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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언 5장 묵상: 음녀의 길 안전하게 피하는 방법

    잠언 5장 6-8절을 통해 음녀의 길이 얼마나 위험하며, 예수님의 순종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묵상합니다. 오늘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지혜와 놀라운 깨달음을 함께 나눕니다.

    “Lest thou shouldest ponder the path of life, her ways are moveable, that thou canst not know them. Hear me now therefore, O ye children, and depart not from the words of my mouth. Remove thy way far from her, and come not nigh the door of her house.” (Pro 5:6-8, KJV)

    음녀의 길의 위험

    오늘 잠언 5장 6-8절을 들여다보면, 음녀의 길이 움직이므로 우리는 그 길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에도 길이 변할 수 있어, 잘못된 발걸음은 끝없는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그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퍼즐처럼 비밀을 아는 자만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 길을 걸으셨고, 완전한 순종으로 안전한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걸으신 길만 따라가면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에서 떠나지 않으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입니다.

    반복과 회복

    하지만 이 길은 쉽지 않습니다. 훈계와 책망이 따라오고, 우리는 넘어지고 회개하며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반복 속에서 음녀의 길을 멀리하고 그녀 집 문에 가까이 가지 않는 삶을 배워갑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결국 안전하게 그 길을 지나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적용해 보세요. 아멘.


    묵상 원본

    오늘 이 잠언의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음녀의 길이 움직인다. 그래서 너는 그것들, 음녀의 길을 알 수가 없다. 딱 이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피하나? 나의 한 걸음을 바닥에 놓는 그때에 음녀의 길이 나의 발밑으로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올무 아닐까?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디디는 순간 땅이 꺼져 끝없이 떨어지는 그런 길. 퍼즐, 즉 비밀을 아는 자만 꺼지지 않는 정확한 지점을 밟아 그 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누가 먼저 앞장서겠는가?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가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셨다. 그러니 그분이 밟고 가셨던 그 자리만 밟으면 된다. 예수님만 그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쉽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입의 말들을 듣고 행하며 그 말씀으로부터 떠나지 않는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어렵다. 그러니 훈계와 책망이 따라온다. 듣고 회개하면 주께서 다시 회복하여 주신다. 잘못 발을 디뎌 떨어지기 직전의 상황으로 되돌려 주신다. 이제 다시 예수님만 따라가면 된다. 넘어지고 회개하고, 또다시 넘어지고 회개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음녀의 길을 멀리하고 그녀 집 문에 가까이 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길 끝까지 다 가 있을 것이다. 아멘.

  • 잠언 27장 묵상 – 사랑이 있는 책망, 상처 주는 비난

    공개적인 책망은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공개적인 비난은 관계를 무너뜨린다. 잠언 27장을 통해 사랑의 언어와 관계 회복의 지혜를 배운다.

    공개적인 책망이 비밀을 지켜주는 사랑보다 낫다. 사랑하는 자의 상처들은 신실한 것들이지만 미워하는 자의 입맞춤들은 속이는 것들이다. (잠언 27:5‑6,직역성경)

    잠언 27장 말씀 묵상을 통해 오늘 우리의 말과 태도를 돌아보자.

    비난과 책망의 차이

    청년 시절 피지에서 학교를 섬길 때의 일이 있었다. 어느 날, 함께 일하던 현지인 친구에게 이유도 모른 채 따귀를 맞았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은 내가 그의 문화 속에서 공개적인 비난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큰 수치를 느끼고 공동체를 떠났다. 당시 나는 그것이 단순한 ‘책망’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비난’이었다.

    사랑의 언어 배우기

    우리 문화 속에서도 ‘책망’이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집안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렇다. 비난은 상대의 마음을 닫게 하지만, 신실한 사랑의 책망은 관계를 세운다.

    나 또한 자녀들에게 공개적인 비난을 자주 했다. “아가야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는 괜찮지만, 그 앞에 “너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라는 말이 붙으면 비난이 된다. “밖에 추우니 따뜻하게 입어”는 사랑이지만, “추우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는 비난이다. 나는 그렇게 자주 입으로 상처를 주었다.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

    비난을 멈추려면 스스로 권위자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불의한 권위자처럼 느낀다면 이미 비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낮아짐에서 시작된다. 자녀가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함부로 말해요?”라고 말할 때, “미안해, 아빠가 몰랐어”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때 아이는 “아빠, 내가 용서해드릴게요”라며 마음을 연다.

