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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언19 말씀묵상 – 조급함의 함정과 기다림의 축복

    잠언 19장은 조급함과 믿음 없는 서두름의 위험을 경고하고, 주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축복을 가르친다. (145자)

    잠언 19:2-3 (직역성경)
    “지식이 없는 사람도 좋지 않고, 발을 재촉하는 자는 죄짓는다. 사람의 우둔함이 자기 길을 치우치게 하고는 여호와께 그의 마음이 화를 낸다.”

    조급함의 위험 | 잠언19 말씀묵상

    잠언19의 말씀은 조급함의 위험을 경고한다. 조급함, 잠언19, 말씀묵상은 믿음의 결핍을 보여준다. 세상은 늘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재촉한다. 그러나 조급한 발걸음은 결국 함정으로 인도한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는다. 기도의 골방에서 기다릴 줄 안다.

    기다림의 믿음 | 믿음으로 응답을 기다리라

    잠언19의 교훈은 기다림 속에 믿음이 자란다는 것이다. 기도의 시간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응답을 기다릴 여유가 없기에 스스로 발을 재촉하고 사탄의 올무에 걸린다. 그러나 믿는 자는 다르다. 주님의 때를 신뢰하며, 과거의 인도하심을 기억한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길을 예비하신다.

    자녀양육과 인내 | 주님의 타이밍을 신뢰하라

    자녀에게도 조급함은 독이 된다. 부모의 과도한 푸시는 자녀를 망가뜨린다. 영적 문제는 인간의 말이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주님의 초자연적 사랑만이 개입하셔야 한다. 주님은 가장 좋은 타이밍을 재고 계신다. 그러므로 나는 재촉하지 않는다. 기다린다. 주님을 신뢰한다. 아멘.


    묵상 원본

    발을 재촉하는 자, 곧 조급하게 행하는 자이다. 어떤 상품을 팔거나 보험 등의 영업을 할 때,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 “마지막 혜택이 사라진다”와 같은 표현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유도하여 그 자리에서 계약하도록 만든다.

    조급하게 재촉하는 자가 혈기를 낸다. 조급한 자는 대체로 속도광이다. 상대방을 조정하는 무당의 영이 강할수록 조급하게 발을 재촉한다. 조급한 사람일수록 예수님 앞에서 기도의 시간을 내는 것을 어려워한다. “지금 일해서 돈 벌어야지. 더 열심히 일해야지.” 그렇지 않나.

    왜 조급하게 행동하는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기도해서 응답을 받을 여유가 없다. 그러니 자기 발을 재촉하여 사탄의 올무에 걸리는 것이다.

    나도 조급하다. 그러니 더욱 순종하여 골방에서 몇 시간이고 머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 많은 위기의 순간들에 주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보이지 않는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주님이 나의 앞길을 축복으로 바꾸시려고 어떻게 예비하셨는지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최소한 의식주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지금 조금 불편할 뿐이다. 자녀들도, 큰아이도 마찬가지다. 조급하게 푸시할수록 자녀들을 망가뜨릴 뿐이다.

    큰아이는 나하고 소울 타이가 되어 있다. 내가 아빠를 용서하지 못했던 모습 그대로 큰아이는 자기 아빠의 권위자를 향하는 것뿐이다. 그 아이는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이가 정말 용서해야 할 대상은 나, 즉 그 아이의 아빠이다.

    사람의 힘으로, 어떤 말로도 해결할 수 없다. 주께서 직접 개입하셔야 할 문제이다. 주님의 초자연적인 사랑이 개입하셔야 한다. 주님은 가장 좋은 타이밍을 재고 계신다. 나는 주님을 기다릴 것이다. 재촉하여 망치지 않을 것이다. 아멘.

  • 잠언 15장 4절 묵상 –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 말 한마디가 영혼을 살린다

    잠언 15장 4절 묵상은 온유한 혀가 생명나무임을 보여준다.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요, 패역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우리의 말은 영의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다. 생명을 살리는 말과 성결한 혀를 회복하는 길을 다루는 말씀 묵상.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이나 패역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잠언 15:4 (직역성경)

    잠언 15장 4절 묵상은 우리의 말이 얼마나 깊이 영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은 귀로만 듣지 않는다. 마음과 혼, 그리고 영으로도 듣는다.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영의 흐름이다. 왜곡된 말은 영을 상하게 하고, 온유한 말은 영을 살린다. 말의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힘이 존재한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왜곡된 생각이 영을 상하게 한다. 낙심과 두려움이 밀려올 때, 사탄은 거짓된 말들을 생각 속에 뿌린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영이 약해진다. 이는 참소의 말에 동의한 결과다.

