸으셨고, 완전한 순종으로 안전한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걸으신 길만 따라가면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에서 떠나지 않으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입니다.

    반복과 회복

    하지만 이 길은 쉽지 않습니다. 훈계와 책망이 따라오고, 우리는 넘어지고 회개하며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반복 속에서 음녀의 길을 멀리하고 그녀 집 문에 가까이 가지 않는 삶을 배워갑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결국 안전하게 그 길을 지나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적용해 보세요. 아멘.


    묵상 원본

    오늘 이 잠언의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음녀의 길이 움직인다. 그래서 너는 그것들, 음녀의 길을 알 수가 없다. 딱 이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피하나? 나의 한 걸음을 바닥에 놓는 그때에 음녀의 길이 나의 발밑으로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올무 아닐까?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디디는 순간 땅이 꺼져 끝없이 떨어지는 그런 길. 퍼즐, 즉 비밀을 아는 자만 꺼지지 않는 정확한 지점을 밟아 그 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누가 먼저 앞장서겠는가?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가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셨다. 그러니 그분이 밟고 가셨던 그 자리만 밟으면 된다. 예수님만 그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쉽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입의 말들을 듣고 행하며 그 말씀으로부터 떠나지 않는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어렵다. 그러니 훈계와 책망이 따라온다. 듣고 회개하면 주께서 다시 회복하여 주신다. 잘못 발을 디뎌 떨어지기 직전의 상황으로 되돌려 주신다. 이제 다시 예수님만 따라가면 된다. 넘어지고 회개하고, 또다시 넘어지고 회개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음녀의 길을 멀리하고 그녀 집 문에 가까이 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길 끝까지 다 가 있을 것이다. 아멘.

  • 제목: 잠언 26장 묵상 |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

    잠언 26장을 묵상하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보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소망이 있음을 배운다. 부족함과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는 믿음의 걸음을 살펴보자. 잠언 26장 말씀 묵상으로 삶에 적용해 보자.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는 어리석은 자에게 더 소망이 있느니라.” (잠언 26:12, 흠정역)

    어리석은 자는 쓸모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절뚝거리더라도 앞으로 걸어간다. 반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게으른 자는 제자리에서 돌고 돈다. 문짝이 돌쩌귀 위에서 도는 것처럼, 그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맴돌고 있다면, 그곳에서 나는 게으른 자다. 곧 교만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나에게 내려온 독불장군 같은 기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고자 한다. 절름거리더라도, 어리석은 자의 길을 택하겠다. 부족함을 드러내며, 사람들 앞에 서겠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용서와 관계 회복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프다면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나는 권위의 자리에서 절름거리며 내려와야 한다. 자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내가 먼저 말을 건다.

    기도만으로는 관계의 골이 메워지지 않는다. 권위자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부끄럽지만, 그것이 진짜 회복의 시작이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그 길에서 예수님이 강함이 되신다.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겠다.


    묵상 원본

    어리석은 자, 쓸데없다. 그러나 저는 자가 아무리 절뚝거려도 그는 앞으로 걸어간다. 절뚝절뚝 뒤뚱거려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게으른 자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빙글빙글 그 자리에서 돌고 돌 뿐이다. 문 밖에 사자가 있으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게으른 자는 곧 교만한 자이다.

    만일 내가 어느 영역에서 맴돌고 있다면 그 영역에서 나는 게으르다는 말이 된다. 곧 교만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독불장군 같은 것이 있다. 전쟁을 두 번 겪으신 나의 조부모와 홀로 자수성가하신 아버지에게서 내려받은 것이다. 내가 보고 배운 것이 그것이다. 홀로 삶의 난관들을 헤쳐가는 것.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려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자보다 어리석은 자에게 소망이 있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교만함을 버리고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택하겠다. 부족하고 절름거리는 모습 그대로 사람들 앞에 서 보겠다. 내겐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리 큰 상처도 시간이 가면 아물고 통증은 사라진다. 내가 과거에 용서했다고 하는 사건들이 충분히 아물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프다면 그건 아직 용서를 못한 것이다. 그러니 누구나 그렇듯이 내게도 그 아픔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누구나 이런 과정을 통과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비록 불의하지만 그래도 아빠이고 남편이지 않은가. 이따금씩 큰아이와 아내가 과거의 아픔을 이야기하면 내 마음도 무너진다. 나도 나의 아픔이 있다. 주님만 아시는… 그러나 외면하지 않고 들으려 한다. 내가 잘못한 것은 미안하다고 한다.

