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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잠언 26장 묵상 |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

    잠언 26장을 묵상하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보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소망이 있음을 배운다. 부족함과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는 믿음의 걸음을 살펴보자. 잠언 26장 말씀 묵상으로 삶에 적용해 보자.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는 어리석은 자에게 더 소망이 있느니라.” (잠언 26:12, 흠정역)

    어리석은 자는 쓸모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절뚝거리더라도 앞으로 걸어간다. 반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게으른 자는 제자리에서 돌고 돈다. 문짝이 돌쩌귀 위에서 도는 것처럼, 그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맴돌고 있다면, 그곳에서 나는 게으른 자다. 곧 교만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나에게 내려온 독불장군 같은 기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고자 한다. 절름거리더라도, 어리석은 자의 길을 택하겠다. 부족함을 드러내며, 사람들 앞에 서겠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용서와 관계 회복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프다면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나는 권위의 자리에서 절름거리며 내려와야 한다. 자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내가 먼저 말을 건다.

    기도만으로는 관계의 골이 메워지지 않는다. 권위자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부끄럽지만, 그것이 진짜 회복의 시작이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그 길에서 예수님이 강함이 되신다.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겠다.


    묵상 원본

    어리석은 자, 쓸데없다. 그러나 저는 자가 아무리 절뚝거려도 그는 앞으로 걸어간다. 절뚝절뚝 뒤뚱거려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게으른 자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빙글빙글 그 자리에서 돌고 돌 뿐이다. 문 밖에 사자가 있으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게으른 자는 곧 교만한 자이다.

    만일 내가 어느 영역에서 맴돌고 있다면 그 영역에서 나는 게으르다는 말이 된다. 곧 교만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독불장군 같은 것이 있다. 전쟁을 두 번 겪으신 나의 조부모와 홀로 자수성가하신 아버지에게서 내려받은 것이다. 내가 보고 배운 것이 그것이다. 홀로 삶의 난관들을 헤쳐가는 것.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려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자보다 어리석은 자에게 소망이 있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교만함을 버리고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택하겠다. 부족하고 절름거리는 모습 그대로 사람들 앞에 서 보겠다. 내겐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리 큰 상처도 시간이 가면 아물고 통증은 사라진다. 내가 과거에 용서했다고 하는 사건들이 충분히 아물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프다면 그건 아직 용서를 못한 것이다. 그러니 누구나 그렇듯이 내게도 그 아픔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누구나 이런 과정을 통과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비록 불의하지만 그래도 아빠이고 남편이지 않은가. 이따금씩 큰아이와 아내가 과거의 아픔을 이야기하면 내 마음도 무너진다. 나도 나의 아픔이 있다. 주님만 아시는… 그러나 외면하지 않고 들으려 한다. 내가 잘못한 것은 미안하다고 한다.

    자녀가 부모에게 먼저 섭섭함을 고백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늙으신 부모가 세상을 떠나려고 하실 때나 하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에게는 부모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걸어야 한다. 내가 가끔씩 큰아이하고 몇 시간이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서로 언성을 높이고 다투고, 미안하다고 고백하고 용서하며 밤을 샌다. 내 속을 다 뒤집어 보여준다. 나는 권위자에게 그런 것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비난을 받아도 권위자가 늘 옳았지. 내가 더 늙기 전에, 아이가 장성하여 집을 떠나기 전에 풀어야지 않겠는가.

    기도만 한다고 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게 아빠라는 권위자와 상처받은 자녀 사이에 삶의 깊이 파인 골을 풀어가는 방법이다.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권위자의 수치를 가족들 앞에서 절름거리며 드러내는 것이다. 나도 사랑한다. 무지무지 사랑한다. 그러니 내 것을 다 내어주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권위자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으면 결코 풀어지지 않는 문제가 반드시 있다. 네 분의 어르신 장례를 치르면서 배운 것이다. 그것을 안 한 권위자는 평생 자녀의 얼굴을 못 보거나, 아니면 임종 앞에서라도 자녀들에게 섭섭한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기 싫다. 내가 먼저 하겠다.

