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잠언묵상

  • 성경 잠언 8장 묵상 – 다른 방법, 지혜의 길을 찾다

    세상의 길이 막힐 때에도 마음에 평안을 주시는 여호와의 지혜를 구하라. 은과 금보다 귀한 지혜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말씀: 잠언 8:10-13
    “은 말고 내 훈계를 취하고 정제된 금보다 지식을 취하여라. 이는 지혜가 진주보다 좋으니 어떤 진귀한 것도 그것과 같을 수 없다. 나는 지혜라, 영리함과 함께 거주하고 지식과 판단력을 내가 발견할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니.” (직역성경)

    잠언 8장 말씀에서 배운 지혜는 세상의 부보다 더 귀하다. 사람들은 은과 금을 얻기 위해 많은 시간을 쏟는다. 불안한 미래를 대비해 재물을 모으려 하지만, 정작 지혜를 구하는 데에는 인색하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지혜는 은금보다 귀하고, 그 어떤 보물과도 비교할 수 없다.

    지혜는 영리함과 함께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세상의 부를 얻는 자들도 생각이 견고하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하물며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자라면 더욱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1. 같은 방법의 한계

    오늘 아침, 아이가 장난감의 건전지를 열지 못해 도움을 구했다. 나는 “같은 방법으로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라”고 말했다. 아이는 곧 그것을 해냈다. 이 단순한 사건이 나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나도 같은 방법으로만 살아왔던 것은 아닌가. 지혜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불의한 방법을 미워하고, 새로운 판단력과 분별력을 얻게 된다.
    요약: 지혜는 선택의 방향을 바꾼다.

    2. 다른 방법, 지혜의 길

    수련회 이후, 내 삶의 길이 막힌 듯 보인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이 ‘다른 방법’을 찾을 때이다.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엎드리는 길 말이다. 재물을 내려놓고도 주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것이 참된 지혜의 길이다. 잠언 8장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진정한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음을 강조한다.

    아브라함처럼, 나는 의심하지 않겠다. 근심하지 않겠다. 오히려 예수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다리겠다. 지극히 크신 나의 기업이요 상급 되신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 나의 참 소망이다.
    요약: 여호와를 경외함이 참된 지혜의 길이다.

    적용

    오늘 나는 어떤 ‘다른 방법’을 시도할 것인가? 세상의 방법이 아닌,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의 길로 나아가자. 오늘 나는 지혜를 선택하겠다.


    묵상 원본

    은과 정제된 금, 사람들은 이것을 얻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돈을 벌거나, 직접 캐거나, 그 밖에 많은 방법을 동원하여 은과 금을 얻으려 한다. 요즈음은 금을 사려고 해도 다 동이 나서 살 수가 없다고 하더라. 미래가 불안하니 이런 거에 투자하여 안전을 담보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은금보다 더욱 귀하여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지혜는 영리함과 함께한다. 우리가 이렇게 진귀한 지혜를 얻으려면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욱 자신을 다스리고 생각과 마음을 더욱 지켜야 할 것이다. 세상 부를 가진 자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생각이 견고하고, 소셜미디어 등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일 따위는 아예 하지도 않는다. 일단 이게 되어야 부를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 그러니 세상 보물보다도 더욱 진귀한 지혜를 얻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오늘 아침에 아이가 장난감의 건전지 뚜껑을 열다가 잘 안 열려서 내게 도움을 구하였다. 나는 아이에게 “같은 방법으로 안 될 때는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는 거야.”라며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아이는 곧 그것을 해내었다.

    그래, 다른 방법! 이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며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지혜는 영리함과 함께한다. 그녀는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는 것을 미워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지혜를 발견하고, 그때에 영리함과 지식, 판단력이 함께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래, 다른 방법. 지금까지 근근이 살아왔다. 그러나 이번 수련회 이후로 다 막혔다. 우리 집에 돈을 버는 사람이 지금은 나밖에 없으니 돈 벌어야지. 매달 지출해야 할 돈을 벌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지금은 사방이 막히고 오히려 겹겹이 둘러 막혔다. 기도하지만, 부르짖지만, 여전히 다른 일을 구하며 이것저것 시도하는 중이다. 늘 하던 대로 하고 있었다.

    한순간 재물을 획득하고도 주께서 부르실 때에 베드로처럼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준비가 내게는 되어 있는가.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시는 자마다 한결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주님을 따라갔다. 내게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어제 금요예배 때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던 그것을 감당할 준비가 내게는 되어 있는가.

    다른 방법,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심으로 주님 발앞에 엎드릴 때인가. 돈은 누가 버나. 관리비, 학비, 생활비 등등… 다른 방법, 그래서 더욱 여호와를 경외하려 하는 것이다. 백세에 여호와의 말씀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브라함처럼.

    나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 안에서 더욱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겠다. 지극히 크신 나의 기업이요 상급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소망하며 바라보겠다. 예수, 나의 참 소망! 아멘.

  • 잠언 27장 묵상 – 사랑이 있는 책망, 상처 주는 비난

    공개적인 책망은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공개적인 비난은 관계를 무너뜨린다. 잠언 27장을 통해 사랑의 언어와 관계 회복의 지혜를 배운다.

    공개적인 책망이 비밀을 지켜주는 사랑보다 낫다. 사랑하는 자의 상처들은 신실한 것들이지만 미워하는 자의 입맞춤들은 속이는 것들이다. (잠언 27:5‑6,직역성경)

    잠언 27장 말씀 묵상을 통해 오늘 우리의 말과 태도를 돌아보자.

    비난과 책망의 차이

    청년 시절 피지에서 학교를 섬길 때의 일이 있었다. 어느 날, 함께 일하던 현지인 친구에게 이유도 모른 채 따귀를 맞았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은 내가 그의 문화 속에서 공개적인 비난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큰 수치를 느끼고 공동체를 떠났다. 당시 나는 그것이 단순한 ‘책망’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비난’이었다.

    사랑의 언어 배우기

    우리 문화 속에서도 ‘책망’이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집안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렇다. 비난은 상대의 마음을 닫게 하지만, 신실한 사랑의 책망은 관계를 세운다.

