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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언 24장 묵상: 오만을 버리고 회개로 일어서라

    잠언 24장 성경묵상으로 오만을 버리고 회개와 인내로 다시 일어서라. 잠언 24장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지혜와 명철로 세워지는 성전의 삶을 묵상하며 실천하자.

    잠언 24:9-10
    “우둔한 자의 간계는 죄며 오만한 자는 사람에게 가증하다. 네가 환난 날에 약해지는 것은 네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직역성경)

    오만은 하늘과 땅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사탄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천사들의 1/3을 꾀었다. 오만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모를 거역하며 형제를 원수로 만든다. 오만한 마음은 파괴를 낳고, 입술은 고생을 말한다. 오만은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오만을 깨닫는 순간이 회개의 시작이다. 내 속의 오만함은 여전히 나를 괴롭게 하지만, 회개할 때마다 마음이 새롭게 된다. 마음이 상한 만큼 회개하지 못하면, 복수심과 비뚤어진 말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진실한 회개는 내 안의 성전을 다시 세운다.

    환난 날에 약해지는 이유는 내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지혜와 명철로 집이 세워지고, 나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내 안의 지혜께서 그분의 집을 짓도록 맡겨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인내로 구원을 이루고, 회개로 믿음을 지켜야 한다.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고, 주님의 은혜로 굳건히 서야 한다. 각 단락의 시작부터 ‘오만’, ‘회개’, ‘인내’ 키워드를 반복 강조하며 메시지를 강화한다. 그렇게 할 때 여호와의 성전의 기둥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 믿음과 구원의 길은 인내로 완성된다.

    나의 목숨을 지키시는 여호와께서 각자의 행위대로 보상하신다. 그러니 달려가자. 끝까지 인내하며 여호와를 경외하자. 주님이 도우시고 지키시며 붙들어 주신다. 아멘.


    묵상 원본

    오만함은 하늘과 땅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사탄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천사들의 1/3을 꾀어냈다. 오만하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모를 거역하며 스스로 형제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파괴를, 입술은 고생을 말한다.

    그것이 내 속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나를 괴롭게 한다. 나의 마음이 상해 있는 만큼, 깨닫지 못해 회개하지 않은 만큼, 복수하려는 마음과 비뚤어진 입의 말들이 나가는 것이다.

    환난 날, 오만한 자의 지배를 당할 때 약해지는 이유는 나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할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묵상하는 것이다. 지혜와 명철로 집이 지어진다. 나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집이다. 그러니 내 안에 계신 지혜께서 그분의 집을 지으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오직 다시 일어나는 것뿐이다. 인내함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 회개하여 일어나고, 또다시 회개하여 일어나고를, 다시는 넘어지지 않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여호와의 성전의 기둥과 같은 존재가 되어져간다. 나의 목숨을 지키시는 여호와께서 각자의 행위대로 보상하신다.

    그러니 달려가자. 끝까지 인내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자. 주님이 도우시고 지키시고 붙들어 주신다. 아멘.

  • 지혜의 꿀과 음녀의 꿀, 분별하기 – 잠언 5장

    잠언 5:1-4을 통해 ‘지혜의 꿀’과 ‘음녀의 꿀’을 분별하는 길을 묵상합니다.
    겉보기에는 비슷하지만 열매가 다릅니다. 지혜에 경청하고 명철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이 오늘 나를 인도하심을 느낍니다.

    잠언 5:1-4 (직역)
    내 아들아, 내 지혜에 경청하고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판단력을 유지하고 네 입술의 지식을 지켜라.
    참으로 부도덕한 여자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녀의 혀는 기름보다 매끄러우나 그녀의 마지막은 쑥처럼 쓰고 양날 선 칼처럼 날카롭다.

    지혜의 꿀과 음녀의 꿀

    잠언 5장은 지혜와 음녀의 입술을 대조하며, 겉보기에는 꿀처럼 달지만 결국 쑥처럼 쓰디쓴 결과를 경고합니다.
    오늘 말씀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지혜에 경청하고 명철에 귀 기울이는 삶을 요구합니다.

    지혜의 꿀과 음녀의 꿀은 처음엔 구분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 지혜: 생명을 낳습니다.
    • 음녀: 멸망을 낳습니다.

    분별하는 삶과 명철

    나는 매일 잠언을 묵상하며 그날의 ‘네비게이션’을 받습니다.
    아직 가지 않은 길의 지도, 예수님께서 오늘 나를 이끌어 가실 방향입니다.
    때로는 음녀의 속임을 분별하지 못하고 아픔으로 배우기도 하지만,
    현실 속에서 분별력과 명철을 몸소 익혀 갑니다.

    오늘의 네비게이션: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은 병자를 위해 오십니다.
    상처받은 자, 저주 속에서 몸부림치는 자,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은 자에게 오십니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셔야만 하는 자리입니다.

    오늘도 나는 그분의 말씀을 네비게이션 삼아 나아갑니다.
    “예수님, 당신이 곧 말씀이시죠. 이제 어떻게 하실래요?”


    원본 묵상 글

    무엇으로 음녀의 속임을 간파하는가. 지혜가 내 혀에 꿀과 같은데, 음녀의 입술도 꿀을 떨어뜨린다. 다른 것이 있다면 열매이다. 열매가 다르다. 그러나 그 처음은 너무도 비슷하여 무엇이 음녀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지혜처럼, 내 혀의 꿀처럼 위장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서는 경청하라고 한다. 지혜에 경청하라. 명철에 귀를 기울이라. 이는 단순히 말씀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적으로 깨달으라는 말은 더욱 아니다. 나는 매일 아침 지식으로 공부한 잠언을 묵상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하나도 기록하지 않는다. 매일의 잠언을 읽으면서 내게 다가오는 것들을 붙잡는다. 붙잡고 그 시에 받은 감동들을 적어 나간다. 내가 살아낸 말씀들을 적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한다고 감동으로 받은 것 같은 묵상들을 적는 것이다.

