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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언 5장 묵상: 음녀의 길 안전하게 피하는 방법

    잠언 5장 6-8절을 통해 음녀의 길이 얼마나 위험하며, 예수님의 순종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묵상합니다. 오늘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지혜와 놀라운 깨달음을 함께 나눕니다.

    “Lest thou shouldest ponder the path of life, her ways are moveable, that thou canst not know them. Hear me now therefore, O ye children, and depart not from the words of my mouth. Remove thy way far from her, and come not nigh the door of her house.” (Pro 5:6-8, KJV)

    음녀의 길의 위험

    오늘 잠언 5장 6-8절을 들여다보면, 음녀의 길이 움직이므로 우리는 그 길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에도 길이 변할 수 있어, 잘못된 발걸음은 끝없는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그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퍼즐처럼 비밀을 아는 자만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 길을 걸으셨고, 완전한 순종으로 안전한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걸으신 길만 따라가면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에서 떠나지 않으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입니다.

    반복과 회복

    하지만 이 길은 쉽지 않습니다. 훈계와 책망이 따라오고, 우리는 넘어지고 회개하며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반복 속에서 음녀의 길을 멀리하고 그녀 집 문에 가까이 가지 않는 삶을 배워갑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결국 안전하게 그 길을 지나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적용해 보세요. 아멘.


    묵상 원본

    오늘 이 잠언의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음녀의 길이 움직인다. 그래서 너는 그것들, 음녀의 길을 알 수가 없다. 딱 이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피하나? 나의 한 걸음을 바닥에 놓는 그때에 음녀의 길이 나의 발밑으로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올무 아닐까?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디디는 순간 땅이 꺼져 끝없이 떨어지는 그런 길. 퍼즐, 즉 비밀을 아는 자만 꺼지지 않는 정확한 지점을 밟아 그 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누가 먼저 앞장서겠는가?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가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셨다. 그러니 그분이 밟고 가셨던 그 자리만 밟으면 된다. 예수님만 그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쉽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입의 말들을 듣고 행하며 그 말씀으로부터 떠나지 않는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어렵다. 그러니 훈계와 책망이 따라온다. 듣고 회개하면 주께서 다시 회복하여 주신다. 잘못 발을 디뎌 떨어지기 직전의 상황으로 되돌려 주신다. 이제 다시 예수님만 따라가면 된다. 넘어지고 회개하고, 또다시 넘어지고 회개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음녀의 길을 멀리하고 그녀 집 문에 가까이 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길 끝까지 다 가 있을 것이다. 아멘.

  • 잠언 21:2 묵상 – 여호와께서 마음을 달아보신다

    잠언 21:2 말씀 묵상. 사람은 자기 길이 옳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진심과 동기를 보신다. 삶의 서투름 속에서도 하나님은 교훈과 회개의 길로 인도하시며, 중심을 중요시하시는 주님의 시선을 묵상한다. 오늘의 삶에서 존중과 사랑을 실천하며 마음을 점검하는 도전과 울림을 제공한다.

    “각 사람의 모든 길이 자기 눈에는 바른 듯하나 여호와께서 마음들을 달아보신다.” (잠언 21:2, 직역성경)

    마음 중심을 보는 하나님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믿지만 하나님은 겉보다 마음을 보신다. 인간은 미숙하고 불완전하며, 권위자조차 완전하지 않다. 하나님은 결과보다 마음의 방향을 달아보신다. 마치 어린아이가 넘어지면서도 손길과 사랑을 배우듯,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선한 마음을 보신다.

    삶에서 배우는 교훈

    나의 인생도 그렇다. 대인관계에 서툴고 표현이 부족했지만 마음까지 거짓된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고 싶었으나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런 나의 중심을 아신다. 아이들이 나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배움을 주고,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는 순간, 나는 겸손과 존중을 새롭게 배운다. 이러한 경험은 독자들에게도 삶의 교훈과 공감을 남길 것이다.

    연약함 속에서도 회복을 원하시는 하나님

    중독이나 습관 같은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정죄보다 회복을 원하신다. 선한 마음을 가진 자는 넘어져도 괴로워하며 다시 일어나려 한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달아보시고 고치시며 새롭게 하신다. 이는 마치 불완전한 도자기를 조심스럽게 빚어 완전하게 만드시는 장인처럼, 우리의 마음을 다루시는 섬세한 손길을 보여준다.

    가정을 통한 배움과 겸손

    가정 안에서도 배움이 있다. 아내를 통해, 자녀를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보고 교만을 버린다. 존중과 사랑을 배우며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곧아진다. 오늘도 나는 결심한다. 존중과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마음을 따라 살아가겠다고. 이 결단을 마음에 새기고 매일 실천하며, 독자도 자신의 삶에서 동일한 결단을 실천하도록 도전받기를 바란다. 이 결단이 반복될 때, 삶 속에 깊은 울림으로 남게 될 것이다.


