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예수님

  • 제목: 잠언 26장 묵상 |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

    잠언 26장을 묵상하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보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소망이 있음을 배운다. 부족함과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는 믿음의 걸음을 살펴보자. 잠언 26장 말씀 묵상으로 삶에 적용해 보자.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는 어리석은 자에게 더 소망이 있느니라.” (잠언 26:12, 흠정역)

    어리석은 자는 쓸모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절뚝거리더라도 앞으로 걸어간다. 반면,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게으른 자는 제자리에서 돌고 돈다. 문짝이 돌쩌귀 위에서 도는 것처럼, 그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맴돌고 있다면, 그곳에서 나는 게으른 자다. 곧 교만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나에게 내려온 독불장군 같은 기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고자 한다. 절름거리더라도, 어리석은 자의 길을 택하겠다. 부족함을 드러내며, 사람들 앞에 서겠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용서와 관계 회복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프다면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나는 권위의 자리에서 절름거리며 내려와야 한다. 자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내가 먼저 말을 건다.

    기도만으로는 관계의 골이 메워지지 않는다. 권위자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부끄럽지만, 그것이 진짜 회복의 시작이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라. 그 길에서 예수님이 강함이 되신다.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겠다.


    묵상 원본

    어리석은 자, 쓸데없다. 그러나 저는 자가 아무리 절뚝거려도 그는 앞으로 걸어간다. 절뚝절뚝 뒤뚱거려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게으른 자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빙글빙글 그 자리에서 돌고 돌 뿐이다. 문 밖에 사자가 있으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게으른 자는 곧 교만한 자이다.

    만일 내가 어느 영역에서 맴돌고 있다면 그 영역에서 나는 게으르다는 말이 된다. 곧 교만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독불장군 같은 것이 있다. 전쟁을 두 번 겪으신 나의 조부모와 홀로 자수성가하신 아버지에게서 내려받은 것이다. 내가 보고 배운 것이 그것이다. 홀로 삶의 난관들을 헤쳐가는 것.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려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자보다 어리석은 자에게 소망이 있다. 절름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교만함을 버리고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택하겠다. 부족하고 절름거리는 모습 그대로 사람들 앞에 서 보겠다. 내겐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리 큰 상처도 시간이 가면 아물고 통증은 사라진다. 내가 과거에 용서했다고 하는 사건들이 충분히 아물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프다면 그건 아직 용서를 못한 것이다. 그러니 누구나 그렇듯이 내게도 그 아픔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누구나 이런 과정을 통과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비록 불의하지만 그래도 아빠이고 남편이지 않은가. 이따금씩 큰아이와 아내가 과거의 아픔을 이야기하면 내 마음도 무너진다. 나도 나의 아픔이 있다. 주님만 아시는… 그러나 외면하지 않고 들으려 한다. 내가 잘못한 것은 미안하다고 한다.

    자녀가 부모에게 먼저 섭섭함을 고백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늙으신 부모가 세상을 떠나려고 하실 때나 하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에게는 부모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걸어야 한다. 내가 가끔씩 큰아이하고 몇 시간이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서로 언성을 높이고 다투고, 미안하다고 고백하고 용서하며 밤을 샌다. 내 속을 다 뒤집어 보여준다. 나는 권위자에게 그런 것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비난을 받아도 권위자가 늘 옳았지. 내가 더 늙기 전에, 아이가 장성하여 집을 떠나기 전에 풀어야지 않겠는가.

    기도만 한다고 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게 아빠라는 권위자와 상처받은 자녀 사이에 삶의 깊이 파인 골을 풀어가는 방법이다.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권위자의 수치를 가족들 앞에서 절름거리며 드러내는 것이다. 나도 사랑한다. 무지무지 사랑한다. 그러니 내 것을 다 내어주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권위자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으면 결코 풀어지지 않는 문제가 반드시 있다. 네 분의 어르신 장례를 치르면서 배운 것이다. 그것을 안 한 권위자는 평생 자녀의 얼굴을 못 보거나, 아니면 임종 앞에서라도 자녀들에게 섭섭한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기 싫다. 내가 먼저 하겠다.