    나 또한 무심코 왜곡된 말로 이웃의 영을 상하게 한 적이 있다. 입술을 통해 생명이 아닌 왜곡이 나간 것을 회개한다. 그리고 내 생각과 혀가 더 이상 대적의 통로가 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한다. 내 마음과 입술이 여호와 앞에서 정결하고 거룩하게 되기를 구한다.

    이 묵상을 통해 오늘 다시 선포한다. 나의 혀가 생명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말 한마디로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입술이 되게 하소서.

    주여, 내 생각과 말을 정결케 하소서. 사탄의 참소에 동의하지 않게 하시고, 온유한 혀로 생명의 말을 전하게 하소서. 내 입술을 통하여 영이 살아나게 하소서. 아멘.


    원 본

    잠언 15:4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이나 패역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직역성경)

    사람의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혼으로도 어떤 말과 생각을 듣는다. 패역한 혀, 곧 뒤틀리고 왜곡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말은 곧 영의 세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영의 현실이 말을 통해 전달되어진다. 그러니 사람의 영이 온유한 말을 들을 때 살아나고, 뒤틀리고 왜곡된 말로 인해 상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 특별히 누구로부터 어떤 입의 말을 듣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자신의 영을 상하게 할 때가 나는 있었다. 최근에도 그랬다. 즉 어떤 환경과 상황이 나의 영을 상하게 하였다. 영이 상하여 잠시 낙담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오늘 말씀을 읽으며 깨닫게 되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탄이 나의 생각과 귀에 뒤틀린 혀의 말들을 뿌린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받은 것이다. 즉 대적이 뿌린 참소의 혀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의한 것이다. 나의 영이 상함을 입었다면 이것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입이 비뚤어지고 왜곡된 말들의 통로가 되어 이웃에게 나갈 때도 있다. 이 시간 나도 모르는 사이 사탄의 참소하는 말에 동의한 것을 회개한다. 그리고 나의 입이 대적의 통로로 사용되어진 것들을 회개한다. 그리고 더욱 깨어 생각과 마음을 여호와 앞에서 성결할 것을 다시 선포하며 기도한다. 아멘.

  • 거만 뒤 따라오는 수치, 겸손이 부르는 지혜 – 잠언 11:2

    잠언 11:2 말씀과 나의 경험을 통해 거만과 수치, 겸손과 지혜를 깨닫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묵상. 본문 전체의 중심 말씀으로, 묵상과 경험의 배경을 안내한다.

    잠언 11:2 [직역성경] – “거만함이 들어올 때 수치가 들어오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지혜가 있다.”

    거만함과 수치

    잠언 11:2 [직역성경] 말씀처럼, 혈기를 부린 후 대부분 혼자 있고 싶었다. 집에서든 어디서든 화를 낸 뒤에는 씩씩거리며 담배 한 가치 물고 혼자 어딘가로 가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이게 바로 수치가 거만함을 따라오는 것이다.

    언쟁 후 성찰

    말씀처럼,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조근조근 입을 열었더라도 언쟁 후 숨고 싶다면 스스로 거만하다는 증거다. 누가 처음부터 지혜롭고 겸손하겠는가? 우리 모두 처음에는 거만했다. 나도 자녀, 아내, 아랫사람들에게 불완전한 권위자였다.

    겸손과 지혜의 길

    딸이 말했다. “아빠, 그때 나 14살이었어.” 나는 웃으며 갱년기 같다고 말했지만, 혈기 많은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그러하다. 입을 열고 난 후 수치심을 안다. 거만이 따른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지혜를 구한다. 잠언 11:2 [직역성경]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겸손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예수님을 신뢰하며 거만을 끊기 위해 오늘도 걸어간다. 아멘.


    원본

    나의 경험상, 혈기를 부린 후 대부분 혼자 있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는 말이다. 일을 하며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집에서든 어디서든 화를 낸 이후에는 대부분 씩씩거리며 담배 한가치 물고 혼자 어디론가 가더라. 이게 다 무엇인가. 바로 수치가 거만함을 따라 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꼭 큰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도, 잔잔히, 조근조근 입을 열었다 하여도 언쟁이 끝난 후에 혼자 어디론가 숨고 싶다면 이는 분명 본인이 거만하다는 증거임을 기억하자.