    묵상 원본

    왜 여호와께서 마음들을 달아보실까. 사람은 미련하고 미숙하기 때문이다. 모든 권위자가 다 불의하기 때문이다. 나의 자녀들만 해도 나와 아내보다는 더 좋은 환경에서 조금 더 나은 권위자 아래에서 성장하지 않는가. 그러니 자녀들이 나보다 모든 면에서 탁월한 것이다. 나처럼 대인관계가 서투른 사람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그 부분에서는 아이들이 나의 선생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사람이 하는 어떤 일들의 결과물을 보시지 않는다. 그 마음들을 보시는 것이다. 나처럼 서투르고 모난 곳이 많은 사람은 정말 모르니 그게 최선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선생님들에게 많이 맞았고, 악명 높은 배문중고등학교에서는 왜 맞는지 이유도 모르고 맞았고, 시험 점수 떨어졌다고 맞았고, 숙제 놓고 와서 맞았고, 쳐다본다고 맞았고, 출석부로 얼굴도 맞고, 허구한 날 단체 기합에, 이래저래 맞았고, 주일에 교회 간다고 맞았고, 기계공으로, 그다음 군대, 거반 30살까지 남자들만 득실대는 세상에서 살면서 매 맞고, 수근거림당하고, 뭐 그랬다. 그때는 다 그리 살았다. 당연한 건 줄 여기고 살았다. 그러니 어찌 알겠는가.

    나도 존중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나의 마음이 여호와 앞에서 굽어졌는가. 악한 마음으로 그리 하였는가. 아닐 것이다. 인간관계하는 법을 모르니, 표현하는 법을 모르니,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하니,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했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닐 뿐이다. 그렇다고 나의 마음까지 거짓된 것은 아니다.

    몰라도 괜찮다. 배우면 된다. 잘못을 깨달으면 회개하면 된다. 그러나 마음의 근본 동기는 어떻게 하겠는가. 예를 들어 습관적인 중독이 있다고 하자. 마음이 선한 자는 그것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끌려간다. 좋아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안 되는 것 알면서도 끌려간다. 나도 아직 끊어야 할 그리 좋지 않은 습관들이 있다. 버럭하는 것, 조급한 것, 가끔 뉴스 보는 것 등.

    그러면 그들의 마음도 악한 것인가. 아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마음들을 달아보신다고 생각한다. 달아보시고 도와주시려고, 고쳐주시려고, 구원하시려고, 새롭게 하시려고, 알려주시려고, 새 힘 주시려고, 존중하고 섬기는 사람 되라고, 사랑을 배우게 하시려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시려고, 기쁘게 받고, 자기 짐을 나누어 지는 방법을 알게 하시려고, 붙들고 있는 우상을 놓을 수 있게 하시려고 등등…

    우리 집의 아내는 나의 도움이요, 큰아이들은 나의 선생들이고, 어린아이들은 나의 과거를 비추는 거울들이다. 아직도 나는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내가 전에는 알지도 못했고 깨닫지도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고 회개하면서 이제서야 하나하나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교만하겠는가.

    어제도 하나 배웠다. 아빠, 잘해주려고만 하지 말고 존중해주려고 해보세요. 그래서 그걸 해보려고 한다. 여호와께서 오늘 나의 마음 달아보시고 기뻐하신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아멘.

  • 총명을 구하고 온전하게 걷는 삶, 크리스천 실제 사례 – 잠언 2

    잠언 2:3-5,7 묵상글. 총명을 구하고 명철을 얻어 회개와 성숙을 경험하며, 천로역정 크리스천 사례로 실제 신앙 여정을 배우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잠언 2:3-5,7
    오직 총명을 위하여 부르짖고 명철을 위하여 네 소리를 높여 은처럼 그것을 구하고 숨겨 둔 보물처럼 그것을 찾으면 그때 네가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지식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바른 자들을 위하여 온전한 지혜를 쌓아 두셔서 완전하게 걸어가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니 (직역성경).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완전한 자는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인 욥도 여호와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다. 그러면 누가 바른 자들인가. 온전히 걷는 자들은 누구인가. 예를 들자면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 같은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의 시점은 일반적으로 지금에 고정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예수 믿고 구원 받았어도 아직 이러고 있잖아, 넘어지고 다시 회개하기를 반복하고 있잖아,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예수님은 나의 미래를 보신다. 지금의 모습에 연연하지 않으신다. 언젠가는 되어질 것 아닌가. 넘어지고 다시 울며 회개하여 일어서기를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죄악이 끊어진다. 반드시 끊어지게 되어 있다. 다시는 그 죄에 대해서 넘어지지 않을 때가 반드시 온다. 그러면 그때서야 회개가 된 것인가. 아니다. 그 과정 전체가 하나다.