    나 또한 자녀들에게 공개적인 비난을 자주 했다. “아가야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는 괜찮지만, 그 앞에 “너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라는 말이 붙으면 비난이 된다. “밖에 추우니 따뜻하게 입어”는 사랑이지만, “추우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는 비난이다. 나는 그렇게 자주 입으로 상처를 주었다.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

    비난을 멈추려면 스스로 권위자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불의한 권위자처럼 느낀다면 이미 비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낮아짐에서 시작된다. 자녀가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함부로 말해요?”라고 말할 때, “미안해, 아빠가 몰랐어”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때 아이는 “아빠, 내가 용서해드릴게요”라며 마음을 연다.

    묵상과 적용

    공개적인 책망은 관계를 세우지만, 공개적인 비난은 관계를 무너뜨린다. 오늘 말씀은 나의 동기를 주님께 맡기라고 가르친다. 사랑하는 자의 상처는 신실하다. 예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주 앞에 엎드리면 된다.
    묵상 포인트: 오늘 나는 사랑으로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비난으로 말하고 있는가?
    적용: 이 말씀을 묵상하며 나의 언어를 돌아보세요.


    묵상 원본

    청년때 피지에서 학교를 섬길 때 일이다. 8-9개월쯤 되는 어느 날, 함께 성실하게 함께 섬기는 나의 동갑 현지인 친구에게 어느 날 갑자기 따귀를 후려 맞았다. 평소 나를 좋아하던 고2 남학생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고 아 아이가 알려주는데로 친구를 찾아가서 나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던 적이 있다. 그 이후, 그 지역 최고의 존칭인 마스터라는 호칭으로 학생들이 나를 불렀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나라 문화권에서 공개적인 비난을 했던 것이다. 그 친구는 큰 수치감에 결국은 공동체를 떠났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는 책망을 한다고 하면서 공개적인 비난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집에서는 식구들 끼리니까 괜찮을 수 있다. 직장이야 뭐 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니 그렇다고 하자. 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생기더라. 어늘 날, 몇 달 전에 나의 아들이 내게 불편한 말을 건냈다. “아빠 그때 정말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내 맘을 이해해주는 아들에게 얼마나 고마왔던지… 그러나 나도 누군가에게 그러지 않았을까.

    나도 자녀들에게 공개적인 비난 많이 한다. “아가야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 이건 괜찮다. 그러나 그 앞에 “너 지금 아무것도 않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비슷한 말이 붙으면 이건 비난이다. 내가 잘 하는 짓이다. “밖에 추우니 따뜻하게 잆어” 이거 좋다. 그러나 뒤에 “추우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 요 말도 딱 비난이다. 내가 많이 했던 말들이다. 나도 입이 험하고 거칠다.

    혹시 나도 그런가, 궁굼하다면 스스로 분별하는 법이 있다. 자신을 불의한 권위자라고 생각한다면 거의 100% 그렇게 하고 있다 여기면 되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더 예뻐하고 그 옆의 아이는 모른체 한다면 그것도 비난이다. 옆에 있는 아이는 그저 멍 때리며 바라볼 뿐이다. 소외된 마음과 함께… 정작 비난하는 자는 자기가 무얼 하는지 모른다.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함부로 말해요?” 이런 비슷한 말을 자주, 가끔 듣는다면 그는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하나. 미안해, 아빠가 잘 몰랐어. 무조건 해야 한다. 그러면 6살짜리가 뭐라는지 아는가. “아빠 내가 용서해드릴게요” 한다. 그래, 나도 용서를 받아야지. 그런데 권위자는 미안하다는 말을 안하더라.

    그래서 다시 회개한다. 공개적인 책망이 아니라 공개적인 비난을 했던 모든 말들을 회개한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이 있다. 사랑하는 자의 상처들은 신실하다고 인정해주는 오늘 잠언의 말씀이 내게 말하지 않는가. 내 마음의 동기를 주께서 알아주시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말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도 괜찮아, 주님 앞에 엎드리면 되, 예수님이 알아주시면 되는 것이다. 아멘.

  • 잠언 25장 묵상 – 왕 같은 제사장의 삶과 하나님의 숨은 보물

    잠언 25장을 묵상하며 하나님이 숨기신 보물을 발견하고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배우세요. 겸손과 경외로 지혜를 구하며 감사와 신뢰로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일을 숨기는 것이고 왕들의 영광은 일을 살피는 것이다.” (잠언 25:2, 직역성경)

    왕의 교과서, 잠언

    믿는 자들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다고 기록되었다. 우리는 모두 왕이다. 잠언 25장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왕의 교과서다. 하나님이 숨기신 보물을 찾도록 부르신 책이다. 잠언은 반복해서 말한다. 은과 금보다 지혜를 구하라, 지혜가 더욱 귀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재물과 영광이 따를 것이다, 훈계를 버리지 말라.

    겸손이 왕의 지혜다

    하나님의 일을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겸손히 그분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로 기뻐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신뢰하며 감사하라. 그러면 지나온 모든 시간이 해석될 것이다.

    단 한 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 나의 실수까지도 아시고 피할 길을 미리 준비하신 그분의 손길을 보게 된다.

    과거 속에 숨은 하나님의 포석

    과거의 모든 사건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왕으로 세우기 위한 포석이었다. 바둑의 한 수, 체스의 한 칸처럼 그분의 계획에는 의미 없는 일이 없다.

    이제 우리는 과거를 감사로 보고, 현재를 신뢰로 살며, 숨겨진 하나님의 일을 찾아가야 한다.

    “너희는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아멘.

  • 잠언 24장 묵상: 오만을 버리고 회개로 일어서라

    잠언 24장 성경묵상으로 오만을 버리고 회개와 인내로 다시 일어서라. 잠언 24장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지혜와 명철로 세워지는 성전의 삶을 묵상하며 실천하자.

    잠언 24:9-10
    “우둔한 자의 간계는 죄며 오만한 자는 사람에게 가증하다. 네가 환난 날에 약해지는 것은 네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직역성경)

    오만은 하늘과 땅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사탄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천사들의 1/3을 꾀었다. 오만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모를 거역하며 형제를 원수로 만든다. 오만한 마음은 파괴를 낳고, 입술은 고생을 말한다. 오만은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오만을 깨닫는 순간이 회개의 시작이다. 내 속의 오만함은 여전히 나를 괴롭게 하지만, 회개할 때마다 마음이 새롭게 된다. 마음이 상한 만큼 회개하지 못하면, 복수심과 비뚤어진 말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진실한 회개는 내 안의 성전을 다시 세운다.