    내 비록 부족하고 절름거릴지라도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겠다. 내가 가장 약할 그때에 나의 강함이 되시는 예수님을 소망하겠다. 아멘.

  • 잠언 5: 삶과 영적 싸움 – 나의 모든 길을 여호와께서 살피신다

    잠언 5장 말씀을 중심으로, 인간의 본성과 영적 싸움, 교만과 음란에 대한 성찰을 다룹니다. 나의 모든 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켜보시는지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잠언 5
    21 참으로 여호와의 눈앞에 사람의 길들이 있으니 사람의 모든 길을 그가 살피신다. (직역성경)

    사람의 모든 길, 즉 나의 모든 길을 그가 살피신다. 성경은 직설적으로 말한다. 사랑스런 네 아내의 젖가슴으로 흡족해하라. 어찌하여 이방 여자의 가슴을 안고 있느냐? 네 모든 길이 여호와 앞에 있어서 그가 너의 모든 길을 살피고 계신다.

    요셉은 이것을 알았다. 그래서 청년 때에 한순간의 큰 범죄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더라도 차라리 그 편이 그에게는 여호와 앞에서 득죄하는 것보다 더 좋았다.

    일흔이 넘은 은퇴한 어느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다가,

    “내 안에 음란이 그대로 있어, 욱하는 것이 아직도 그대로 있어, 35년이 넘도록 이것과 싸웠는데, 그런데 그것들이 내 안에 그대로 있어. 나는 아직도 이것으로 인해 회개해야 돼”

    하시며 운다. 또 백세 넘으신 자기 아버지 목사님이

    “나의 교만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지금도 나의 교만함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 내 안에 교만함이 그대로 있거든, 아들 박 목사야. 나는 언제까지 이것과 싸워야 할까? 언제까지 이것을 회개해야 할까?”

    하시며 아들 목사를 끌어안고 우셨다는 고백을 들었다.

    그분들의 고백을 들으며 흐르는 내 눈의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단 한 순간의 동정일까, 아니면 나 또한 그것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기 때문일까.

    나 또한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음란과 싸우고 있다. 교만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회개한다. 그런데도 음란한 생각들과 욱하는 마음들, 복수하여 찢어버리고 싶은 생각들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것이다. 사탄이 뿌리는 가라지도 있다. 즉시즉시 처낸다. 그러나 본성은 내 속에서 올라오는 것이다. 물론 분리하면 된다. 그러나 악한 영들의 활동 이전에 나의 육체의 본성이 그것을 원한다. 이제야 인생의 반박에 안 살았으니 뭐 할 말이 있겠냐만은…

    육체는 그렇다. 늘 음란하고 정욕적이며 자기 중심적이다. 그러니 평소 얌전하던 맹수도 굶주림 앞에서는 다른 생명을 잡아 찢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순한 양들 중에서도 그리로 안 가겠다고 버티며 냅다 도망치는 양들이 더러 더러 있는 것이다. 자기의 씨를 퍼트리기 위하여 암컷을 놓고 서로 싸운다. 이게 육체다. 내가 옷처럼 입고 있는 그 육체. 그러니 이 옷을 입고 있는 한 나는 죽을 때까지 음란과 정욕, 그리고 교만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나의 모든 길이 여호와와 하나님의 눈앞에 있다. 더하여 그분이 나의 모든 길을 지금도 살피고 계신다. 내가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떠나서, 지금 얼마나 세상과 자신과 싸우고 있느냐,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가, 오늘도 예수님 한 분만을 사랑하려고 몸부림쳤는가. 내 온 마음을 주님께만 드리려고 하였는가, 아내를 내 목숨처럼 사랑하려고 하였는가, 어린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대우하였는가 등등 이런 것들, 나의 마음을 살펴보신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주님이 지금도 살피시는 것은 단 하나일 것이다. “기범아, 너는 나의 신부인가? 나의 신부로 살았는가? 오늘도 나의 신부로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등불을 준비하라.” 아멘. 오늘도 예수님 앞에서 살도록 주님, 나의 마음을 지켜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