    5살 기범이가 지금의 나를 막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를 반드시 예수님께로 데려갈 것이다. 그래서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돌파하여 이 땅에서의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 가는 것이다.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은 구원을 받았는가? 받았다. 언제 받았나? 좁은 길의 여정을 출발할 때 받았다. 그 길을 따라가다가 수도 없이 걸려 넘어져도 그는 바르고 완전하게 걸어가는 자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방패가 되신다. 5살 기범이도 성장하게 되어 있다. 반드시 성장한다.

    예수님께서 나는 어떻게 보실까? 동일하다. 끝에서 이기면 그가 승자이다. 경기도 전쟁도 다 똑같다. 50년째 죄에 지고 있어도 끝에 이기면, 그래서 다시 넘어지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가 승자이다. 마치 지금 나의 눈이 여자들에게서, 음녀에게서, 음란물에서 지켜지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안 보는 것이 아니다. 볼 수가 없다. 보고 싶어도 더러운 음란물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나의 눈이 그것에서 돌려진다. 더럽고 징그럽다. 나의 육체는 그것을 원하나 영은 두려워 떠는 것이다. 찰나의 생각조차도 용납되지 않는다. 바로 쳐내지는 것이다. 온전한 수동태이다. 그렇게 되어진다. 전에는 애쓰고 힘써도 끊을 수 없었던 그것이 지금은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되어진다. 할렐루야.

    이제는 5살 기범이와 함께 내 안의 큰 거역을 끊을 차례이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그것, 내가 큰 아이에게 물려준 그것, 그 거역을 끊어내겠다. 선악나무의 열매들을 걷어낼 차례이다. 거역이 끊어질 때 예하도 자신의 상처를 이기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한동안 잠잠하였지만 이제 다시 부르짖고 또 부르짖겠다.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하여 말이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아멘.

  • 잠언 30장의 지혜: 매일 필요한 빵과 감사의 삶

    잠언 30장 말씀을 통해 매일 필요한 양식, 감사의 태도, 풍족함 속에서 잊기 쉬운 진정한 만족을 묵상합니다.

    잠언 30
    7-8 두 가지 일을 제가 당신께 요청하니 제가 죽기 전에 제게서 막지 마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게 하시고 빈곤과 부를 제게 주지 마시며 매일 필요한 빵을 저로 먹게 하십시오. (직역성경).

    한 달 먹을 음식이 냉장고에 있다 하여도, 오늘 먹을 수 있는 양은 정해져 있다. 오히려 요즘처럼 풍족한 시대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입에 안 맞아서 그게 더 문제인 경우가 많다. 어떤 아이는 입맛이 까다로워서 배가 고프다고 난리를 치면서, 옆에 밥이 있는데도 싱겁다고 안 먹고 있다. 옆에 있는 다른 아이는 똑같은 그 밥을 맛있게 먹고 간식까지 다 먹고는 행복하게 잔다. 나는 입맛이 무뎌서 그런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웬만하면 나는 다 맛있게 먹거든.

    주께서 오늘 필요한 빵을 안 주셨는가. 아니면 만나 말고 고기 하는 건가. 내 입맛에 맞는 것들을 오늘 다 갖추어야 하는 건가. 오늘 정직하면 되는 것이다. 빈곤하지도 않고 차고 넘치도록 풍족하지도 않아서 주님을 모른다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오늘 필요한 양식으로 감사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매일 필요한 빵이 단지 먹는 것인가. 아니다, 오늘 필요한 모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오늘 주님의 말씀을 먹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되 처음 주님을 사랑할 때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다. 고기 아니면 어때, 조금 싱거우면 어때, 배고프면 다 맛있다. 입에 안 맞는 게 아니라 풍족해서 그런 것이다. 아침에 눈만 뜨면 그냥 만나가 지천에 깔려 있으니 그런 거다. 당연한 것이라 여겨지니 감사가 안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눈을 뜨고 숨을 쉬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먹을 것과 입을 것, 잠자는 곳이 당연한 건가. 아니다. 내 목숨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숨 쉬는 공기마저도 결코 당연하지 않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이 모든 것을 날마다 선물로 받는 것이다. 마치 아침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처럼. 주님, 내게도 매일 필요한 빵을 먹게 하십시오. 아멘.

  • 잠언 25: 지혜의 꿀처럼 조금씩 깨닫는 삶의 교훈

    잠언 25장을 통해 배우는 지혜와 삶의 교훈. 꿀처럼 달콤하지만 한 번에 다 먹을 수 없는 지혜, 원수에게 선을 행하는 의미, 잠언 묵상의 중요성을 풀어봅니다.