    환난 날에 약해지는 이유는 내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지혜와 명철로 집이 세워지고, 나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내 안의 지혜께서 그분의 집을 짓도록 맡겨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인내로 구원을 이루고, 회개로 믿음을 지켜야 한다.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고, 주님의 은혜로 굳건히 서야 한다. 각 단락의 시작부터 ‘오만’, ‘회개’, ‘인내’ 키워드를 반복 강조하며 메시지를 강화한다. 그렇게 할 때 여호와의 성전의 기둥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 믿음과 구원의 길은 인내로 완성된다.

    나의 목숨을 지키시는 여호와께서 각자의 행위대로 보상하신다. 그러니 달려가자. 끝까지 인내하며 여호와를 경외하자. 주님이 도우시고 지키시며 붙들어 주신다. 아멘.


    묵상 원본

    오만함은 하늘과 땅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사탄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천사들의 1/3을 꾀어냈다. 오만하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모를 거역하며 스스로 형제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파괴를, 입술은 고생을 말한다.

    그것이 내 속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나를 괴롭게 한다. 나의 마음이 상해 있는 만큼, 깨닫지 못해 회개하지 않은 만큼, 복수하려는 마음과 비뚤어진 입의 말들이 나가는 것이다.

    환난 날, 오만한 자의 지배를 당할 때 약해지는 이유는 나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할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묵상하는 것이다. 지혜와 명철로 집이 지어진다. 나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집이다. 그러니 내 안에 계신 지혜께서 그분의 집을 지으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오직 다시 일어나는 것뿐이다. 인내함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 회개하여 일어나고, 또다시 회개하여 일어나고를, 다시는 넘어지지 않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여호와의 성전의 기둥과 같은 존재가 되어져간다. 나의 목숨을 지키시는 여호와께서 각자의 행위대로 보상하신다.

    그러니 달려가자. 끝까지 인내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자. 주님이 도우시고 지키시고 붙들어 주신다. 아멘.

  • 잠언19 말씀묵상 – 조급함의 함정과 기다림의 축복

    잠언 19장은 조급함과 믿음 없는 서두름의 위험을 경고하고, 주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축복을 가르친다. (145자)

    잠언 19:2-3 (직역성경)
    “지식이 없는 사람도 좋지 않고, 발을 재촉하는 자는 죄짓는다. 사람의 우둔함이 자기 길을 치우치게 하고는 여호와께 그의 마음이 화를 낸다.”

    조급함의 위험 | 잠언19 말씀묵상

    잠언19의 말씀은 조급함의 위험을 경고한다. 조급함, 잠언19, 말씀묵상은 믿음의 결핍을 보여준다. 세상은 늘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재촉한다. 그러나 조급한 발걸음은 결국 함정으로 인도한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는다. 기도의 골방에서 기다릴 줄 안다.

    기다림의 믿음 | 믿음으로 응답을 기다리라

    잠언19의 교훈은 기다림 속에 믿음이 자란다는 것이다. 기도의 시간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응답을 기다릴 여유가 없기에 스스로 발을 재촉하고 사탄의 올무에 걸린다. 그러나 믿는 자는 다르다. 주님의 때를 신뢰하며, 과거의 인도하심을 기억한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길을 예비하신다.

    자녀양육과 인내 | 주님의 타이밍을 신뢰하라

    자녀에게도 조급함은 독이 된다. 부모의 과도한 푸시는 자녀를 망가뜨린다. 영적 문제는 인간의 말이나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주님의 초자연적 사랑만이 개입하셔야 한다. 주님은 가장 좋은 타이밍을 재고 계신다. 그러므로 나는 재촉하지 않는다. 기다린다. 주님을 신뢰한다. 아멘.


    묵상 원본

    발을 재촉하는 자, 곧 조급하게 행하는 자이다. 어떤 상품을 팔거나 보험 등의 영업을 할 때,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 “마지막 혜택이 사라진다”와 같은 표현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유도하여 그 자리에서 계약하도록 만든다.

    조급하게 재촉하는 자가 혈기를 낸다. 조급한 자는 대체로 속도광이다. 상대방을 조정하는 무당의 영이 강할수록 조급하게 발을 재촉한다. 조급한 사람일수록 예수님 앞에서 기도의 시간을 내는 것을 어려워한다. “지금 일해서 돈 벌어야지. 더 열심히 일해야지.” 그렇지 않나.

    왜 조급하게 행동하는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기도해서 응답을 받을 여유가 없다. 그러니 자기 발을 재촉하여 사탄의 올무에 걸리는 것이다.

    나도 조급하다. 그러니 더욱 순종하여 골방에서 몇 시간이고 머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 많은 위기의 순간들에 주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보이지 않는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주님이 나의 앞길을 축복으로 바꾸시려고 어떻게 예비하셨는지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최소한 의식주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지금 조금 불편할 뿐이다. 자녀들도, 큰아이도 마찬가지다. 조급하게 푸시할수록 자녀들을 망가뜨릴 뿐이다.

    큰아이는 나하고 소울 타이가 되어 있다. 내가 아빠를 용서하지 못했던 모습 그대로 큰아이는 자기 아빠의 권위자를 향하는 것뿐이다. 그 아이는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이가 정말 용서해야 할 대상은 나, 즉 그 아이의 아빠이다.

    사람의 힘으로, 어떤 말로도 해결할 수 없다. 주께서 직접 개입하셔야 할 문제이다. 주님의 초자연적인 사랑이 개입하셔야 한다. 주님은 가장 좋은 타이밍을 재고 계신다. 나는 주님을 기다릴 것이다. 재촉하여 망치지 않을 것이다. 아멘.

  • 귀인의 말습관, 당신의 말은 안전한가요? – 말씀 묵상 : 잠언 17

    잠언 17장을 통해 귀인의 바른 말과 입 조심의 중요성을 배우며, 일상 속 말의 힘을 돌아보는 묵상입니다. 오늘은 잠언 17 말씀으로 귀인의 말습관과 교훈을 함께 살펴보고, 오늘 묵상을 통해 나의 말습관을 점검해봅니다.