    내 비록 부족하고 절름거릴지라도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겠다. 내가 가장 약할 그때에 나의 강함이 되시는 예수님을 소망하겠다. 아멘.

  • 귀인의 말습관, 당신의 말은 안전한가요? – 말씀 묵상 : 잠언 17

    잠언 17장을 통해 귀인의 바른 말과 입 조심의 중요성을 배우며, 일상 속 말의 힘을 돌아보는 묵상입니다. 오늘은 잠언 17 말씀으로 귀인의 말습관과 교훈을 함께 살펴보고, 오늘 묵상을 통해 나의 말습관을 점검해봅니다.

    바른 말이 어리석은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데 하물며 귀인에게 거짓 입술이 어울리겠느냐? (잠언 17:7, 직역성경)

    귀인의 말과 지혜

    오늘 말씀은 내게 귀인을 상기시킨다. 귀인에게는 거짓 입술이 어울리지 않으며, 입을 닫는 지혜가 필요하다. (잠언17, 귀인, 말습관 키워드 강조)

    아이들의 말습관 관찰

    아이들의 말놀이에서는 다소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어른이 되어도 이러한 말투로 행동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피할 것이다. 귀인에게 거짓 입술, 왜곡된 말, 비난의 말은 이와 같다. (말습관, 바른말 키워드 강조)

    조용함과 관계 회복

    여름과 추수철의 비처럼 우리의 왜곡된 말이 주변에 영향을 미치기 전에, 조용히 있는 것이 최선이다. 집에서도 아이들은 말의 중요성을 배우고, 작은 사과와 양해를 통해 관계를 회복하게 한다. (입조심, 가족, 아이교육 키워드 강조)

    실수와 교훈

    말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다. 중요한 것은 아이엠 쏘리를 생활 속에 익혀 중간이라도 가는 지혜를 갖는 것이다. 나는 귀인으로서, 나의 입은 예수님의 것이다. 아멘. (신앙묵상, 예수님 키워드 강조)


    글 원본

    오늘 이 말씀에 내게 말을 건다. 너는 귀인이다. 그래서 네게는 거짓입술이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 그 입 닫아!

    남자 어린 아기들이 좋아하는 말놀이가 있다. 똥, 설사, 천년 묵은 빤쓰, 뭐 이런것들이다. 책도 있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같은… 가끔은 너무 거시기해서 귀가 너무 힘들다 싶으면 자제하고 절제시키다가 아이에게 한 마디 한다. 지금부터 말하지 마! 이렇게 안하면 제동이 안 걸려.

    뭐 그런거다. 어른이 되어서 저러고 있다고 생각해봐라. 아마 다들 도망가겠지. 창피해서 나랑 같이 안 다니려고 할 것이다. 귀인에게 거짓 입술이 이와 같은 것이다. 왜곡되고 비뚤어진 말들, 비꼬고 비난하는 말들 다 이런 것들이다.

    여름에 눈처럼, 추수때 비처럼, 요즘 내리는 비가 딱 그렇지 않은가. 과수원 주인들이 얼마나 근심하고 있는가. 그러니 나의 입에서 왜곡되어 비뚤어진 말들이 나갈 바에야 아에 입을 꾹 닫는 것이 더 좋다. 조용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집에 있다 보면 가끔 주변에서 말을 듣는다. 여보 아이들에게, 그런 말은 하는거 아니에요. 아빠는 왜 그렇게 말해서 누나 기분 나쁘게 만들어요. 아빠, 우리끼리 예기하고 있을때는 끼어들지 마세요 같은 말들이다. 아빠는 잘 모르면서 왜 아무렇게나 말해요. 6살짜리도 내게 이런 말을 가끔식 한다. 그럼 어쩌나. 바로 미안해, 아빠가 잘 몰랐어. 아이엠 쏘~리! 정말 미안해.