    자녀가 부모에게 먼저 섭섭함을 고백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늙으신 부모가 세상을 떠나려고 하실 때나 하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에게는 부모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걸어야 한다. 내가 가끔씩 큰아이하고 몇 시간이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서로 언성을 높이고 다투고, 미안하다고 고백하고 용서하며 밤을 샌다. 내 속을 다 뒤집어 보여준다. 나는 권위자에게 그런 것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비난을 받아도 권위자가 늘 옳았지. 내가 더 늙기 전에, 아이가 장성하여 집을 떠나기 전에 풀어야지 않겠는가.

    기도만 한다고 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게 아빠라는 권위자와 상처받은 자녀 사이에 삶의 깊이 파인 골을 풀어가는 방법이다.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권위자의 수치를 가족들 앞에서 절름거리며 드러내는 것이다. 나도 사랑한다. 무지무지 사랑한다. 그러니 내 것을 다 내어주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권위자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으면 결코 풀어지지 않는 문제가 반드시 있다. 네 분의 어르신 장례를 치르면서 배운 것이다. 그것을 안 한 권위자는 평생 자녀의 얼굴을 못 보거나, 아니면 임종 앞에서라도 자녀들에게 섭섭한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기 싫다. 내가 먼저 하겠다.

    내 비록 부족하고 절름거릴지라도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겠다. 내가 가장 약할 그때에 나의 강함이 되시는 예수님을 소망하겠다. 아멘.

  • 잠언 25장 묵상 – 왕 같은 제사장의 삶과 하나님의 숨은 보물

    잠언 25장을 묵상하며 하나님이 숨기신 보물을 발견하고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배우세요. 겸손과 경외로 지혜를 구하며 감사와 신뢰로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일을 숨기는 것이고 왕들의 영광은 일을 살피는 것이다.” (잠언 25:2, 직역성경)

    왕의 교과서, 잠언

    믿는 자들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다고 기록되었다. 우리는 모두 왕이다. 잠언 25장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왕의 교과서다. 하나님이 숨기신 보물을 찾도록 부르신 책이다. 잠언은 반복해서 말한다. 은과 금보다 지혜를 구하라, 지혜가 더욱 귀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재물과 영광이 따를 것이다, 훈계를 버리지 말라.

    겸손이 왕의 지혜다

    하나님의 일을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겸손히 그분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로 기뻐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신뢰하며 감사하라. 그러면 지나온 모든 시간이 해석될 것이다.

    단 한 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 나의 실수까지도 아시고 피할 길을 미리 준비하신 그분의 손길을 보게 된다.

    과거 속에 숨은 하나님의 포석

    과거의 모든 사건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왕으로 세우기 위한 포석이었다. 바둑의 한 수, 체스의 한 칸처럼 그분의 계획에는 의미 없는 일이 없다.

    이제 우리는 과거를 감사로 보고, 현재를 신뢰로 살며, 숨겨진 하나님의 일을 찾아가야 한다.

    “너희는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아멘.

  •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행복하다: 잠언 16장 20절 – 믿음과 분별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하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하지 않는다. 악을 분별하고 주님께 신뢰를 두는 자가 참된 행복을 누린다. 오늘도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삶을 선택하라.

    말씀:
    “어떤 일을 분별하는 자는 복을 발견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행복하다.”
    잠언 16:20 (직역성경)

    누구를 의지한다는 것은 전적인 신뢰를 뜻한다. 막내를 어린 형제에게 맡기고 외출할 수 있을까. 마음이 불안할 것이다. 그러나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맡긴다면 근심이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이와 같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마음의 평강을 얻는다.

    예전에 아이들을 믿음의 사람에게 맡겼을 때 마음에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것이 내가 예수님께 내 자녀를 올려드릴 수 있는 이유다. 많은 사람이 걱정할 때에도 나는 주님께 맡기고 기도한다. 그분이 기다려주셨듯, 우리도 기다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나를 처음 부르신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를 잃지 않으셨다. 그분이 내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내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는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근심이 사라진다.

    어린아이는 집의 형편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부모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하나님을 믿기에 오늘도 행복하게 하루를 보낸다. 내일도, 어떤 상황이 와도 예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릴 것이다.