    묵상과 적용

    공개적인 책망은 관계를 세우지만, 공개적인 비난은 관계를 무너뜨린다. 오늘 말씀은 나의 동기를 주님께 맡기라고 가르친다. 사랑하는 자의 상처는 신실하다. 예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주 앞에 엎드리면 된다.
    묵상 포인트: 오늘 나는 사랑으로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비난으로 말하고 있는가?
    적용: 이 말씀을 묵상하며 나의 언어를 돌아보세요.


    묵상 원본

    청년때 피지에서 학교를 섬길 때 일이다. 8-9개월쯤 되는 어느 날, 함께 성실하게 함께 섬기는 나의 동갑 현지인 친구에게 어느 날 갑자기 따귀를 후려 맞았다. 평소 나를 좋아하던 고2 남학생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고 아 아이가 알려주는데로 친구를 찾아가서 나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던 적이 있다. 그 이후, 그 지역 최고의 존칭인 마스터라는 호칭으로 학생들이 나를 불렀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나라 문화권에서 공개적인 비난을 했던 것이다. 그 친구는 큰 수치감에 결국은 공동체를 떠났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는 책망을 한다고 하면서 공개적인 비난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집에서는 식구들 끼리니까 괜찮을 수 있다. 직장이야 뭐 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니 그렇다고 하자. 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생기더라. 어늘 날, 몇 달 전에 나의 아들이 내게 불편한 말을 건냈다. “아빠 그때 정말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내 맘을 이해해주는 아들에게 얼마나 고마왔던지… 그러나 나도 누군가에게 그러지 않았을까.

    나도 자녀들에게 공개적인 비난 많이 한다. “아가야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 이건 괜찮다. 그러나 그 앞에 “너 지금 아무것도 않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비슷한 말이 붙으면 이건 비난이다. 내가 잘 하는 짓이다. “밖에 추우니 따뜻하게 잆어” 이거 좋다. 그러나 뒤에 “추우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 요 말도 딱 비난이다. 내가 많이 했던 말들이다. 나도 입이 험하고 거칠다.

    혹시 나도 그런가, 궁굼하다면 스스로 분별하는 법이 있다. 자신을 불의한 권위자라고 생각한다면 거의 100% 그렇게 하고 있다 여기면 되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더 예뻐하고 그 옆의 아이는 모른체 한다면 그것도 비난이다. 옆에 있는 아이는 그저 멍 때리며 바라볼 뿐이다. 소외된 마음과 함께… 정작 비난하는 자는 자기가 무얼 하는지 모른다.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함부로 말해요?” 이런 비슷한 말을 자주, 가끔 듣는다면 그는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하나. 미안해, 아빠가 잘 몰랐어. 무조건 해야 한다. 그러면 6살짜리가 뭐라는지 아는가. “아빠 내가 용서해드릴게요” 한다. 그래, 나도 용서를 받아야지. 그런데 권위자는 미안하다는 말을 안하더라.

    그래서 다시 회개한다. 공개적인 책망이 아니라 공개적인 비난을 했던 모든 말들을 회개한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이 있다. 사랑하는 자의 상처들은 신실하다고 인정해주는 오늘 잠언의 말씀이 내게 말하지 않는가. 내 마음의 동기를 주께서 알아주시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말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도 괜찮아, 주님 앞에 엎드리면 되, 예수님이 알아주시면 되는 것이다. 아멘.

