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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명을 구하고 온전하게 걷는 삶, 크리스천 실제 사례 – 잠언 2

    잠언 2:3-5,7 묵상글. 총명을 구하고 명철을 얻어 회개와 성숙을 경험하며, 천로역정 크리스천 사례로 실제 신앙 여정을 배우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잠언 2:3-5,7
    오직 총명을 위하여 부르짖고 명철을 위하여 네 소리를 높여 은처럼 그것을 구하고 숨겨 둔 보물처럼 그것을 찾으면 그때 네가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지식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바른 자들을 위하여 온전한 지혜를 쌓아 두셔서 완전하게 걸어가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니 (직역성경).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완전한 자는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인 욥도 여호와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다. 그러면 누가 바른 자들인가. 온전히 걷는 자들은 누구인가. 예를 들자면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 같은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의 시점은 일반적으로 지금에 고정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예수 믿고 구원 받았어도 아직 이러고 있잖아, 넘어지고 다시 회개하기를 반복하고 있잖아,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예수님은 나의 미래를 보신다. 지금의 모습에 연연하지 않으신다. 언젠가는 되어질 것 아닌가. 넘어지고 다시 울며 회개하여 일어서기를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죄악이 끊어진다. 반드시 끊어지게 되어 있다. 다시는 그 죄에 대해서 넘어지지 않을 때가 반드시 온다. 그러면 그때서야 회개가 된 것인가. 아니다. 그 과정 전체가 하나다.

    5살 기범이가 지금의 나를 막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를 반드시 예수님께로 데려갈 것이다. 그래서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돌파하여 이 땅에서의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 가는 것이다.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은 구원을 받았는가? 받았다. 언제 받았나? 좁은 길의 여정을 출발할 때 받았다. 그 길을 따라가다가 수도 없이 걸려 넘어져도 그는 바르고 완전하게 걸어가는 자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방패가 되신다. 5살 기범이도 성장하게 되어 있다. 반드시 성장한다.

    예수님께서 나는 어떻게 보실까? 동일하다. 끝에서 이기면 그가 승자이다. 경기도 전쟁도 다 똑같다. 50년째 죄에 지고 있어도 끝에 이기면, 그래서 다시 넘어지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가 승자이다. 마치 지금 나의 눈이 여자들에게서, 음녀에게서, 음란물에서 지켜지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안 보는 것이 아니다. 볼 수가 없다. 보고 싶어도 더러운 음란물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나의 눈이 그것에서 돌려진다. 더럽고 징그럽다. 나의 육체는 그것을 원하나 영은 두려워 떠는 것이다. 찰나의 생각조차도 용납되지 않는다. 바로 쳐내지는 것이다. 온전한 수동태이다. 그렇게 되어진다. 전에는 애쓰고 힘써도 끊을 수 없었던 그것이 지금은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되어진다. 할렐루야.

    이제는 5살 기범이와 함께 내 안의 큰 거역을 끊을 차례이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그것, 내가 큰 아이에게 물려준 그것, 그 거역을 끊어내겠다. 선악나무의 열매들을 걷어낼 차례이다. 거역이 끊어질 때 예하도 자신의 상처를 이기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한동안 잠잠하였지만 이제 다시 부르짖고 또 부르짖겠다.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하여 말이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아멘.

  • 지혜와 온유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 잠언 19장

    잠언 19을 묵상하며 지혜로운 삶과 온유한 마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방법을 나눕니다. 화를 참고, 명철과 훈계를 통해 삶에서 복을 발견하는 실제적인 깨달음.


    잠언 19장
    8 지혜로운 마음을 얻은 자는 그의 목숨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발견한다. 11 분별력 있는 사람은 화를 오래 참으니, 그의 영광은 범죄를 간과하는 것이다. 20 네 마지막이 지혜롭게 되기 위하여 조언을 듣고 훈계를 받아라. (직역 성경)

    지혜로우면 막 살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안 산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무엇이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지 생각하고 스스로 삼가며 자신의 입과 행동을 절제한다. 복을 얻으려고 명철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선물을 바라고 부모 앞에서 잘하는 아들은 아직 아이인 것이다.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늘 장난감이 문제 아닌가. 그것이 없는 곳에서는 어찌 그리 서로 행복하게 잘 노는가. 그러나 장난감이 있으면 그걸로 싸운다. 아이들은 또 다른 장난감 선물을 바라고 부모 앞에서 잘하려고 무지 노력한다. 그러나…

    장성하면 그런 것은 쳐다도 안 본다. 주님이 주는 선물보다도, 그분 자체가 좋은 것이다. 그냥 아빠가 좋은 것이다. 그분 앞에 자꾸 나의 얼굴을 보이고 싶을 뿐이다. 주님을 만나고, 사춘기가 지나가면, 그 아들은 알아서 자기 할 일을 한다. 문제는 부모, 즉 불의한 권위자이다.

    그러니 나도 나의 마지막을 주님 앞에서 더욱 지혜롭게 하기 위해, 오늘 지혜와 훈계를 받으려 하는 것이다. 화를 오래 참아 범죄를 간과하는 자가 되려 하는 것이다. 혈기와 분노로 충만한 나의 가문에서 모든 죄악의 통로들을 닫고, 온유한 자로서의 주님의 부르심을 이루기 위하여 오늘 나아갈 뿐이다. 모세를 넘어, 예수님처럼 온유한 자, 나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이다.

    “기범아,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그 부르심은 열방에 나가 선교사가 되라는 부르심이 아니었다. 그래, 그렇다. 만점아빠, 온유한 자로 서라는 주님의 초청이었다. 그러니 예수님, 도와주세요. 나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을 이루도록 도와주세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