    오늘의 적용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은 현실의 불안보다 크다. 오늘 하루, 근심 대신 신뢰를 선택하라. 주님께 맡길 때 마음의 평강이 임한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모든 상황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일을 분별하는가. 악을 분별하여 떠나는 자가 복을 얻는다. 사탄의 왜곡된 말들을 분별하여 거절하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한다. 그것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이다. 아멘.


    원 본

    누구를 의지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를 들어 내가 막내를 9살 셋째에게 맡기고 외출할 수 있을까. 어린아이들을 위의 사춘기 형, 누나에게 맡기고 영화 한 편 볼 수 있을까. 불가능하거나 마음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할 것이다.

    전에 딱 한 번 어느 분께서 나의 아이들을 며칠 맡아주신 적이 있었다. 아무 걱정도, 어떤 근심도 없었다. 내가 큰아이와 둘째 아이를 예수님께 올려드리고 룰루랄라 하는 이유다.

    큰 아이를 염려하는 소리들이 있다. 그 아이를 위해 중보해 주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왜 염려해야 하나. 미혹에 가린 거 맞다. 그래서 저러고 있는 거 맞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또 다른 무엇을 푸시해야 하나. 부담을 줘야 하나. 그 아이, 참 많이 아프다. 누구나 겪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는 가장 아픈 것이다.

    내가 그 아이만 할 때, 내 아빠를 칼로 찌르려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은 그저 “기범아,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가 다였다. 예수님께서 나 같은 자도 기다려주셨으니 그 아이 역시 기다려주실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이 수십 년 뒤로 더 밀린다 해도 말이다. 나는 그저 주님께 맡기고 기도할 뿐이다. 나도 사명이 있고 그 아이도 사명이 있다면 때가 이를 때까지 기다려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실 그때부터 주님은 나를 조금이라도 잃어버릴 만한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내게 무엇을 하시던, 그것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얻고 또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는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특히 오늘날의 세상에서 물질적인 부분까지도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한다면 어떤 근심도 걱정도 없는 것이 정상인 거다. 어린아이는 자기 집의 재정 형편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아기들은 돈 없이도 하루를 아주 행복하게 보낸다. 그러면 나도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보냈는가. 그랬다.

    나는 내일도 행복하게 지낼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떤 희한한 상황이 주변을 우겨싸도 예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릴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선포이다. 무화과나무 잎이 어쩌고저쩨도 난 그저 예수님만으로 즐거워한다.

    어떤 일을 분별하는가. 악을 분별하여 악에서 떠나는 자가 복을 발견한다. 사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왜곡되고 뒤틀린 말들을 온전히 분별하여 쳐내고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하겠다. 아멘.

  • 잠언 15장 4절 묵상 –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 말 한마디가 영혼을 살린다

    잠언 15장 4절 묵상은 온유한 혀가 생명나무임을 보여준다.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요, 패역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우리의 말은 영의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다. 생명을 살리는 말과 성결한 혀를 회복하는 길을 다루는 말씀 묵상.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이나 패역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잠언 15:4 (직역성경)

    잠언 15장 4절 묵상은 우리의 말이 얼마나 깊이 영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은 귀로만 듣지 않는다. 마음과 혼, 그리고 영으로도 듣는다.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영의 흐름이다. 왜곡된 말은 영을 상하게 하고, 온유한 말은 영을 살린다. 말의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힘이 존재한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왜곡된 생각이 영을 상하게 한다. 낙심과 두려움이 밀려올 때, 사탄은 거짓된 말들을 생각 속에 뿌린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영이 약해진다. 이는 참소의 말에 동의한 결과다.

    나 또한 무심코 왜곡된 말로 이웃의 영을 상하게 한 적이 있다. 입술을 통해 생명이 아닌 왜곡이 나간 것을 회개한다. 그리고 내 생각과 혀가 더 이상 대적의 통로가 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한다. 내 마음과 입술이 여호와 앞에서 정결하고 거룩하게 되기를 구한다.

    이 묵상을 통해 오늘 다시 선포한다. 나의 혀가 생명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말 한마디로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입술이 되게 하소서.

    주여, 내 생각과 말을 정결케 하소서. 사탄의 참소에 동의하지 않게 하시고, 온유한 혀로 생명의 말을 전하게 하소서. 내 입술을 통하여 영이 살아나게 하소서. 아멘.