  • 제목: 잠언 26장 묵상 |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

    잠언 26장을 묵상하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보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소망이 있음을 배운다. 부족함과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는 믿음의 걸음을 살펴보자. 잠언 26장 말씀 묵상으로 삶에 적용해 보자.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는 어리석은 자에게 더 소망이 있느니라.” (잠언 26:12, 흠정역)

    어리석은 자는 쓸모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절뚝거리더라도 앞으로 걸어간다. 반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게으른 자는 제자리에서 돌고 돈다. 문짝이 돌쩌귀 위에서 도는 것처럼, 그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맴돌고 있다면, 그곳에서 나는 게으른 자다. 곧 교만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나에게 내려온 독불장군 같은 기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고자 한다. 절름거리더라도, 어리석은 자의 길을 택하겠다. 부족함을 드러내며, 사람들 앞에 서겠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용서와 관계 회복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프다면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나는 권위의 자리에서 절름거리며 내려와야 한다. 자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내가 먼저 말을 건다.

    기도만으로는 관계의 골이 메워지지 않는다. 권위자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부끄럽지만, 그것이 진짜 회복의 시작이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그 길에서 예수님이 강함이 되신다.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겠다.


    묵상 원본

    어리석은 자, 쓸데없다. 그러나 저는 자가 아무리 절뚝거려도 그는 앞으로 걸어간다. 절뚝절뚝 뒤뚱거려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게으른 자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빙글빙글 그 자리에서 돌고 돌 뿐이다. 문 밖에 사자가 있으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게으른 자는 곧 교만한 자이다.

    만일 내가 어느 영역에서 맴돌고 있다면 그 영역에서 나는 게으르다는 말이 된다. 곧 교만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독불장군 같은 것이 있다. 전쟁을 두 번 겪으신 나의 조부모와 홀로 자수성가하신 아버지에게서 내려받은 것이다. 내가 보고 배운 것이 그것이다. 홀로 삶의 난관들을 헤쳐가는 것.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려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자보다 어리석은 자에게 소망이 있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교만함을 버리고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택하겠다. 부족하고 절름거리는 모습 그대로 사람들 앞에 서 보겠다. 내겐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리 큰 상처도 시간이 가면 아물고 통증은 사라진다. 내가 과거에 용서했다고 하는 사건들이 충분히 아물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프다면 그건 아직 용서를 못한 것이다. 그러니 누구나 그렇듯이 내게도 그 아픔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누구나 이런 과정을 통과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비록 불의하지만 그래도 아빠이고 남편이지 않은가. 이따금씩 큰아이와 아내가 과거의 아픔을 이야기하면 내 마음도 무너진다. 나도 나의 아픔이 있다. 주님만 아시는… 그러나 외면하지 않고 들으려 한다. 내가 잘못한 것은 미안하다고 한다.

    자녀가 부모에게 먼저 섭섭함을 고백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늙으신 부모가 세상을 떠나려고 하실 때나 하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에게는 부모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걸어야 한다. 내가 가끔씩 큰아이하고 몇 시간이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서로 언성을 높이고 다투고, 미안하다고 고백하고 용서하며 밤을 샌다. 내 속을 다 뒤집어 보여준다. 나는 권위자에게 그런 것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비난을 받아도 권위자가 늘 옳았지. 내가 더 늙기 전에, 아이가 장성하여 집을 떠나기 전에 풀어야지 않겠는가.

    기도만 한다고 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게 아빠라는 권위자와 상처받은 자녀 사이에 삶의 깊이 파인 골을 풀어가는 방법이다.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권위자의 수치를 가족들 앞에서 절름거리며 드러내는 것이다. 나도 사랑한다. 무지무지 사랑한다. 그러니 내 것을 다 내어주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권위자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으면 결코 풀어지지 않는 문제가 반드시 있다. 네 분의 어르신 장례를 치르면서 배운 것이다. 그것을 안 한 권위자는 평생 자녀의 얼굴을 못 보거나, 아니면 임종 앞에서라도 자녀들에게 섭섭한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기 싫다. 내가 먼저 하겠다.

    내 비록 부족하고 절름거릴지라도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겠다. 내가 가장 약할 그때에 나의 강함이 되시는 예수님을 소망하겠다. 아멘.

  • 잠언 24장 묵상: 오만을 버리고 회개로 일어서라

    잠언 24장 성경묵상으로 오만을 버리고 회개와 인내로 다시 일어서라. 잠언 24장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지혜와 명철로 세워지는 성전의 삶을 묵상하며 실천하자.