    바른 말이 어리석은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데 하물며 귀인에게 거짓 입술이 어울리겠느냐? (잠언 17:7, 직역성경)

    귀인의 말과 지혜

    오늘 말씀은 내게 귀인을 상기시킨다. 귀인에게는 거짓 입술이 어울리지 않으며, 입을 닫는 지혜가 필요하다. (잠언17, 귀인, 말습관 키워드 강조)

    아이들의 말습관 관찰

    아이들의 말놀이에서는 다소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어른이 되어도 이러한 말투로 행동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피할 것이다. 귀인에게 거짓 입술, 왜곡된 말, 비난의 말은 이와 같다. (말습관, 바른말 키워드 강조)

    조용함과 관계 회복

    여름과 추수철의 비처럼 우리의 왜곡된 말이 주변에 영향을 미치기 전에, 조용히 있는 것이 최선이다. 집에서도 아이들은 말의 중요성을 배우고, 작은 사과와 양해를 통해 관계를 회복하게 한다. (입조심, 가족, 아이교육 키워드 강조)

    실수와 교훈

    말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다. 중요한 것은 아이엠 쏘리를 생활 속에 익혀 중간이라도 가는 지혜를 갖는 것이다. 나는 귀인으로서, 나의 입은 예수님의 것이다. 아멘. (신앙묵상, 예수님 키워드 강조)


    글 원본

    오늘 이 말씀에 내게 말을 건다. 너는 귀인이다. 그래서 네게는 거짓입술이 어울리지 않아. 그러니 그 입 닫아!

    남자 어린 아기들이 좋아하는 말놀이가 있다. 똥, 설사, 천년 묵은 빤쓰, 뭐 이런것들이다. 책도 있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같은… 가끔은 너무 거시기해서 귀가 너무 힘들다 싶으면 자제하고 절제시키다가 아이에게 한 마디 한다. 지금부터 말하지 마! 이렇게 안하면 제동이 안 걸려.

    뭐 그런거다. 어른이 되어서 저러고 있다고 생각해봐라. 아마 다들 도망가겠지. 창피해서 나랑 같이 안 다니려고 할 것이다. 귀인에게 거짓 입술이 이와 같은 것이다. 왜곡되고 비뚤어진 말들, 비꼬고 비난하는 말들 다 이런 것들이다.

    여름에 눈처럼, 추수때 비처럼, 요즘 내리는 비가 딱 그렇지 않은가. 과수원 주인들이 얼마나 근심하고 있는가. 그러니 나의 입에서 왜곡되어 비뚤어진 말들이 나갈 바에야 아에 입을 꾹 닫는 것이 더 좋다. 조용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집에 있다 보면 가끔 주변에서 말을 듣는다. 여보 아이들에게, 그런 말은 하는거 아니에요. 아빠는 왜 그렇게 말해서 누나 기분 나쁘게 만들어요. 아빠, 우리끼리 예기하고 있을때는 끼어들지 마세요 같은 말들이다. 아빠는 잘 모르면서 왜 아무렇게나 말해요. 6살짜리도 내게 이런 말을 가끔식 한다. 그럼 어쩌나. 바로 미안해, 아빠가 잘 몰랐어. 아이엠 쏘~리! 정말 미안해.

    그러나 전에는 이 말이 안 나왔다. 나의 권위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사과 한 마디 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다. 나도 나의 엄마에게서 몇번, 그리고 전에 박목사님에게서 한번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사람이 말 실수를 안하고는 살아지지 않는다. 어쩌다가 입이 방정일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장 좋은 것은 아이엠 쏘~리를 입에 달고 사는 것이다. 그러면 이따금식 실수 해도 중간은 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귀인이다. 만점아빠 최고. 나의 입은 예수님의 것입니다. 아멘.

  •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행복하다: 잠언 16장 20절 – 믿음과 분별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하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하지 않는다. 악을 분별하고 주님께 신뢰를 두는 자가 참된 행복을 누린다. 오늘도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삶을 선택하라.

    말씀:
    “어떤 일을 분별하는 자는 복을 발견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행복하다.”
    잠언 16:20 (직역성경)

    누구를 의지한다는 것은 전적인 신뢰를 뜻한다. 막내를 어린 형제에게 맡기고 외출할 수 있을까. 마음이 불안할 것이다. 그러나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맡긴다면 근심이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이와 같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마음의 평강을 얻는다.

    예전에 아이들을 믿음의 사람에게 맡겼을 때 마음에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것이 내가 예수님께 내 자녀를 올려드릴 수 있는 이유다. 많은 사람이 걱정할 때에도 나는 주님께 맡기고 기도한다. 그분이 기다려주셨듯, 우리도 기다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나를 처음 부르신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를 잃지 않으셨다. 그분이 내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내 마음을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는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근심이 사라진다.

    어린아이는 집의 형편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부모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하나님을 믿기에 오늘도 행복하게 하루를 보낸다. 내일도, 어떤 상황이 와도 예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릴 것이다.

    오늘의 적용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은 현실의 불안보다 크다. 오늘 하루, 근심 대신 신뢰를 선택하라. 주님께 맡길 때 마음의 평강이 임한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모든 상황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일을 분별하는가. 악을 분별하여 떠나는 자가 복을 얻는다. 사탄의 왜곡된 말들을 분별하여 거절하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한다. 그것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이다. 아멘.


    원 본

    누구를 의지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예를 들어 내가 막내를 9살 셋째에게 맡기고 외출할 수 있을까. 어린아이들을 위의 사춘기 형, 누나에게 맡기고 영화 한 편 볼 수 있을까. 불가능하거나 마음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할 것이다.

    전에 딱 한 번 어느 분께서 나의 아이들을 며칠 맡아주신 적이 있었다. 아무 걱정도, 어떤 근심도 없었다. 내가 큰아이와 둘째 아이를 예수님께 올려드리고 룰루랄라 하는 이유다.

    큰 아이를 염려하는 소리들이 있다. 그 아이를 위해 중보해 주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왜 염려해야 하나. 미혹에 가린 거 맞다. 그래서 저러고 있는 거 맞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또 다른 무엇을 푸시해야 하나. 부담을 줘야 하나. 그 아이, 참 많이 아프다. 누구나 겪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는 가장 아픈 것이다.

