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회개

  • 잠언 5장 묵상: 음녀의 길 안전하게 피하는 방법

    잠언 5장 6-8절을 통해 음녀의 길이 얼마나 위험하며, 예수님의 순종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묵상합니다. 오늘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지혜와 놀라운 깨달음을 함께 나눕니다.

    “Lest thou shouldest ponder the path of life, her ways are moveable, that thou canst not know them. Hear me now therefore, O ye children, and depart not from the words of my mouth. Remove thy way far from her, and come not nigh the door of her house.” (Pro 5:6-8, KJV)

    음녀의 길의 위험

    오늘 잠언 5장 6-8절을 들여다보면, 음녀의 길이 움직이므로 우리는 그 길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에도 길이 변할 수 있어, 잘못된 발걸음은 끝없는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그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퍼즐처럼 비밀을 아는 자만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 길을 걸으셨고, 완전한 순종으로 안전한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걸으신 길만 따라가면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에서 떠나지 않으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입니다.

    반복과 회복

    하지만 이 길은 쉽지 않습니다. 훈계와 책망이 따라오고, 우리는 넘어지고 회개하며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반복 속에서 음녀의 길을 멀리하고 그녀 집 문에 가까이 가지 않는 삶을 배워갑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결국 안전하게 그 길을 지나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적용해 보세요. 아멘.


    묵상 원본

    오늘 이 잠언의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음녀의 길이 움직인다. 그래서 너는 그것들, 음녀의 길을 알 수가 없다. 딱 이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피하나? 나의 한 걸음을 바닥에 놓는 그때에 음녀의 길이 나의 발밑으로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올무 아닐까?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디디는 순간 땅이 꺼져 끝없이 떨어지는 그런 길. 퍼즐, 즉 비밀을 아는 자만 꺼지지 않는 정확한 지점을 밟아 그 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누가 먼저 앞장서겠는가?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가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셨다. 그러니 그분이 밟고 가셨던 그 자리만 밟으면 된다. 예수님만 그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쉽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입의 말들을 듣고 행하며 그 말씀으로부터 떠나지 않는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어렵다. 그러니 훈계와 책망이 따라온다. 듣고 회개하면 주께서 다시 회복하여 주신다. 잘못 발을 디뎌 떨어지기 직전의 상황으로 되돌려 주신다. 이제 다시 예수님만 따라가면 된다. 넘어지고 회개하고, 또다시 넘어지고 회개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음녀의 길을 멀리하고 그녀 집 문에 가까이 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길 끝까지 다 가 있을 것이다. 아멘.

  • 잠언28장: 숨긴 죄는 형통을 막고, 자백은 자비를 부른다

    잠언 28장 13절은 우리에게 죄를 숨기면 형통하지 못하지만,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자비를 얻는다고 말한다. 속사람 치유의 과정에서 우리는 과거의 죄뿐 아니라 지금의 죄까지 고백하며 진정한 회복을 경험한다.

    “자기 범죄들을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자비를 얻을 것이다.” (잠언 28:13, 직역성경)

    하나님께서는 숨김없는 자를 기뻐하신다. 속사람의 치유는 단순한 감정 회복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죄를 직면하고 자백하는 과정이다. 과거의 잘못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관계 속의 죄까지 함께 고백할 때 진정한 회복이 일어난다.

    자녀를 향한 부족함을 깨닫고 미안함을 표현하는 일, 오래된 상처를 남긴 이에게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일은 믿음의 실천이다. 용서는 나의 몫이지만, 회개는 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신다.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도, 가족에게도 숨김없이 진심으로 사과할 때 그곳에 은혜가 임한다. 숨긴 죄는 형통을 막지만, 고백은 하나님의 자비를 여는 열쇠다. “예수님, 내 속의 악한 것들이 다 드러나게 하소서.” 기도합니다.


    묵상 원본

    속사람 치유를 받을 때마다 숨겨진 자신의 범죄함을 깨닫고 회개하며 돌이키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자녀들이 자라가면서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몫이다. 그러나 작은 자 한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속사람 치유를 받을 때 과거의 잘못만 회개하는가? 나는 그렇게 않되더라. 그 사건으로 인해 지금 나의 자녀들에게 내가 그렇게 악하게 하였음을 함께 깨닫고, 지금 나의 죄를 동시에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누구에게든 범죄함이 드러났으면 반드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은 당연하다. 더하여 이웃을 찾아가 미안하다고, 용서의 한마디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속사람 치유도 받고, 국민학생 때 욕하고 떠나간 선생님도 찾아가 죄송하다고 말하고 하는 것이다.

    나도 소문난 장난꾸러기였다. 사촌 누나 얼굴에 불침 한 방 놓고 고모한테 마빡 맞은 적도 있고 그러지 않았나. 나중에 미안하다고 다 고백했다. 내 동생은 오빠가 자기 발가락에 불침 놨다고 아직도 말하고 다닌다. “너 자다가 새끼발가락에 불침 맞아봤어?” 인상 깊었나 보다.