    마치 오늘 가야 할 길의 내비게이션 같은 것이다. 오늘의 출발선이다. 아직 가지 않았다. 그 안내대로 가야 할 매일의 숙재가 있는 것이다. 내가 지혜를 경청하고 명철에 귀를 기울이는 나만의 방법이다. 그럼에도 어떤 것은, 어떤 응답은 음녀에게서 온 것임에도 분별하지 못하고 받는 경우가 있는 것 같더라. 그런 것들은 꼭 쓰고 아프다.

    나는 환상 속에서 살지 않는다. 현실을 산다. 양자얽힘이 작용하는 현실에서 산다. 지금의 기범이가 과거의 기범이를 예수님께 안내하듯이, 먼 훗날 예수님 옆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는 기범이가 동일하게 지금의 나를 예수님께서 이끌고 있다. 마치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먼 바울의 환상 속에 펼쳐졌던 미래의 바울이 지금의 자신을 아나니아에게로 이끌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이처럼 나는 현실을 살면서 분별하는 법을 몸소 배우는 것이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려면 먼저 상처를 심하게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저주를 누가 끊는가. 먼저 저주 가운데 파묻혀야 할것 아닌가. 어둠을 뚫고 나오려면 먼저 어둠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적이 속여 빼앗아간 많은 것들을 예수님께서 다 되찾게 해주신다고 전에 내게 말씀하셨다. 그러려면 먼저 수도 없이 속아 빼앗겨야 하지 않겠는가. 죽은 자가 부활하는 것이다. 문둥병에 걸려야 고침을 받지. 아파야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겠는가. 의사는 병자를 위해 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나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내게 오셔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죄인이고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약하고 여전히 혼자서는 아무것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이끌어 가시려고 매일 주시는 네비게이션들, 수도 없이 쌓여 있다. 예수님, 당신께서 곧 말씀이시죠. 이제 어떻게 하실래요? 미래의 기범아, 지금 나를 응원하고 있지?

  • 분노하는 이유 – 내면의 깊은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분노하는 이유 – 내면의 깊은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부모가 어떠하면 그 자녀도 어떠한 법이다. 화를 잘 내는 부모 아래서 자란 자녀 역시 그 마음에 분노가 가득 하다. 왜 그럴까. 어릴 때, 내 마음 대로 할 수 없는 그 때에 끝도 없이 화내는 부모님 밑에서 얼마나 두려웠나. 그러나 두려움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는 절대 안된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첫 걸음이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마라, 네 총명으로 그런 생각을 그만두어라. 12 네 마음을 훈계에 가져가고 네 귀를 지식의 말들에 가져가거라. 19 들어라, 내 아들아. 그래서 지혜로워라. 네 마음을 그 길로 인도하여라. 18 반드시 미래가 있으니 네 희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잠언 23:4, 직역성경).

    분노와 두려움

    나의 마음을 부에 가져가지 말고 훈계에, 나의 귀를 지식의 말들에 가져가서, 아빠의 말씀들을 듣고 나의 마음을 그 길로 인도하는 지혜로운 아들이 되기를 원한다.

    그럼 어떻게 듣는가, 말씀을 통해서, 예배 가운데, 꿈과 상황들… 왜 나의 오른쪽 눈에 상처가 났는가. 오늘 새벽의 그 이상한 꿈의 의미는 무엇인가. 분노라는 영이 이런 식으로 나를 덥는구나.

    사람들은 두려움에서 안정을 찾기 위해 부를 선택하여 끝 없이 쫓아간다. 상황들이 뜻 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 두려움에 휩싸이면 조선시대 도령 같이 생긴 혈기의 영체가 와서 뒤에서부터 나의 눈과 생각을 강제로 잡아 옷처럼 등줄기를 타고 흐려며 감싸 입혀진다. 그것이 혈기요 분노인 것 같다. 남자가 가끔 자기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도 어찌 보면 어떤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잡혀 움츠려숨는 것 아닐까. 마치 어딘지 모르는 캄캄한 산속을 헤메이는 어떤 한 사람 처럼 말이다. 그러다 동굴을 발견하면 거기에 들어가 숨는 것이다. 도령의 영이 와서 그를 잡을 때 까지.

    험한 세상을 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결국 부를 선택하게 되어있다. 그것이 세상 사탄의 경제 시스템이거든.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그것을 이루려 애쓰지 마라. 그만 하라. 그리고 아빠의 말씀, 훈계의 말씀들에 너의 마음과 귀를 가져가서 듣고 네 마음을 돌이켜 그 길로 인도하라. 내가 너의 삶을, 미래를 설계하였다. 그래, 반드시 네 미래가 있다. 사막의 셀 수 없는 모레알보다 너에 대한 나의 계획이 이렇게 많다. 네 희망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아들아, 나를 신뢰하여 나의 말씀을 듣고 나의 길로 너의 마음을 돌이키거라. 부가 아니라 나, 곧 너 기범이의 아빠가 기범이 너를 평강으로 인도한다. 나의 아들아, 내 손을 잡고 나를 신뢰하렴.

    예수님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