    잠언 24:9-10
    “우둔한 자의 간계는 죄며 오만한 자는 사람에게 가증하다. 네가 환난 날에 약해지는 것은 네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직역성경)

    오만은 하늘과 땅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사탄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천사들의 1/3을 꾀었다. 오만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모를 거역하며 형제를 원수로 만든다. 오만한 마음은 파괴를 낳고, 입술은 고생을 말한다. 오만은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오만을 깨닫는 순간이 회개의 시작이다. 내 속의 오만함은 여전히 나를 괴롭게 하지만, 회개할 때마다 마음이 새롭게 된다. 마음이 상한 만큼 회개하지 못하면, 복수심과 비뚤어진 말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진실한 회개는 내 안의 성전을 다시 세운다.

    환난 날에 약해지는 이유는 내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지혜와 명철로 집이 세워지고, 나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내 안의 지혜께서 그분의 집을 짓도록 맡겨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인내로 구원을 이루고, 회개로 믿음을 지켜야 한다.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고, 주님의 은혜로 굳건히 서야 한다. 각 단락의 시작부터 ‘오만’, ‘회개’, ‘인내’ 키워드를 반복 강조하며 메시지를 강화한다. 그렇게 할 때 여호와의 성전의 기둥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 믿음과 구원의 길은 인내로 완성된다.

    나의 목숨을 지키시는 여호와께서 각자의 행위대로 보상하신다. 그러니 달려가자. 끝까지 인내하며 여호와를 경외하자. 주님이 도우시고 지키시며 붙들어 주신다. 아멘.


    묵상 원본

    오만함은 하늘과 땅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사탄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천사들의 1/3을 꾀어냈다. 오만하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모를 거역하며 스스로 형제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파괴를, 입술은 고생을 말한다.

    그것이 내 속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나를 괴롭게 한다. 나의 마음이 상해 있는 만큼, 깨닫지 못해 회개하지 않은 만큼, 복수하려는 마음과 비뚤어진 입의 말들이 나가는 것이다.

    환난 날, 오만한 자의 지배를 당할 때 약해지는 이유는 나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할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묵상하는 것이다. 지혜와 명철로 집이 지어진다. 나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집이다. 그러니 내 안에 계신 지혜께서 그분의 집을 지으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오직 다시 일어나는 것뿐이다. 인내함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 회개하여 일어나고, 또다시 회개하여 일어나고를, 다시는 넘어지지 않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여호와의 성전의 기둥과 같은 존재가 되어져간다. 나의 목숨을 지키시는 여호와께서 각자의 행위대로 보상하신다.

    그러니 달려가자. 끝까지 인내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자. 주님이 도우시고 지키시고 붙들어 주신다. 아멘.

  • 총명을 구하고 온전하게 걷는 삶, 크리스천 실제 사례 – 잠언 2

    잠언 2:3-5,7 묵상글. 총명을 구하고 명철을 얻어 회개와 성숙을 경험하며, 천로역정 크리스천 사례로 실제 신앙 여정을 배우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잠언 2:3-5,7
    오직 총명을 위하여 부르짖고 명철을 위하여 네 소리를 높여 은처럼 그것을 구하고 숨겨 둔 보물처럼 그것을 찾으면 그때 네가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지식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바른 자들을 위하여 온전한 지혜를 쌓아 두셔서 완전하게 걸어가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니 (직역성경).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완전한 자는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인 욥도 여호와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다. 그러면 누가 바른 자들인가. 온전히 걷는 자들은 누구인가. 예를 들자면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 같은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의 시점은 일반적으로 지금에 고정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예수 믿고 구원 받았어도 아직 이러고 있잖아, 넘어지고 다시 회개하기를 반복하고 있잖아,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예수님은 나의 미래를 보신다. 지금의 모습에 연연하지 않으신다. 언젠가는 되어질 것 아닌가. 넘어지고 다시 울며 회개하여 일어서기를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죄악이 끊어진다. 반드시 끊어지게 되어 있다. 다시는 그 죄에 대해서 넘어지지 않을 때가 반드시 온다. 그러면 그때서야 회개가 된 것인가. 아니다. 그 과정 전체가 하나다.