    잠언 25
    16 꿀을 네가 발견했으면, 필요한 만큼만 먹어서 네가 그것으로 배를 불려 토해내지 않게 하여라. 21 너를 미워하는 자가 굶주리면, 그에게 빵을 먹이고 그가 목마르면, 그에게 물을 마시게 하여라. (직역성경)

    맛있는 꿀 한 통을 다 먹는 방법은, 조금씩 필요한 만큼만 먹는 것이다. 지혜의 말씀도 이와 같아서 한 번에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주님이 오늘 말씀하시는 것도 하나, 딱 하나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어느 하나에 몰입하도록 만드셨다. 결코 멀티가 아니다.

    어느 날 잠언 묵상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평생의 좋은 습관으로 만들기에 이만한 것이 없어 보인다. 주님의 모든 말씀이 다 그렇지만, 특히 잠언은 파도 파도 끝없이 솟아 흐르는 샘물 같다. 내가 잠언에서 취하고 있는 부분은 아직도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아직 접근도 할 수 없는 말씀들이 왜 그리 많은지, 그리고 하나하나 깨달아 갈 때마다 그렇게 내 영혼에 달고 귀한지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평생 먹어도 다 먹을 수 없는 꿀 한 통이 있다면, 지혜 중의 지혜, 성경 중에서도 바로 잠언의 말씀이라 생각한다.

    나는 21절의 말씀이 늘 어렵다. 원수에게 선을 행하는데, 이것이 원수의 머리에 숫불을 쌓는 것이란다. 여호와께서 보답하신단다. 이 원수가 사탄도 아니고, 나의 가족이고 친구일진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어려웠다. 그러나 고대 근동의 문화에서 상대의 머리에 숫불을 쌓는 것은 곧 그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이라 하더라. 그래서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게 된단다. 그렇게 되려면 도대체 원수에게 얼마나 선을 행해야 하나? 그러나 나는 원수가 없다.

    요셉에게는 형들, 다윗에게는 사울, 예수님께는 유다? 아니야, 예수님은 그를 끝까지 “친구여” 하셨다. 내게는 그만한 원수가 없다. 과거에는 있었지만, 더 이상 그들은 나의 원수가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다른 원수감들이 내 앞에 나타나게 될까? 아하! 나를 미워하는 할머니가 딱 한 사람 있기는 하다. 불쌍한 여인이 있다. 생각해보니 그 할머니에게 선을 행해 본 적은 없네. 피하려고만 하였지. 근데 그 할머니 잘 먹고 잘 산다. 굳이 선을 행해야 하나? 고민 좀 해봐야겠다. 예수님, 어떻게 하죠? 도와주실래요? 아멘.

  • 거만과 수치, 그리고 겸손이 주는 지혜 – 잠언 11장

    거만과 수치, 그리고 겸손이 주는 지혜 – 잠언 11장

    잠언 11:2 말씀을 통해 ‘거만함이 수치를 불러오고, 겸손이 지혜를 가져온다’는 영적 원리를 묵상합니다. 가인의 선택과 우리의 일상 속 반응을 연결하며, 수치에서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나눕니다.

    잠언 11:2
    거만함이 들어올 때 수치가 들어오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지혜가 있다. (직역성경)


    오늘은 수치에 관한 메타인지를 하는 날이다. 수치는 거만할 때 들어온다. 예를 들면 아이들에게 버럭 할 때조차도 수치가 들어온다. 그러니 내게는 쌓여 있는 수치가 그만치 많은 것이다. 가장의, 어른의 뜻에 따르지 않는 아이에게 분노가 올라올 때, 왜 씩씩거리나. 그 이면에 있는 것이 두려움과 수치이다.

    가인은 자기의 수치를 해결하려고 그의 근원을 제거(살인)하는 쪽을 택하였다. 오늘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부모를, 권위자를, 자녀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없으니 미워하며 자신을 죽이는 쪽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게 모두 죄의 열매, 즉 선악과의 열매 아닌가. 거만하여 두려움과 수치가 따라오니 다른 사람에게 버럭하며 분을 내는 것이다.

    거만할 때 수치가 들어오지, 혈기를 내야 수치가 오는 것이 아니다. 입을 다물어도, 입술을 지켜도 그 전에 교만하면 수치는 그냥 들어온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할까. 회개해야지. 나의 상처를 계속 내어드려야지. 성령이 만지실 때, 수술하실 때 고통스러워 구르면, 그분은 잠깐 하시고 멈추시는 것 같았다. 그때에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은 여기까지만 하시나 보다 할 것인가, 나 괜찮으니 계속 하시라고, 통째로 다 가져가시라고 힘써 그분의 손을 끌어당기겠는가.


    예수님, 도와주세요, 오늘 나의 상한 심령을 다 가져가 주세요. 나를 긍휼히 여겨 주세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