    그러나 전에는 이 말이 안 나왔다. 나의 권위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사과 한 마디 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다. 나도 나의 엄마에게서 몇번, 그리고 전에 박목사님에게서 한번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사람이 말 실수를 안하고는 살아지지 않는다. 어쩌다가 입이 방정일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장 좋은 것은 아이엠 쏘~리를 입에 달고 사는 것이다. 그러면 이따금식 실수 해도 중간은 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귀인이다. 만점아빠 최고. 나의 입은 예수님의 것입니다. 아멘.

  •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행복하다: 잠언 16장 20절 – 믿음과 분별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하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하지 않는다. 악을 분별하고 주님께 신뢰를 두는 자가 참된 행복을 누린다. 오늘도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삶을 선택하라.

    말씀:
    “어떤 일을 분별하는 자는 복을 발견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행복하다.”
    잠언 16:20 (직역성경)

    누구를 의지한다는 것은 전적인 신뢰를 뜻한다. 막내를 어린 형제에게 맡기고 외출할 수 있을까. 마음이 불안할 것이다. 그러나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맡긴다면 근심이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이와 같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마음의 평강을 얻는다.

    예전에 아이들을 믿음의 사람에게 맡겼을 때 마음에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것이 내가 예수님께 내 자녀를 올려드릴 수 있는 이유다. 많은 사람이 걱정할 때에도 나는 주님께 맡기고 기도한다. 그분이 기다려주셨듯, 우리도 기다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나를 처음 부르신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를 잃지 않으셨다. 그분이 내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내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는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근심이 사라진다.

    어린아이는 집의 형편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부모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하나님을 믿기에 오늘도 행복하게 하루를 보낸다. 내일도, 어떤 상황이 와도 예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릴 것이다.

    오늘의 적용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은 현실의 불안보다 크다. 오늘 하루, 근심 대신 신뢰를 선택하라. 주님께 맡길 때 마음의 평강이 임한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모든 상황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일을 분별하는가. 악을 분별하여 떠나는 자가 복을 얻는다. 사탄의 왜곡된 말들을 분별하여 거절하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한다. 그것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이다. 아멘.


    원 본

    누구를 의지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를 들어 내가 막내를 9살 셋째에게 맡기고 외출할 수 있을까. 어린아이들을 위의 사춘기 형, 누나에게 맡기고 영화 한 편 볼 수 있을까. 불가능하거나 마음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할 것이다.

    전에 딱 한 번 어느 분께서 나의 아이들을 며칠 맡아주신 적이 있었다. 아무 걱정도, 어떤 근심도 없었다. 내가 큰아이와 둘째 아이를 예수님께 올려드리고 룰루랄라 하는 이유다.

    큰 아이를 염려하는 소리들이 있다. 그 아이를 위해 중보해 주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왜 염려해야 하나. 미혹에 가린 거 맞다. 그래서 저러고 있는 거 맞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또 다른 무엇을 푸시해야 하나. 부담을 줘야 하나. 그 아이, 참 많이 아프다. 누구나 겪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는 가장 아픈 것이다.

    내가 그 아이만 할 때, 내 아빠를 칼로 찌르려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은 그저 “기범아,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가 다였다. 예수님께서 나 같은 자도 기다려주셨으니 그 아이 역시 기다려주실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이 수십 년 뒤로 더 밀린다 해도 말이다. 나는 그저 주님께 맡기고 기도할 뿐이다. 나도 사명이 있고 그 아이도 사명이 있다면 때가 이를 때까지 기다려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실 그때부터 주님은 나를 조금이라도 잃어버릴 만한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내게 무엇을 하시던, 그것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얻고 또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는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특히 오늘날의 세상에서 물질적인 부분까지도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한다면 어떤 근심도 걱정도 없는 것이 정상인 거다. 어린아이는 자기 집의 재정 형편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아기들은 돈 없이도 하루를 아주 행복하게 보낸다. 그러면 나도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보냈는가. 그랬다.

    나는 내일도 행복하게 지낼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떤 희한한 상황이 주변을 우겨싸도 예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릴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선포이다. 무화과나무 잎이 어쩌고저쩨도 난 그저 예수님만으로 즐거워한다.

    어떤 일을 분별하는가. 악을 분별하여 악에서 떠나는 자가 복을 발견한다. 사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왜곡되고 뒤틀린 말들을 온전히 분별하여 쳐내고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하겠다. 아멘.