    5살 기범이가 지금의 나를 막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를 반드시 예수님께로 데려갈 것이다. 그래서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돌파하여 이 땅에서의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 가는 것이다.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은 구원을 받았는가? 받았다. 언제 받았나? 좁은 길의 여정을 출발할 때 받았다. 그 길을 따라가다가 수도 없이 걸려 넘어져도 그는 바르고 완전하게 걸어가는 자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방패가 되신다. 5살 기범이도 성장하게 되어 있다. 반드시 성장한다.

    예수님께서 나는 어떻게 보실까? 동일하다. 끝에서 이기면 그가 승자이다. 경기도 전쟁도 다 똑같다. 50년째 죄에 지고 있어도 끝에 이기면, 그래서 다시 넘어지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가 승자이다. 마치 지금 나의 눈이 여자들에게서, 음녀에게서, 음란물에서 지켜지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안 보는 것이 아니다. 볼 수가 없다. 보고 싶어도 더러운 음란물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나의 눈이 그것에서 돌려진다. 더럽고 징그럽다. 나의 육체는 그것을 원하나 영은 두려워 떠는 것이다. 찰나의 생각조차도 용납되지 않는다. 바로 쳐내지는 것이다. 온전한 수동태이다. 그렇게 되어진다. 전에는 애쓰고 힘써도 끊을 수 없었던 그것이 지금은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되어진다. 할렐루야.

    이제는 5살 기범이와 함께 내 안의 큰 거역을 끊을 차례이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그것, 내가 큰 아이에게 물려준 그것, 그 거역을 끊어내겠다. 선악나무의 열매들을 걷어낼 차례이다. 거역이 끊어질 때 예하도 자신의 상처를 이기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한동안 잠잠하였지만 이제 다시 부르짖고 또 부르짖겠다.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하여 말이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아멘.

  • 지혜와 온유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 잠언 19장

    잠언 19을 묵상하며 지혜로운 삶과 온유한 마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방법을 나눕니다. 화를 참고, 명철과 훈계를 통해 삶에서 복을 발견하는 실제적인 깨달음.


    잠언 19장
    8 지혜로운 마음을 얻은 자는 그의 목숨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발견한다. 11 분별력 있는 사람은 화를 오래 참으니, 그의 영광은 범죄를 간과하는 것이다. 20 네 마지막이 지혜롭게 되기 위하여 조언을 듣고 훈계를 받아라. (직역 성경)

    지혜로우면 막 살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안 산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무엇이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지 생각하고 스스로 삼가며 자신의 입과 행동을 절제한다. 복을 얻으려고 명철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선물을 바라고 부모 앞에서 잘하는 아들은 아직 아이인 것이다.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늘 장난감이 문제 아닌가. 그것이 없는 곳에서는 어찌 그리 서로 행복하게 잘 노는가. 그러나 장난감이 있으면 그걸로 싸운다. 아이들은 또 다른 장난감 선물을 바라고 부모 앞에서 잘하려고 무지 노력한다. 그러나…

    장성하면 그런 것은 쳐다도 안 본다. 주님이 주는 선물보다도, 그분 자체가 좋은 것이다. 그냥 아빠가 좋은 것이다. 그분 앞에 자꾸 나의 얼굴을 보이고 싶을 뿐이다. 주님을 만나고, 사춘기가 지나가면, 그 아들은 알아서 자기 할 일을 한다. 문제는 부모, 즉 불의한 권위자이다.

    그러니 나도 나의 마지막을 주님 앞에서 더욱 지혜롭게 하기 위해, 오늘 지혜와 훈계를 받으려 하는 것이다. 화를 오래 참아 범죄를 간과하는 자가 되려 하는 것이다. 혈기와 분노로 충만한 나의 가문에서 모든 죄악의 통로들을 닫고, 온유한 자로서의 주님의 부르심을 이루기 위하여 오늘 나아갈 뿐이다. 모세를 넘어, 예수님처럼 온유한 자, 나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이다.

    “기범아,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그 부르심은 열방에 나가 선교사가 되라는 부르심이 아니었다. 그래, 그렇다. 만점아빠, 온유한 자로 서라는 주님의 초청이었다. 그러니 예수님, 도와주세요. 나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을 이루도록 도와주세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