    그러나 어느 누가 처음부터 지혜롭겠는가. 누가 처음부터 성숙한 권위자이겠는가. 누가 처음부터 겸손하겠는가. 권위자의 상처가 나의 부모님만 해당되겠는가. 아니다. 학교, 상사, 영적 권위자 다 포함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처음에는 모두 거만하였다. 나도 자녀들에게, 아내에게, 그리고 나의 아랫사람들에게 똑같이 불의한 권위자이다. 그러니 할 말 있는가. 나의 딸이 “아빠 그때 나 이제 14살이었어” 라는 말을 잊을만 하면 한번씩 한다. 그 아이 14살때 나는 딸에게 어떤 아빠였는가. 불과 5년 전 나의 모습이다.

    딸이 내게 그러더라. 아빠 요즘 갱년기 같다고. 내가 웃었다. 갱년기는 홀몬의 변화 반응이지. 그 혈기 많고 소리 지르던 아빠의 요즘 모습이 딱 갱년기 증상이라는 것이다. 내가 아직 육십도 안 되었는대 무슨 갱년기인가. 그런데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 혈기 충만한 80세 여성도 나는 보았다. 우렁찬 목청으로 엄청 지르더라. 갱년기를 격는다고 혈기가 빠지나.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입이 열린 후의 수치심을 이제 나는 안다. 내가 거만하여 그것이 따라온것도 안다. 그 느낌이 싫다. 그래서 지혜를 더욱 구하는 것이다. 겸손하려고, 겸손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려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자 되어 거만, 곧 선악나무의 열매들을 끊기 위하여 지금도 걸어가는 것이다. 아멘. 예수님 도와주세요.

  • 지혜로운 아들과 오만한 자의 차이 – 잠언 13장

    잠언 13장을 중심으로 지혜로운 아들이 아버지의 훈계를 듣는 것과 오만한 자가 꾸지람을 듣지 않는 차이를 묵상합니다. 일상에서의 죄와 순종, 행동으로 증명하는 신앙을 다룹니다.

    잠언 13
    1 지혜로운 아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나 오만한 자는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 (직역성경).

    훈계를 듣고 바로 회개하여 고치는 것이 듣는 것이다. ‘그렇게 할게요’ 하고 하지 않으면 그것은 듣지 않은 것이다. 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죄를 짓게 하는 습관들, 무엇이 죄인가. 부부가 떨어져 있는 것이 죄이다. 애인과, 혹은 아내와 데이트 하면서 딴 여자에게 눈이 따라가는 것이 죄이다. 해봐라, 곧바로 이글거리는 분노의 질투를 느낄 때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나와 교제하기 원하시는데, 기도해야 하는데, 그것을 알고 느끼면서 유튜브 틀고 뉴스 보고 있으면 그것이 죄이다. 즉,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이 죄이다. 말만 하면서 행동이 따라가지 않아도 그것이 죄인 것이다. 그러니 아이에게 부모님 말씀에 바로 순종하도록 양육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즉각 순종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그러니, 내가 아이들에게, 가족에게, 이웃에게 할 말이 있을까. 없지. 나나 잘해야지. 그렇지. 이따금씩, 혼자 뉴스 틀고 있는 것이 주님께 죄송할 때가 있다. 그래서 이제는 나 혼자 안 보고, ‘예수님 내 옆에 계세요 같이 봐요’ 한다. 나쁜 걸 보는 게 아니니, 뭐 괜찮을까. 그러다 “이제 꺼라, 그만 봐라” 하시는 것 같은 감동을 받으면 최대한 바로 끄고 잔다. 아니면 기도한다. 이도 저도 아닐 때는 말씀을 읽는다. 말씀을 꼭 밥으로만 먹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간식으로도 먹을 수 있다. 영이 출출할 때 언제든지 말씀을 읽어요.

    뭐 이런 문제들은 괜찮다. 그러나 오만한 자는 어떻게 하는가. 왜 그래야 되요? ‘나는 그렇게 말고 다르게 하고 싶어요. 싫어요, 안 해요’ 하며 부모를 대적한다. 그리고 하지 말라 하는 것은 그렇게 한다. 결국은 손바닥이나 엉덩이에 맴매를 맞게 되는 것이 있다. 인내하며 타이르고 가르치는 것보다, 때로는 따끔한 맴매 몇 대가 더욱 효과적일 때도 있다.