  • 지혜의 꿀과 음녀의 꿀, 분별하기 – 잠언 5장

    잠언 5:1-4을 통해 ‘지혜의 꿀’과 ‘음녀의 꿀’을 분별하는 길을 묵상합니다.
    겉보기에는 비슷하지만 열매가 다릅니다. 지혜에 경청하고 명철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이 오늘 나를 인도하심을 느낍니다.

    잠언 5:1-4 (직역)
    내 아들아, 내 지혜에 경청하고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판단력을 유지하고 네 입술의 지식을 지켜라.
    참으로 부도덕한 여자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녀의 혀는 기름보다 매끄러우나 그녀의 마지막은 쑥처럼 쓰고 양날 선 칼처럼 날카롭다.

    지혜의 꿀과 음녀의 꿀

    잠언 5장은 지혜와 음녀의 입술을 대조하며, 겉보기에는 꿀처럼 달지만 결국 쑥처럼 쓰디쓴 결과를 경고합니다.
    오늘 말씀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지혜에 경청하고 명철에 귀 기울이는 삶을 요구합니다.

    지혜의 꿀과 음녀의 꿀은 처음엔 구분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 지혜: 생명을 낳습니다.
    • 음녀: 멸망을 낳습니다.

    분별하는 삶과 명철

    나는 매일 잠언을 묵상하며 그날의 ‘네비게이션’을 받습니다.
    아직 가지 않은 길의 지도, 예수님께서 오늘 나를 이끌어 가실 방향입니다.
    때로는 음녀의 속임을 분별하지 못하고 아픔으로 배우기도 하지만,
    현실 속에서 분별력과 명철을 몸소 익혀 갑니다.

    오늘의 네비게이션: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은 병자를 위해 오십니다.
    상처받은 자, 저주 속에서 몸부림치는 자,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은 자에게 오십니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셔야만 하는 자리입니다.

    오늘도 나는 그분의 말씀을 네비게이션 삼아 나아갑니다.
    “예수님, 당신이 곧 말씀이시죠. 이제 어떻게 하실래요?”


    원본 묵상 글

    무엇으로 음녀의 속임을 간파하는가. 지혜가 내 혀에 꿀과 같은데, 음녀의 입술도 꿀을 떨어뜨린다. 다른 것이 있다면 열매이다. 열매가 다르다. 그러나 그 처음은 너무도 비슷하여 무엇이 음녀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지혜처럼, 내 혀의 꿀처럼 위장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서는 경청하라고 한다. 지혜에 경청하라. 명철에 귀를 기울이라. 이는 단순히 말씀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적으로 깨달으라는 말은 더욱 아니다. 나는 매일 아침 지식으로 공부한 잠언을 묵상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하나도 기록하지 않는다. 매일의 잠언을 읽으면서 내게 다가오는 것들을 붙잡는다. 붙잡고 그 시에 받은 감동들을 적어 나간다. 내가 살아낸 말씀들을 적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한다고 감동으로 받은 것 같은 묵상들을 적는 것이다.

    마치 오늘 가야 할 길의 내비게이션 같은 것이다. 오늘의 출발선이다. 아직 가지 않았다. 그 안내대로 가야 할 매일의 숙재가 있는 것이다. 내가 지혜를 경청하고 명철에 귀를 기울이는 나만의 방법이다. 그럼에도 어떤 것은, 어떤 응답은 음녀에게서 온 것임에도 분별하지 못하고 받는 경우가 있는 것 같더라. 그런 것들은 꼭 쓰고 아프다.