    내가 그 아이만 할 때, 내 아빠를 칼로 찌르려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은 그저 “기범아,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가 다였다. 예수님께서 나 같은 자도 기다려주셨으니 그 아이 역시 기다려주실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이 수십 년 뒤로 더 밀린다 해도 말이다. 나는 그저 주님께 맡기고 기도할 뿐이다. 나도 사명이 있고 그 아이도 사명이 있다면 때가 이를 때까지 기다려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실 그때부터 주님은 나를 조금이라도 잃어버릴 만한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내게 무엇을 하시던, 그것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얻고 또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는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특히 오늘날의 세상에서 물질적인 부분까지도 여호와를 온전히 의지한다면 어떤 근심도 걱정도 없는 것이 정상인 거다. 어린아이는 자기 집의 재정 형편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아기들은 돈 없이도 하루를 아주 행복하게 보낸다. 그러면 나도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보냈는가. 그랬다.

    나는 내일도 행복하게 지낼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떤 희한한 상황이 주변을 우겨싸도 예수님 안에서 평강을 누릴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선포이다. 무화과나무 잎이 어쩌고저쩨도 난 그저 예수님만으로 즐거워한다.

    어떤 일을 분별하는가. 악을 분별하여 악에서 떠나는 자가 복을 발견한다. 사탄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왜곡되고 뒤틀린 말들을 온전히 분별하여 쳐내고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순종하겠다. 아멘.

  • 잠언 15장 4절 묵상 –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 말 한마디가 영혼을 살린다

    잠언 15장 4절 묵상은 온유한 혀가 생명나무임을 보여준다.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요, 패역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우리의 말은 영의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다. 생명을 살리는 말과 성결한 혀를 회복하는 길을 다루는 말씀 묵상.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이나 패역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잠언 15:4 (직역성경)

    잠언 15장 4절 묵상은 우리의 말이 얼마나 깊이 영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은 귀로만 듣지 않는다. 마음과 혼, 그리고 영으로도 듣는다.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영의 흐름이다. 왜곡된 말은 영을 상하게 하고, 온유한 말은 영을 살린다. 말의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힘이 존재한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왜곡된 생각이 영을 상하게 한다. 낙심과 두려움이 밀려올 때, 사탄은 거짓된 말들을 생각 속에 뿌린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영이 약해진다. 이는 참소의 말에 동의한 결과다.

    나 또한 무심코 왜곡된 말로 이웃의 영을 상하게 한 적이 있다. 입술을 통해 생명이 아닌 왜곡이 나간 것을 회개한다. 그리고 내 생각과 혀가 더 이상 대적의 통로가 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한다. 내 마음과 입술이 여호와 앞에서 정결하고 거룩하게 되기를 구한다.

    이 묵상을 통해 오늘 다시 선포한다. 나의 혀가 생명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말 한마디로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입술이 되게 하소서.

    주여, 내 생각과 말을 정결케 하소서. 사탄의 참소에 동의하지 않게 하시고, 온유한 혀로 생명의 말을 전하게 하소서. 내 입술을 통하여 영이 살아나게 하소서. 아멘.


    원 본

    잠언 15:4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이나 패역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직역성경)

    사람의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혼으로도 어떤 말과 생각을 듣는다. 패역한 혀, 곧 뒤틀리고 왜곡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말은 곧 영의 세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영의 현실이 말을 통해 전달되어진다. 그러니 사람의 영이 온유한 말을 들을 때 살아나고, 뒤틀리고 왜곡된 말로 인해 상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 특별히 누구로부터 어떤 입의 말을 듣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자신의 영을 상하게 할 때가 나는 있었다. 최근에도 그랬다. 즉 어떤 환경과 상황이 나의 영을 상하게 하였다. 영이 상하여 잠시 낙담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오늘 말씀을 읽으며 깨닫게 되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탄이 나의 생각과 귀에 뒤틀린 혀의 말들을 뿌린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받은 것이다. 즉 대적이 뿌린 참소의 혀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의한 것이다. 나의 영이 상함을 입었다면 이것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입이 비뚤어지고 왜곡된 말들의 통로가 되어 이웃에게 나갈 때도 있다. 이 시간 나도 모르는 사이 사탄의 참소하는 말에 동의한 것을 회개한다. 그리고 나의 입이 대적의 통로로 사용되어진 것들을 회개한다. 그리고 더욱 깨어 생각과 마음을 여호와 앞에서 성결할 것을 다시 선포하며 기도한다. 아멘.

  • 거역과 완고함의 뿌리와 자아라는 우상 | 잠언 12장

    잠언 12장을 읽으며 거역과 완고함의 문제를 살피고, 자아의 우상 앞에서 점치는 죄를 돌아보고, 성령 안에서 치유받는 길을 묵상한다. (직역성경 포함)

    잠언 12:1 [흠정역]

    “훈계를 사랑하는 자는 지식을 사랑하나 책망을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자아의 우상과 거역의 뿌리

    오만한 자는 책망 받기를 싫어하고, 주님의 명령과 가르침을 밀어낸다. 나도 그런 경우가 많다. 이유는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의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거역을 주술과 같다고, 완고함을 우상숭배와 같다고 말한다. 나도 스스로 자아라는 우상을 섬기며 그 앞에서 점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악한가. 속히 돌이켜야 한다.

    주님께서는 어느 정도 이해해주실 것이다. 5살 아이에게 청년의 것을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언제까지 용납되겠는가. 글쎄다.

    세대의 상처와 치유의 길

    “사악한 자들의 말들은 숨어 기다리다가 피를 흘리기 위한 것들이지만, 올바른 자들의 입은 그들을 구출하리라.” 저들은 실수하거나 내 뜻대로 안 따라주면 책잡아 비난하려 한다. 나도 자녀를 대할 때 그런 모습이 있었다.

    조상에게 받은 상처가 ‘소울 타이’로 흘러 자녀에게 전해진다. ‘소울 타이’는 영적·정서적 유대가 끊어지지 않아 세대 간 영향을 주는 상태를 말한다. 이 고리를 끊는 유일한 길은 조건 없는 사랑과 긍휼의 회복이다. 여호와께서 나아만 장군을 치유하셨듯, 나도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듯 치유받기를 구할 뿐이다.