    아이들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오늘 훈계를 받는다. 대부분 나에게서 배운 것들 아닌가. 그러니 어쩌겠나, 나부터 회개하고 끊고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주여, 살려주세요, 아멘.

  • 자녀 양육과 ‘부지런한 손’의 의미 – 잠언 10장

    잠언 10을 중심으로 자녀 양육과 신앙적 책임을 묵상합니다. 부지런함과 방임의 차이, 목자로서의 부모 역할, 실천적 신앙생활에 대한 고백과 적용을 쉽게 정리했습니다.

    잠언 10
    3-5 여호와께서 의인은 굶기지 않으시나 악인들의 탐욕은 밀어내신다. 게으른 손은 빈곤을 만드나 부지런한 손은 부유하게 한다. 여름에 모으는 자는 분별력이 있는 아들이나 추수 때 깊이 잠자는 자는 부끄러운 아들이다. (직역성경).

    자녀를 주님 손에 올려드리는 것과 방임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게으른 손과 부지런한 손의 차이는? 자기 밭에서 부지런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밭에서 모으고 추수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지런한 손이다. 그리고 여력이 있으면 남의 밭을 도와주는 것이다. 언제가 여름이고 추수 때는 어느 때인가. 그러니 남의 일에만 부지런한 것도 내가 보기엔 게으른 손이다. 정작 자기 해야 할 우선순위를 뒤로 미루었기 때문이다. 자녀를 주님 손에 올려드린 자는 아무 염려 없이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겠지만, 방종하는 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술로 인생을 탕진하는 어떤 가장처럼. 어쩌면 억지로 잡아끄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나는 나의 양들을 잘 보살폈는가. 과거를 돌아보면 그렇지 못했다. 분노로 이글거리며 나의 틀에 끼워 넣으려 하였었다. 사랑으로 하지 않았다. 나도 말로 인한 상처를 많이 받고 자라서인지, 가족들에게 말로 상처를 많이 주었었다. 내 것이라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하였었다.

    나도 장남이고, 내 딸도 장녀다. 그러니 내게 있던 그 많은 말의 상처들이 장녀에게로 다 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아이를 망치지 않으려고 주님 손에 올려드린 후에 나는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방임하고 있는가. 저녁에 어린 아이들과 놀아주지 않으면서 그들이 서로 싸운다고 뭐라고 하고 있으면, 그것은 아이들을 방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을 섬기며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배려하는 것을 알려주면서 그들의 마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아빠라면, 더욱이 그들이 내 자녀가 아니라 왕의 자녀들로 인식하며 그렇게 대우하고 있다면, 나는 그들을 방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손에 올려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저녁에 집 근처 놀이터로 나간다. 자기 입에서 “아빠 이제 집에 가요”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실컷 놀아준다. 그러면 나보고 만점아빠란다. 나는 전혀 누려보지 못한 삶이다. 사춘기 장녀에게도 비슷할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바운더리를 잘 쳐주어야지. 학생으로서의 신분을 잘 지키도록 해야지.

    나의 큰 아이에게도 고민이 있다. 둘째에게도 그렇다. 둘이 성향은 다르지만 그렇다. 그때에는 고민이 많을 때라고 그러고 말겠는가. 자기 뜻대로 하도록, 아니면 상황이 안 되니 그냥 체념하도록 두어야 하겠는가. 아빠의 뜻 밖으로 나갔으니 네 아픔에 나는 관심 없다 하겠는가. 자녀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나도 귀하게 여겨야 하고, 자녀가 아파하는 것에 나도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아빠에게 얘기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함께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구해보자고 그들의 마음을 공감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아이들이 내게 툭툭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나도 예수님처럼 선한 목자라면, 그들의 고민을 듣고 흘려버리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기도라도 할 것이다. 왕의 자녀로 든든히 서도록, 마지막 때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기도부터 해야 할 것이다.