    원 본

    잠언 15:4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이나 패역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직역성경)

    사람의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혼으로도 어떤 말과 생각을 듣는다. 패역한 혀, 곧 뒤틀리고 왜곡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말은 곧 영의 세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영의 현실이 말을 통해 전달되어진다. 그러니 사람의 영이 온유한 말을 들을 때 살아나고, 뒤틀리고 왜곡된 말로 인해 상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 특별히 누구로부터 어떤 입의 말을 듣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자신의 영을 상하게 할 때가 나는 있었다. 최근에도 그랬다. 즉 어떤 환경과 상황이 나의 영을 상하게 하였다. 영이 상하여 잠시 낙담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오늘 말씀을 읽으며 깨닫게 되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탄이 나의 생각과 귀에 뒤틀린 혀의 말들을 뿌린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받은 것이다. 즉 대적이 뿌린 참소의 혀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의한 것이다. 나의 영이 상함을 입었다면 이것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입이 비뚤어지고 왜곡된 말들의 통로가 되어 이웃에게 나갈 때도 있다. 이 시간 나도 모르는 사이 사탄의 참소하는 말에 동의한 것을 회개한다. 그리고 나의 입이 대적의 통로로 사용되어진 것들을 회개한다. 그리고 더욱 깨어 생각과 마음을 여호와 앞에서 성결할 것을 다시 선포하며 기도한다. 아멘.

  • 잠언 4장 묵상: 훈계를 붙잡고 악인의 길을 피하라

    잠언 4장은 훈계를 붙잡고 놓치지 말라는 지혜의 핵심을 강조한다. 이 말씀은 영적 분별력과 기도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함을 상기시킨다. 선으로 위장한 악의 올무를 분별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을 묵상한다.

    잠언 4:13-14 ― “훈계를 붙잡아 놓치지 말고 지켜라. 참으로 그것이 네 생명이다. 악인들의 길로 들어가지 말고 악한 자들의 길에서 활보하지 마라.” (직역성경)


    훈계를 붙잡는 이유

    잠언 4장은 훈계, 지혜, 악인의 길을 핵심 주제로 삼는다.
    하나님께 받은 교훈을 붙잡고 지키는 삶이 생명의 길임을 말한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기도와 분별을 통해 선으로 위장한 악을 이겨내야 한다.

    악인의 길을 분별하는 법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 겉으로는 선한 길처럼 보여도 영적 속임이 숨어 있다.
    기도로 묻고 응답을 받는 습관이 분별의 핵심이다.
    훈계를 붙잡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때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영적 성장과 훈련의 과정

    아이들이 부모의 보호 아래 있듯, 성도도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다.
    그러나 성장할수록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해야 한다.
    넘어짐과 실수를 통해 훈계를 배우고, 영적 분별력이 자라난다.
    이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군사로 훈련되는 길이다.

    결론

    이 땅의 삶은 하나님의 눈앞에 있는 훈련장이다.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니 예수님 도우심을 구하며, 훈계를 붙잡고 악인의 길을 피하라.
    “예수님, 도와주세요. 아멘.”


    묵상 원본: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그것이 일반적인 선한 길과 같아 보일 수도 있다. 선한 자의 발목에 올무를 걸기 위해 교묘하게 위장한다. 영의 세계가 실재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 땅에서도 더욱 교묘하게 속임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로 묻고 응답을 받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훈계를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붙잡았으면 놓치지 말고 지켜야 한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가. 전에 응답을 받았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물어보는 것이다. 대적의 전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탄의 올무가 마치 하나님의 응답처럼 오지 않는가.

    아이들은 부모의 보호를 받는다. 그러니 그 바운더리 안에서 행복하게 놀면 된다. 그러나 장성하여 부모의 바운더리(보호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되면, 이제는 많은 것을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해야 한다. 적의 공격에 더 노출되는 것이다. 실수하여 넘어지고 올무에 걸린다.