    성령 안에서의 죽음과 적용

    문둥병이 무엇인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영적으로 감각이 둔하면 나도 문둥병에 걸린 것이다. 죄의 대가다. 나는 지금 어떤 완고함에 머물러 있는가. 오직 성령께 완전히 잠겨 죽는 길만이 해답이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자.

    “거역하는 것은 마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숭배와 같으니이다.” (삼상 15:23, 흠정역)


    원본 교정본

    오만한 자는 책망받기를 싫어하여 주님의 명령과 가르침들을 밀어낸다. 나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다. 주된 이유는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의 반응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 말하는가. 거역은 주술과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숭배라 말한다. 그렇다면 나도 스스로 자아라는 우상을 섬기며 그 앞에서 점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악한 죄인가. 속히 돌이켜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주님께서는 어느 정도 이해해주실 것이다. 5살 아이에게 청년의 것을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언제까지 용납되겠는가. 글쎄다.

    오늘의 잠언을 주욱 읽으면서 완고하여 거역하는 자들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내게 크게 닿는 말씀이 있었다.

    “6 사악한 자들의 말들은 숨어 기다리다가 피를 흘리기 위한 것들이지만 올바른 자들의 입은 그들을 구출하리라.”

    저놈이 잘하나 못하나 보는 것이다. 실수하거나 나의 뜻대로 안 따라주면 책잡아 비난하기 위한 것이다. 내가 긍휼을 베풀어준 만큼 너도 이 정도는 해야지, 이런 것이다. 참 잔인하지 않은가.

    어쩌면 자녀들을 향한 나의 모습이다. 내가 조상에게 받았고 ‘소울 타이’가 되어 자녀들에게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조상들보다 얼마나 더 잔인한 사람인가.

    나는 언제나 조건 없는 사랑, 무조건적인 긍휼을 베풀어줄 수 있을까. 속사람의 치유, 곧 트라우마의 치유이다. 여호와께서 나아만 장군도 치료해 주셨다면 내게도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글 수 있는 축복을 달라고 구할 뿐이다.

    문둥병이 무언가. 고통을 못 느끼면, 영적으로 감각이 둔하면 나도 문둥병 걸린 것이다. 죄의 대가이다. 그러니 무엇을 구할까. 성령께 완전히 잠겨 죽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있을까.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실 때 성령께서는 문 밖에서 기다리셨을까. 나는 지금 이대로 요단강에 몸을 담글 수 없는 것일까. 성령의 강에 문둥이 몸을 담그는 것과 성령께서 내게 임재하시는 것은 다른 것인가. 내 육체도 죄인의 집인데 내게는… 괴롭다.

    “거역하는 것은 마술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 숭배와 같으니이다.” (삼상 15:23, 흠정역)


  • 거만 뒤 따라오는 수치, 겸손이 부르는 지혜 – 잠언 11:2

    잠언 11:2 말씀과 나의 경험을 통해 거만과 수치, 겸손과 지혜를 깨닫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묵상. 본문 전체의 중심 말씀으로, 묵상과 경험의 배경을 안내한다.

    잠언 11:2 [직역성경] – “거만함이 들어올 때 수치가 들어오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지혜가 있다.”

    거만함과 수치

    잠언 11:2 [직역성경] 말씀처럼, 혈기를 부린 후 대부분 혼자 있고 싶었다. 집에서든 어디서든 화를 낸 뒤에는 씩씩거리며 담배 한 가치 물고 혼자 어딘가로 가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이게 바로 수치가 거만함을 따라오는 것이다.

    언쟁 후 성찰

    말씀처럼,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조근조근 입을 열었더라도 언쟁 후 숨고 싶다면 스스로 거만하다는 증거다. 누가 처음부터 지혜롭고 겸손하겠는가? 우리 모두 처음에는 거만했다. 나도 자녀, 아내, 아랫사람들에게 불완전한 권위자였다.

    겸손과 지혜의 길

    딸이 말했다. “아빠, 그때 나 14살이었어.” 나는 웃으며 갱년기 같다고 말했지만, 혈기 많은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그러하다. 입을 열고 난 후 수치심을 안다. 거만이 따른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지혜를 구한다. 잠언 11:2 [직역성경]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겸손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예수님을 신뢰하며 거만을 끊기 위해 오늘도 걸어간다. 아멘.


    원본

    나의 경험상, 혈기를 부린 후 대부분 혼자 있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는 말이다. 일을 하며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집에서든 어디서든 화를 낸 이후에는 대부분 씩씩거리며 담배 한가치 물고 혼자 어디론가 가더라. 이게 다 무엇인가. 바로 수치가 거만함을 따라 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꼭 큰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도, 잔잔히, 조근조근 입을 열었다 하여도 언쟁이 끝난 후에 혼자 어디론가 숨고 싶다면 이는 분명 본인이 거만하다는 증거임을 기억하자.

    그러나 어느 누가 처음부터 지혜롭겠는가. 누가 처음부터 성숙한 권위자이겠는가. 누가 처음부터 겸손하겠는가. 권위자의 상처가 나의 부모님만 해당되겠는가. 아니다. 학교, 상사, 영적 권위자 다 포함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처음에는 모두 거만하였다. 나도 자녀들에게, 아내에게, 그리고 나의 아랫사람들에게 똑같이 불의한 권위자이다. 그러니 할 말 있는가. 나의 딸이 “아빠 그때 나 이제 14살이었어” 라는 말을 잊을만 하면 한번씩 한다. 그 아이 14살때 나는 딸에게 어떤 아빠였는가. 불과 5년 전 나의 모습이다.

    딸이 내게 그러더라. 아빠 요즘 갱년기 같다고. 내가 웃었다. 갱년기는 홀몬의 변화 반응이지. 그 혈기 많고 소리 지르던 아빠의 요즘 모습이 딱 갱년기 증상이라는 것이다. 내가 아직 육십도 안 되었는대 무슨 갱년기인가. 그런데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 혈기 충만한 80세 여성도 나는 보았다. 우렁찬 목청으로 엄청 지르더라. 갱년기를 격는다고 혈기가 빠지나.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입이 열린 후의 수치심을 이제 나는 안다. 내가 거만하여 그것이 따라온것도 안다. 그 느낌이 싫다. 그래서 지혜를 더욱 구하는 것이다. 겸손하려고, 겸손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려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자 되어 거만, 곧 선악나무의 열매들을 끊기 위하여 지금도 걸어가는 것이다. 아멘. 예수님 도와주세요.