    내게 맡겨주신 자녀들이 나의 양떼라면 그들은 주님의 양떼이기도 할까. 저 아이는 내게 순종하지 않으니 내 양이 아니야 하실까. 전에 나는 큰 아이를 그렇게 대했다. 그랬더니 자신이 쓰레기인 줄 알더라. 아빠에게 버림받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더라. 얼마나 많이 회개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가. 순종은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 가치를 깨닫고 스스로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그 아이는 보석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 이제는 그 아이 자신도 인정한다. 정말 감사하다. 그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받을 수 있는 말만 전했다. 오래 걸렸다. 학교 다닐 때도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지만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어쩌겠나. 나도 몇 달, 몇 년을 기다려 한마디 건낸다. 그러나 아직도 어렵다. 방임인지 주께 올려드린 것인지.

    내게 지금까지 어린 아이들을 양육하도록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어린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길에서 처음 보는 아기들도 나를 보고 웃는다. 왜 그들은 주일마다 내게 와서 놀이터 언제 가냐고 삼촌만 쳐다보고 있나. 자기 아빠도 있는데 말이다. 무엇이 부지런한 손인가. 여름은 언제인가. 바로 지금이다. 아이들이 내게 모이는 이때, 내가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베풀 수 있는 이때, 지금이 나의 여름이다. 주께서 내게 허락해주신 작은 행복이고 선물이다. 나의 자녀가 아니어도, 내게 순종치 않아도 괜찮다. 무리 중에 도망가는 양을 위해 목자는 찾아 나선다. 다른 무리들을 뒤로 하고서라도 말이다. 어쩌면 나의 양들이 아니라 나의 주님, 왕의 양떼들이다. 그들이 내게로 올 때 나는 무엇을 하겠는가. 나는 그저 예수님처럼 왕의 양떼를 치는 선한 목자이고 싶을 뿐이다. 그 길을 배워가는 중이다. 아멘.

  • 잠언 29장 11절: 화를 다스리고 영을 가라앉히는 지혜

    잠언 29:11을 통해 화를 내는 순간과 지혜로운 마음의 차이를 배우고, 속사람의 회복과 영적 성장을 경험하는 방법을 알아봅니다.

    잠언 29
    1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모든 영을 나오게 하나, 지혜로운 자는 뒤로 가라앉힌다. (직역성경).

    화가 납니까? 네, 화가 납니다. 왜 화가 납니까? 이래저래서 화가 납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가, 화를 내고 있는가. 씩씩거렸는가, 콧김이 나오나. 당신은 또 졌다. 뭐, 내 얘기인 것이다. 나는 가끔씩 진다. 그래도 얼른 회개한다. 그러나 비슷한 영역에서 자꾸 지다 보면 맷집이 쌓인다. 이거 은근히 중요하다. 맷집 없으면 한 방에 나가떨어지거든. 그런데 맷집 있으면 버틸 수는 있다. 속은 뒤집어져도 입이 전처럼 안 열리거든. 일단 버티기라도 해야 나중에 돌파를 하든 할 것 아닌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면 이길 재간이 없다. 내 모든 영을 확 다 쏟아붓고는 뻗어버린다. 그러나 스무 대를 버틸 수 있으면, 그 사이에 한 방을 노릴 틈이 보이는 것이다.

    맞고 있는 줄도 모르면 어렵겠지만, 그것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어디에서 어떻게 뚫리는지도 관찰하고 있다면 대적이 공격하는 패턴도 곧 읽히게 된다. 그 틈을 타서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나의 영을 나오게 하는 영역이 있다. 왜 그 부분에서 나의 모든 영을 나오게 하는지 관찰하고 또 관찰한다. 요즘은 모두는 아니다, 아주 일부분의 영만 나오게 한다. 묻고 또 묻다 보면, 동시에 회개하고, 또 넘어지면 또 회개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주께서 치유해 주시는 영역이 있다. 그럼 내가 승리한 것이다. 일단은. 이제는 뇌와 신경을 타고 반사적으로 흐르는 회로를 다시 그려야 한다. 뒤로 가라앉히는 회로를 신경줄기에 새겨야지.

    특별히 주일예배는 나의 속사람이 치유받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난 주일에는 주님께서 나의 발을 씻겨 주셨다. “기범아, 너도 해야지” 하시면서 말이다. 미치는 줄 알았다. 그만 씻기시라고요. 완전히 내게 입 틀막을 하신 것이다. 오늘은 손가락으로 나의 이마를 톡톡 치시는 것 같았다. 행복했다. 주님은 나를 온유한 자로 만들어 가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