    그렇게 훈계를 배운다. 왜 이런 상황들이 허락되었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뭐가 달라졌는지 등등 배워가며 훈계를 받아 전략을 수정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점점 더 그럴듯하게 선으로 위장한 악인의 올무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땅은 성도를 하나님의 군사로 훈련시키는 최첨단 홀로그램 서바이벌 훈련장이다. 실체인 영적 세계보다 더욱 실제 같아 보인다. 나의 모든 삶이 하나님 눈앞에 있는데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나 혼자서는, 나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님 도와주세요. 아멘

  • 총명을 구하고 온전하게 걷는 삶, 크리스천 실제 사례 – 잠언 2

    잠언 2:3-5,7 묵상글. 총명을 구하고 명철을 얻어 회개와 성숙을 경험하며, 천로역정 크리스천 사례로 실제 신앙 여정을 배우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잠언 2:3-5,7
    오직 총명을 위하여 부르짖고 명철을 위하여 네 소리를 높여 은처럼 그것을 구하고 숨겨 둔 보물처럼 그것을 찾으면 그때 네가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지식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바른 자들을 위하여 온전한 지혜를 쌓아 두셔서 완전하게 걸어가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니 (직역성경).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완전한 자는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인 욥도 여호와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다. 그러면 누가 바른 자들인가. 온전히 걷는 자들은 누구인가. 예를 들자면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 같은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의 시점은 일반적으로 지금에 고정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예수 믿고 구원 받았어도 아직 이러고 있잖아, 넘어지고 다시 회개하기를 반복하고 있잖아,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예수님은 나의 미래를 보신다. 지금의 모습에 연연하지 않으신다. 언젠가는 되어질 것 아닌가. 넘어지고 다시 울며 회개하여 일어서기를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죄악이 끊어진다. 반드시 끊어지게 되어 있다. 다시는 그 죄에 대해서 넘어지지 않을 때가 반드시 온다. 그러면 그때서야 회개가 된 것인가. 아니다. 그 과정 전체가 하나다.

    5살 기범이가 지금의 나를 막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를 반드시 예수님께로 데려갈 것이다. 그래서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돌파하여 이 땅에서의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 가는 것이다.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은 구원을 받았는가? 받았다. 언제 받았나? 좁은 길의 여정을 출발할 때 받았다. 그 길을 따라가다가 수도 없이 걸려 넘어져도 그는 바르고 완전하게 걸어가는 자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방패가 되신다. 5살 기범이도 성장하게 되어 있다. 반드시 성장한다.

    예수님께서 나는 어떻게 보실까? 동일하다. 끝에서 이기면 그가 승자이다. 경기도 전쟁도 다 똑같다. 50년째 죄에 지고 있어도 끝에 이기면, 그래서 다시 넘어지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가 승자이다. 마치 지금 나의 눈이 여자들에게서, 음녀에게서, 음란물에서 지켜지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안 보는 것이 아니다. 볼 수가 없다. 보고 싶어도 더러운 음란물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나의 눈이 그것에서 돌려진다. 더럽고 징그럽다. 나의 육체는 그것을 원하나 영은 두려워 떠는 것이다. 찰나의 생각조차도 용납되지 않는다. 바로 쳐내지는 것이다. 온전한 수동태이다. 그렇게 되어진다. 전에는 애쓰고 힘써도 끊을 수 없었던 그것이 지금은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되어진다. 할렐루야.

    이제는 5살 기범이와 함께 내 안의 큰 거역을 끊을 차례이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그것, 내가 큰 아이에게 물려준 그것, 그 거역을 끊어내겠다. 선악나무의 열매들을 걷어낼 차례이다. 거역이 끊어질 때 예하도 자신의 상처를 이기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한동안 잠잠하였지만 이제 다시 부르짖고 또 부르짖겠다.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하여 말이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아멘.

  • 지혜로운 아들과 오만한 자의 차이 – 잠언 13장

    잠언 13장을 중심으로 지혜로운 아들이 아버지의 훈계를 듣는 것과 오만한 자가 꾸지람을 듣지 않는 차이를 묵상합니다. 일상에서의 죄와 순종, 행동으로 증명하는 신앙을 다룹니다.

    잠언 13
    1 지혜로운 아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나 오만한 자는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 (직역성경).