  • 지혜의 꿀과 음녀의 꿀, 분별하기 – 잠언 5장

    잠언 5:1-4을 통해 ‘지혜의 꿀’과 ‘음녀의 꿀’을 분별하는 길을 묵상합니다.
    겉보기에는 비슷하지만 열매가 다릅니다. 지혜에 경청하고 명철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이 오늘 나를 인도하심을 느낍니다.

    잠언 5:1-4 (직역)
    내 아들아, 내 지혜에 경청하고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판단력을 유지하고 네 입술의 지식을 지켜라.
    참으로 부도덕한 여자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녀의 혀는 기름보다 매끄러우나 그녀의 마지막은 쑥처럼 쓰고 양날 선 칼처럼 날카롭다.

    지혜의 꿀과 음녀의 꿀

    잠언 5장은 지혜와 음녀의 입술을 대조하며, 겉보기에는 꿀처럼 달지만 결국 쑥처럼 쓰디쓴 결과를 경고합니다.
    오늘 말씀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지혜에 경청하고 명철에 귀 기울이는 삶을 요구합니다.

    지혜의 꿀과 음녀의 꿀은 처음엔 구분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 지혜: 생명을 낳습니다.
    • 음녀: 멸망을 낳습니다.

    분별하는 삶과 명철

    나는 매일 잠언을 묵상하며 그날의 ‘네비게이션’을 받습니다.
    아직 가지 않은 길의 지도, 예수님께서 오늘 나를 이끌어 가실 방향입니다.
    때로는 음녀의 속임을 분별하지 못하고 아픔으로 배우기도 하지만,
    현실 속에서 분별력과 명철을 몸소 익혀 갑니다.

    오늘의 네비게이션: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은 병자를 위해 오십니다.
    상처받은 자, 저주 속에서 몸부림치는 자,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은 자에게 오십니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셔야만 하는 자리입니다.

    오늘도 나는 그분의 말씀을 네비게이션 삼아 나아갑니다.
    “예수님, 당신이 곧 말씀이시죠. 이제 어떻게 하실래요?”


    원본 묵상 글

    무엇으로 음녀의 속임을 간파하는가. 지혜가 내 혀에 꿀과 같은데, 음녀의 입술도 꿀을 떨어뜨린다. 다른 것이 있다면 열매이다. 열매가 다르다. 그러나 그 처음은 너무도 비슷하여 무엇이 음녀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지혜처럼, 내 혀의 꿀처럼 위장하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서는 경청하라고 한다. 지혜에 경청하라. 명철에 귀를 기울이라. 이는 단순히 말씀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적으로 깨달으라는 말은 더욱 아니다. 나는 매일 아침 지식으로 공부한 잠언을 묵상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하나도 기록하지 않는다. 매일의 잠언을 읽으면서 내게 다가오는 것들을 붙잡는다. 붙잡고 그 시에 받은 감동들을 적어 나간다. 내가 살아낸 말씀들을 적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한다고 감동으로 받은 것 같은 묵상들을 적는 것이다.

    마치 오늘 가야 할 길의 내비게이션 같은 것이다. 오늘의 출발선이다. 아직 가지 않았다. 그 안내대로 가야 할 매일의 숙재가 있는 것이다. 내가 지혜를 경청하고 명철에 귀를 기울이는 나만의 방법이다. 그럼에도 어떤 것은, 어떤 응답은 음녀에게서 온 것임에도 분별하지 못하고 받는 경우가 있는 것 같더라. 그런 것들은 꼭 쓰고 아프다.

    나는 환상 속에서 살지 않는다. 현실을 산다. 양자얽힘이 작용하는 현실에서 산다. 지금의 기범이가 과거의 기범이를 예수님께 안내하듯이, 먼 훗날 예수님 옆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는 기범이가 동일하게 지금의 나를 예수님께서 이끌고 있다. 마치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먼 바울의 환상 속에 펼쳐졌던 미래의 바울이 지금의 자신을 아나니아에게로 이끌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이처럼 나는 현실을 살면서 분별하는 법을 몸소 배우는 것이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처받은 치유자가 되려면 먼저 상처를 심하게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저주를 누가 끊는가. 먼저 저주 가운데 파묻혀야 할것 아닌가. 어둠을 뚫고 나오려면 먼저 어둠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적이 속여 빼앗아간 많은 것들을 예수님께서 다 되찾게 해주신다고 전에 내게 말씀하셨다. 그러려면 먼저 수도 없이 속아 빼앗겨야 하지 않겠는가. 죽은 자가 부활하는 것이다. 문둥병에 걸려야 고침을 받지. 아파야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겠는가. 의사는 병자를 위해 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나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내게 오셔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죄인이고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약하고 여전히 혼자서는 아무것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이끌어 가시려고 매일 주시는 네비게이션들, 수도 없이 쌓여 있다. 예수님, 당신께서 곧 말씀이시죠. 이제 어떻게 하실래요? 미래의 기범아, 지금 나를 응원하고 있지?

  • 잠언 4장 묵상: 훈계를 붙잡고 악인의 길을 피하라

    잠언 4장은 훈계를 붙잡고 놓치지 말라는 지혜의 핵심을 강조한다. 이 말씀은 영적 분별력과 기도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함을 상기시킨다. 선으로 위장한 악의 올무를 분별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을 묵상한다.

    잠언 4:13-14 ― “훈계를 붙잡아 놓치지 말고 지켜라. 참으로 그것이 네 생명이다. 악인들의 길로 들어가지 말고 악한 자들의 길에서 활보하지 마라.” (직역성경)


    훈계를 붙잡는 이유

    잠언 4장은 훈계, 지혜, 악인의 길을 핵심 주제로 삼는다.
    하나님께 받은 교훈을 붙잡고 지키는 삶이 생명의 길임을 말한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기도와 분별을 통해 선으로 위장한 악을 이겨내야 한다.