    나는 환상 속에서 살지 않는다. 현실을 산다. 양자얽힘이 작용하는 현실에서 산다. 지금의 기범이가 과거의 기범이를 예수님께 안내하듯이, 먼 훗날 예수님 옆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는 기범이가 동일하게 지금의 나를 예수님께서 이끌고 있다. 마치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먼 바울의 환상 속에 펼쳐졌던 미래의 바울이 지금의 자신을 아나니아에게로 이끌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이처럼 나는 현실을 살면서 분별하는 법을 몸소 배우는 것이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려면 먼저 상처를 심하게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저주를 누가 끊는가. 먼저 저주 가운데 파묻혀야 할것 아닌가. 어둠을 뚫고 나오려면 먼저 어둠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적이 속여 빼앗아간 많은 것들을 예수님께서 다 되찾게 해주신다고 전에 내게 말씀하셨다. 그러려면 먼저 수도 없이 속아 빼앗겨야 하지 않겠는가. 죽은 자가 부활하는 것이다. 문둥병에 걸려야 고침을 받지. 아파야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겠는가. 의사는 병자를 위해 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나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내게 오셔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죄인이고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약하고 여전히 혼자서는 아무것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이끌어 가시려고 매일 주시는 네비게이션들, 수도 없이 쌓여 있다. 예수님, 당신께서 곧 말씀이시죠. 이제 어떻게 하실래요? 미래의 기범아, 지금 나를 응원하고 있지?

  • 잠언 3장: 지혜의 길, 고통을 통한 평안과 부귀의 비밀

    잠언 3장은 지혜의 길이 은혜와 평안을 주며, 고통 속에서 평안을 배우는 비밀을 보여줍니다. 다윗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참된 승리와 평안을 알아보세요.

    잠언 3
    16-18 날들의 길이가 그녀의 오른손에 있고 부귀와 영광이 그녀의 왼손에 있다. 그녀의 길들은 은혜의 길들이고 그녀의 모든 통로는 평안이다. 그녀는 그녀를 붙잡는 자들에게 생명나무니 그녀를 잡는 모든 자는 행복하다고 불릴 것이다. (직역성경).

    평안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최악의 평안을 누리느니 막강한 전투력을 키워 상대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연약하신 분이 아니다. 다윗 왕국의 평안도 결국은 그의 손에 묻은 수많은 피의 대가였다. 테러를 제압하는 군인들은 최소한 그 칼에 맞는 것과 비슷한 고통 정도는 느껴봐야 한다고 하더라. 다윗은 사자와 싸우며 그러한 고통을 미리 경험하였고 골리앗 앞에서 결코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이 모형 칼이라도 그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고통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한다.

    하나님 나라의 군대로 부름받은 군사라면, 전쟁에 능한 용사로 부름받았다면, 주먹에 맞을 때, 화살에 관통당할 때, 전쟁 상황에서의 두려움, 목숨의 위협 등등의 고통을 모의 상황에서 미리 느껴보는 것이다. 고통을 아는 자가 더 잘 대처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쟁에 능한 용사가 되는 것이다.

    지혜의 길들은 은혜의 길들이고 그녀의 모든 통로는 평안이다. 그러나 그녀의 가장 큰 지혜는 십자가였다. 그렇게 사랑하시던 예루살렘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처절한 고통을 맛보며 죽으심으로 대신 갚으신 것이다. 그러니 그분은 전쟁에 능한, 항상 승리하시는 왕 중의 왕이 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지혜를 따라, 그녀의 가장 큰 지혜를 따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말 그대로 상처받은 치유자로 일어서는 것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자본주의 바탕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겠지만, 그 통로가 막힐 때도 나는 평강을 누릴 수 있겠는가. 대적이 나의 정신을 무너뜨리려 할 때, 나는 누구를 의지하여 일어나겠는가. 요셉처럼, 노예로 끌려갈 때에도, 억울하게 감옥에 갇힐 때에도 여호와 앞에서 신실하겠는가. 여호와 앞에서 좁은 길을 가려 하는 자 앞에 왜 자꾸 불편한 일들이 벌어지는가. 가문에 흐르는 저주인가. 뭐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것들 모두가 어쩌면 고통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일 것이다. 돈을 움켜쥐고 믿는 자들의 마음을 훔치려는 대적의 모든 공작에 당당히 맞서 싸우라는 선물이다.

    삶이 끊어질 것 같은, 목숨이 나갈 것 같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을 맛본 사람들은 결코 탐욕에 잡히지 않는다. 다시 넘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담대하게 주님을 의지하여 승리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선물은 평강이며 보상은 부귀와 영광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