    훈계를 듣고 바로 회개하여 고치는 것이 듣는 것이다. ‘그렇게 할게요’ 하고 하지 않으면 그것은 듣지 않은 것이다. 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죄를 짓게 하는 습관들, 무엇이 죄인가. 부부가 떨어져 있는 것이 죄이다. 애인과, 혹은 아내와 데이트 하면서 딴 여자에게 눈이 따라가는 것이 죄이다. 해봐라, 곧바로 이글거리는 분노의 질투를 느낄 때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나와 교제하기 원하시는데, 기도해야 하는데, 그것을 알고 느끼면서 유튜브 틀고 뉴스 보고 있으면 그것이 죄이다. 즉,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이 죄이다. 말만 하면서 행동이 따라가지 않아도 그것이 죄인 것이다. 그러니 아이에게 부모님 말씀에 바로 순종하도록 양육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즉각 순종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그러니, 내가 아이들에게, 가족에게, 이웃에게 할 말이 있을까. 없지. 나나 잘해야지. 그렇지. 이따금씩, 혼자 뉴스 틀고 있는 것이 주님께 죄송할 때가 있다. 그래서 이제는 나 혼자 안 보고, ‘예수님 내 옆에 계세요 같이 봐요’ 한다. 나쁜 걸 보는 게 아니니, 뭐 괜찮을까. 그러다 “이제 꺼라, 그만 봐라” 하시는 것 같은 감동을 받으면 최대한 바로 끄고 잔다. 아니면 기도한다. 이도 저도 아닐 때는 말씀을 읽는다. 말씀을 꼭 밥으로만 먹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간식으로도 먹을 수 있다. 영이 출출할 때 언제든지 말씀을 읽어요.

    뭐 이런 문제들은 괜찮다. 그러나 오만한 자는 어떻게 하는가. 왜 그래야 되요? ‘나는 그렇게 말고 다르게 하고 싶어요. 싫어요, 안 해요’ 하며 부모를 대적한다. 그리고 하지 말라 하는 것은 그렇게 한다. 결국은 손바닥이나 엉덩이에 맴매를 맞게 되는 것이 있다. 인내하며 타이르고 가르치는 것보다, 때로는 따끔한 맴매 몇 대가 더욱 효과적일 때도 있다.

    아이들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오늘 훈계를 받는다. 대부분 나에게서 배운 것들 아닌가. 그러니 어쩌겠나, 나부터 회개하고 끊고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주여, 살려주세요, 아멘.

  • 잠언 5: 삶과 영적 싸움 – 나의 모든 길을 여호와께서 살피신다

    잠언 5장 말씀을 중심으로, 인간의 본성과 영적 싸움, 교만과 음란에 대한 성찰을 다룹니다. 나의 모든 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켜보시는지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잠언 5
    21 참으로 여호와의 눈앞에 사람의 길들이 있으니 사람의 모든 길을 그가 살피신다. (직역성경)

    사람의 모든 길, 즉 나의 모든 길을 그가 살피신다. 성경은 직설적으로 말한다. 사랑스런 네 아내의 젖가슴으로 흡족해하라. 어찌하여 이방 여자의 가슴을 안고 있느냐? 네 모든 길이 여호와 앞에 있어서 그가 너의 모든 길을 살피고 계신다.

    요셉은 이것을 알았다. 그래서 청년 때에 한순간의 큰 범죄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더라도 차라리 그 편이 그에게는 여호와 앞에서 득죄하는 것보다 더 좋았다.

    일흔이 넘은 은퇴한 어느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다가,

    “내 안에 음란이 그대로 있어, 욱하는 것이 아직도 그대로 있어, 35년이 넘도록 이것과 싸웠는데, 그런데 그것들이 내 안에 그대로 있어. 나는 아직도 이것으로 인해 회개해야 돼”

    하시며 운다. 또 백세 넘으신 자기 아버지 목사님이

    “나의 교만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지금도 나의 교만함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 내 안에 교만함이 그대로 있거든, 아들 박 목사야. 나는 언제까지 이것과 싸워야 할까? 언제까지 이것을 회개해야 할까?”

    하시며 아들 목사를 끌어안고 우셨다는 고백을 들었다.

    그분들의 고백을 들으며 흐르는 내 눈의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단 한 순간의 동정일까, 아니면 나 또한 그것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기 때문일까.