    악인의 길을 분별하는 법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 겉으로는 선한 길처럼 보여도 영적 속임이 숨어 있다.
    기도로 묻고 응답을 받는 습관이 분별의 핵심이다.
    훈계를 붙잡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때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영적 성장과 훈련의 과정

    아이들이 부모의 보호 아래 있듯, 성도도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다.
    그러나 성장할수록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해야 한다.
    넘어짐과 실수를 통해 훈계를 배우고, 영적 분별력이 자라난다.
    이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군사로 훈련되는 길이다.

    결론

    이 땅의 삶은 하나님의 눈앞에 있는 훈련장이다.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니 예수님 도우심을 구하며, 훈계를 붙잡고 악인의 길을 피하라.
    “예수님, 도와주세요. 아멘.”


    묵상 원본: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그것이 일반적인 선한 길과 같아 보일 수도 있다. 선한 자의 발목에 올무를 걸기 위해 교묘하게 위장한다. 영의 세계가 실재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이 땅에서도 더욱 교묘하게 속임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로 묻고 응답을 받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훈계를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붙잡았으면 놓치지 말고 지켜야 한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가. 전에 응답을 받았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물어보는 것이다. 대적의 전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탄의 올무가 마치 하나님의 응답처럼 오지 않는가.

    아이들은 부모의 보호를 받는다. 그러니 그 바운더리 안에서 행복하게 놀면 된다. 그러나 장성하여 부모의 바운더리(보호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되면, 이제는 많은 것을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해야 한다. 적의 공격에 더 노출되는 것이다. 실수하여 넘어지고 올무에 걸린다.

    그렇게 훈계를 배운다. 왜 이런 상황들이 허락되었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뭐가 달라졌는지 등등 배워가며 훈계를 받아 전략을 수정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점점 더 그럴듯하게 선으로 위장한 악인의 올무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땅은 성도를 하나님의 군사로 훈련시키는 최첨단 홀로그램 서바이벌 훈련장이다. 실체인 영적 세계보다 더욱 실제 같아 보인다. 나의 모든 삶이 하나님 눈앞에 있는데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나 혼자서는, 나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님 도와주세요. 아멘

  • 포도주와 독주, 그리고 용서 – 잠언 20장

    잠언 20장 말씀을 통해 포도주와 독주가 사람을 속이는 것처럼, 우리의 분노와 조롱이 삶을 가리운다는 깨달음을 나눕니다. 건망증과 실수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닮아가는 삶, 용서와 사랑의 변화를 묵상합니다.

    잠언 20
    1 포도주는 조롱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날뛰게 하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그것들에 의해 속는 자는 지혜롭지 아니하니라. (흠정역).

    나는 오늘 누구를 조롱하였는가, 분하여 날뛰었는가. 밤에, 졸릴 때 짜증 부리는 어떤 아이를 조롱하였나. 그렇진 않았다. 최근에 교회 가는 길에 아내가 무엇을 집에 놓고 왔다. 예전의 나였으면 어떠했겠나. 길길이 날뛰었겠지.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한마디 하려는데 자동으로 입이 닫혔다. 속에선 부글부글 끌었지. 그리고 잠시 후에 사랑스러운 얼굴로 “여보 최고, 엄지 척, 여보가 제일 이뻐”가 나왔다. 나 많이 변했다.

    포도주와 독주는 속인다. 자신을 못 보게 한다. 자기 눈의 들보를 가린다. 차 키를 깜박하여 자동차 옆에서 온 가족 기다리게 한 적이 한두 번이었나. 우산통에 열쇠 던져 넣고 한 시간 반을 씩씩거리며 찾아 헤맨 적도 있었다. 나로 말하면 건망증 대환자이다. 깜박 깜박! 그러나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아빠 하나님은 감사하지 않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자비하시다. 그러니 너희도 아빠를 닮아 긍휼을 베풀라. 판단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라, 아낌없이 주라고 하시는 것이다. 내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말은 곧 이웃을 판단 정죄 안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악나무의 열매, 포도주와 독주를 입에도 대지 않는 자가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먼저는 자신을 위한 것이요 둘째는 선악나무의 열매를 초월하여 예수님처럼 아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 오만한 자와 지혜로운 자, 회개와 지혜의 길- 잠언 14장

    잠언 14장을 통해 오만한 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를 묵상합니다. 회개와 예배, 주님 앞에 머무는 삶 속에서 참된 지혜를 얻는 길을 나눕니다.

    잠언 14
    6 오만한 자는 지혜를 찾으나 없고, 깨달은 자는 지식 얻기가 쉽다. 7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 떠나라. 네가 지식의 입술들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직역성경)

    오만한 자는 이미 창조주를 거역하였다. 그분의 모든 지혜와 사랑을 거절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떤 지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오만한 자는 쉽게 욱 하고 분을 낸다. 심판자를 대신하여 자기 눈의 들보로 판단하고 정죄하기 때문이다.

    지혜를 찾으려면, 조언을 들으려면 먼저 창조주를 대적하였던 것과 그분의 사랑을 버린 것부터 회개하여 자신의 뜻과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 그다음 지혜로부터 주어지는 훈계와 책망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쉽지 않다. 아프고 쓰리다. 그러나 그렇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어제 못했어도 괜찮다. 회개하고 오늘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악한 영이 뿌린 생각에 잡힌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그것에 잡혀 순간 욱 하며 열렸던 입을 다시 회개하는 것이다.

    매주 한 번씩 예배를 섬기는 것이 나의 일주일을 그분 앞에 서게 만든다. 지난 50일 특별 기도 때는 매주마다 3일씩 연속으로 예배를 섬겼다. 딴짓할 정신이 없었다. 오로지 주님 앞에여야만 그것을 감당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라. 그때 참 행복하지 않았나.

    오늘 행복하고 싶다면 다른 것 없다. 그냥 주님 앞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주님 집에서의 문지기 하루가 이 땅에서의 천년보다 좋은 것이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을 옆에 두고는 지식의 입술들을 배울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어리석은 자라면 어쩌겠는가. 성령 안에서 자아를, 육체를 쳐서 영에 복종하도록,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십자가 사형틀에 매달아 버리는 것이다. 토설하고, 회개하고, 방언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며 영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육체의 정욕에 끌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혼이 영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의 전에서 문지기라도 좋사오니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다.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지혜의 입술에 날마다 귀 기울이는 것이다. 사랑합니다. 예수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