    나 또한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음란과 싸우고 있다. 교만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회개한다. 그런데도 음란한 생각들과 욱하는 마음들, 복수하여 찢어버리고 싶은 생각들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것이다. 사탄이 뿌리는 가라지도 있다. 즉시즉시 처낸다. 그러나 본성은 내 속에서 올라오는 것이다. 물론 분리하면 된다. 그러나 악한 영들의 활동 이전에 나의 육체의 본성이 그것을 원한다. 이제야 인생의 반박에 안 살았으니 뭐 할 말이 있겠냐만은…

    육체는 그렇다. 늘 음란하고 정욕적이며 자기 중심적이다. 그러니 평소 얌전하던 맹수도 굶주림 앞에서는 다른 생명을 잡아 찢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순한 양들 중에서도 그리로 안 가겠다고 버티며 냅다 도망치는 양들이 더러 더러 있는 것이다. 자기의 씨를 퍼트리기 위하여 암컷을 놓고 서로 싸운다. 이게 육체다. 내가 옷처럼 입고 있는 그 육체. 그러니 이 옷을 입고 있는 한 나는 죽을 때까지 음란과 정욕, 그리고 교만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나의 모든 길이 여호와와 하나님의 눈앞에 있다. 더하여 그분이 나의 모든 길을 지금도 살피고 계신다. 내가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떠나서, 지금 얼마나 세상과 자신과 싸우고 있느냐,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가, 오늘도 예수님 한 분만을 사랑하려고 몸부림쳤는가. 내 온 마음을 주님께만 드리려고 하였는가, 아내를 내 목숨처럼 사랑하려고 하였는가, 어린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대우하였는가 등등 이런 것들, 나의 마음을 살펴보신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주님이 지금도 살피시는 것은 단 하나일 것이다. “기범아, 너는 나의 신부인가? 나의 신부로 살았는가? 오늘도 나의 신부로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등불을 준비하라.” 아멘. 오늘도 예수님 앞에서 살도록 주님, 나의 마음을 지켜주세요.

  • 잠언 29장 11절: 화를 다스리고 영을 가라앉히는 지혜

    잠언 29:11을 통해 화를 내는 순간과 지혜로운 마음의 차이를 배우고, 속사람의 회복과 영적 성장을 경험하는 방법을 알아봅니다.

    잠언 29
    1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모든 영을 나오게 하나, 지혜로운 자는 뒤로 가라앉힌다. (직역성경).

    화가 납니까? 네, 화가 납니다. 왜 화가 납니까? 이래저래서 화가 납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가, 화를 내고 있는가. 씩씩거렸는가, 콧김이 나오나. 당신은 또 졌다. 뭐, 내 얘기인 것이다. 나는 가끔씩 진다. 그래도 얼른 회개한다. 그러나 비슷한 영역에서 자꾸 지다 보면 맷집이 쌓인다. 이거 은근히 중요하다. 맷집 없으면 한 방에 나가떨어지거든. 그런데 맷집 있으면 버틸 수는 있다. 속은 뒤집어져도 입이 전처럼 안 열리거든. 일단 버티기라도 해야 나중에 돌파를 하든 할 것 아닌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면 이길 재간이 없다. 내 모든 영을 확 다 쏟아붓고는 뻗어버린다. 그러나 스무 대를 버틸 수 있으면, 그 사이에 한 방을 노릴 틈이 보이는 것이다.

    맞고 있는 줄도 모르면 어렵겠지만, 그것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어디에서 어떻게 뚫리는지도 관찰하고 있다면 대적이 공격하는 패턴도 곧 읽히게 된다. 그 틈을 타서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나의 영을 나오게 하는 영역이 있다. 왜 그 부분에서 나의 모든 영을 나오게 하는지 관찰하고 또 관찰한다. 요즘은 모두는 아니다, 아주 일부분의 영만 나오게 한다. 묻고 또 묻다 보면, 동시에 회개하고, 또 넘어지면 또 회개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주께서 치유해 주시는 영역이 있다. 그럼 내가 승리한 것이다. 일단은. 이제는 뇌와 신경을 타고 반사적으로 흐르는 회로를 다시 그려야 한다. 뒤로 가라앉히는 회로를 신경줄기에 새겨야지.

    특별히 주일예배는 나의 속사람이 치유받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난 주일에는 주님께서 나의 발을 씻겨 주셨다. “기범아, 너도 해야지” 하시면서 말이다. 미치는 줄 알았다. 그만 씻기시라고요. 완전히 내게 입 틀막을 하신 것이다. 오늘은 손가락으로 나의 이마를 톡톡 치시는 것 같았다. 행복했다. 주님은 나를 온유한 자로 만들어 가신다. 아멘

  • 오만한 자와 지혜로운 자, 회개와 지혜의 길- 잠언 14장

    잠언 14장을 통해 오만한 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를 묵상합니다. 회개와 예배, 주님 앞에 머무는 삶 속에서 참된 지혜를 얻는 길을 나눕니다.

    잠언 14
    6 오만한 자는 지혜를 찾으나 없고, 깨달은 자는 지식 얻기가 쉽다. 7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 떠나라. 네가 지식의 입술들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직역성경)

    오만한 자는 이미 창조주를 거역하였다. 그분의 모든 지혜와 사랑을 거절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떤 지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오만한 자는 쉽게 욱 하고 분을 낸다. 심판자를 대신하여 자기 눈의 들보로 판단하고 정죄하기 때문이다.

    지혜를 찾으려면, 조언을 들으려면 먼저 창조주를 대적하였던 것과 그분의 사랑을 버린 것부터 회개하여 자신의 뜻과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 그다음 지혜로부터 주어지는 훈계와 책망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쉽지 않다. 아프고 쓰리다. 그러나 그렇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어제 못했어도 괜찮다. 회개하고 오늘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악한 영이 뿌린 생각에 잡힌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그것에 잡혀 순간 욱 하며 열렸던 입을 다시 회개하는 것이다.

    매주 한 번씩 예배를 섬기는 것이 나의 일주일을 그분 앞에 서게 만든다. 지난 50일 특별 기도 때는 매주마다 3일씩 연속으로 예배를 섬겼다. 딴짓할 정신이 없었다. 오로지 주님 앞에여야만 그것을 감당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라. 그때 참 행복하지 않았나.

    오늘 행복하고 싶다면 다른 것 없다. 그냥 주님 앞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주님 집에서의 문지기 하루가 이 땅에서의 천년보다 좋은 것이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을 옆에 두고는 지식의 입술들을 배울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어리석은 자라면 어쩌겠는가. 성령 안에서 자아를, 육체를 쳐서 영에 복종하도록,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십자가 사형틀에 매달아 버리는 것이다. 토설하고, 회개하고, 방언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며 영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육체의 정욕에 끌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혼이 영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의 전에서 문지기라도 좋사오니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다.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지혜의 입술에 날마다 귀 기울이는 것이다. 사랑합니다. 예수님. 아멘.

  • 거만과 수치, 그리고 겸손이 주는 지혜 – 잠언 11장

    거만과 수치, 그리고 겸손이 주는 지혜 – 잠언 11장

    잠언 11:2 말씀을 통해 ‘거만함이 수치를 불러오고, 겸손이 지혜를 가져온다’는 영적 원리를 묵상합니다. 가인의 선택과 우리의 일상 속 반응을 연결하며, 수치에서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나눕니다.

    잠언 11:2
    거만함이 들어올 때 수치가 들어오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지혜가 있다. (직역성경)


    오늘은 수치에 관한 메타인지를 하는 날이다. 수치는 거만할 때 들어온다. 예를 들면 아이들에게 버럭 할 때조차도 수치가 들어온다. 그러니 내게는 쌓여 있는 수치가 그만치 많은 것이다. 가장의, 어른의 뜻에 따르지 않는 아이에게 분노가 올라올 때, 왜 씩씩거리나. 그 이면에 있는 것이 두려움과 수치이다.

    가인은 자기의 수치를 해결하려고 그의 근원을 제거(살인)하는 쪽을 택하였다. 오늘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부모를, 권위자를, 자녀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없으니 미워하며 자신을 죽이는 쪽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게 모두 죄의 열매, 즉 선악과의 열매 아닌가. 거만하여 두려움과 수치가 따라오니 다른 사람에게 버럭하며 분을 내는 것이다.

    거만할 때 수치가 들어오지, 혈기를 내야 수치가 오는 것이 아니다. 입을 다물어도, 입술을 지켜도 그 전에 교만하면 수치는 그냥 들어온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할까. 회개해야지. 나의 상처를 계속 내어드려야지. 성령이 만지실 때, 수술하실 때 고통스러워 구르면, 그분은 잠깐 하시고 멈추시는 것 같았다. 그때에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은 여기까지만 하시나 보다 할 것인가, 나 괜찮으니 계속 하시라고, 통째로 다 가져가시라고 힘써 그분의 손을 끌어당기겠는가.


    예수님, 도와주세요, 오늘 나의 상한 심령을 다 가져가 주세요. 나를 긍휼히 여겨 주세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