    아이들에게도, 아내한테도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지. 입 다물겠는가? 나의 권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입 다물겠는가? 권위자는 무조건 선인가? 아니다. 그러니 자기 범죄를 숨기지 못한다. 할 수 있는 한 나의 범죄함을 다 고백하겠다. 그러니 예수님, 더욱 내 속의 악한 것들이 다 드러나게 해주세요. 아멘.

  • 잠언 27장 묵상 – 사랑이 있는 책망, 상처 주는 비난

    공개적인 책망은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공개적인 비난은 관계를 무너뜨린다. 잠언 27장을 통해 사랑의 언어와 관계 회복의 지혜를 배운다.

    공개적인 책망이 비밀을 지켜주는 사랑보다 낫다. 사랑하는 자의 상처들은 신실한 것들이지만 미워하는 자의 입맞춤들은 속이는 것들이다. (잠언 27:5‑6,직역성경)

    잠언 27장 말씀 묵상을 통해 오늘 우리의 말과 태도를 돌아보자.

    비난과 책망의 차이

    청년 시절 피지에서 학교를 섬길 때의 일이 있었다. 어느 날, 함께 일하던 현지인 친구에게 이유도 모른 채 따귀를 맞았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은 내가 그의 문화 속에서 공개적인 비난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큰 수치를 느끼고 공동체를 떠났다. 당시 나는 그것이 단순한 ‘책망’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비난’이었다.

    사랑의 언어 배우기

    우리 문화 속에서도 ‘책망’이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집안에서도,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그렇다. 비난은 상대의 마음을 닫게 하지만, 신실한 사랑의 책망은 관계를 세운다.

    나 또한 자녀들에게 공개적인 비난을 자주 했다. “아가야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는 괜찮지만, 그 앞에 “너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라는 말이 붙으면 비난이 된다. “밖에 추우니 따뜻하게 입어”는 사랑이지만, “추우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는 비난이다. 나는 그렇게 자주 입으로 상처를 주었다.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

    비난을 멈추려면 스스로 권위자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불의한 권위자처럼 느낀다면 이미 비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낮아짐에서 시작된다. 자녀가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함부로 말해요?”라고 말할 때, “미안해, 아빠가 몰랐어”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때 아이는 “아빠, 내가 용서해드릴게요”라며 마음을 연다.

    묵상과 적용

    공개적인 책망은 관계를 세우지만, 공개적인 비난은 관계를 무너뜨린다. 오늘 말씀은 나의 동기를 주님께 맡기라고 가르친다. 사랑하는 자의 상처는 신실하다. 예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주 앞에 엎드리면 된다.
    묵상 포인트: 오늘 나는 사랑으로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비난으로 말하고 있는가?
    적용: 이 말씀을 묵상하며 나의 언어를 돌아보세요.


    묵상 원본

    청년때 피지에서 학교를 섬길 때 일이다. 8-9개월쯤 되는 어느 날, 함께 성실하게 함께 섬기는 나의 동갑 현지인 친구에게 어느 날 갑자기 따귀를 후려 맞았다. 평소 나를 좋아하던 고2 남학생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고 아 아이가 알려주는데로 친구를 찾아가서 나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던 적이 있다. 그 이후, 그 지역 최고의 존칭인 마스터라는 호칭으로 학생들이 나를 불렀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나라 문화권에서 공개적인 비난을 했던 것이다. 그 친구는 큰 수치감에 결국은 공동체를 떠났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는 책망을 한다고 하면서 공개적인 비난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집에서는 식구들 끼리니까 괜찮을 수 있다. 직장이야 뭐 별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니 그렇다고 하자. 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생기더라. 어늘 날, 몇 달 전에 나의 아들이 내게 불편한 말을 건냈다. “아빠 그때 정말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내 맘을 이해해주는 아들에게 얼마나 고마왔던지… 그러나 나도 누군가에게 그러지 않았을까.

    나도 자녀들에게 공개적인 비난 많이 한다. “아가야 이렇게 해줄 수 있을까?” 이건 괜찮다. 그러나 그 앞에 “너 지금 아무것도 않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비슷한 말이 붙으면 이건 비난이다. 내가 잘 하는 짓이다. “밖에 추우니 따뜻하게 잆어” 이거 좋다. 그러나 뒤에 “추우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 요 말도 딱 비난이다. 내가 많이 했던 말들이다. 나도 입이 험하고 거칠다.

    혹시 나도 그런가, 궁굼하다면 스스로 분별하는 법이 있다. 자신을 불의한 권위자라고 생각한다면 거의 100% 그렇게 하고 있다 여기면 되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더 예뻐하고 그 옆의 아이는 모른체 한다면 그것도 비난이다. 옆에 있는 아이는 그저 멍 때리며 바라볼 뿐이다. 소외된 마음과 함께… 정작 비난하는 자는 자기가 무얼 하는지 모른다.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함부로 말해요?” 이런 비슷한 말을 자주, 가끔 듣는다면 그는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하나. 미안해, 아빠가 잘 몰랐어. 무조건 해야 한다. 그러면 6살짜리가 뭐라는지 아는가. “아빠 내가 용서해드릴게요” 한다. 그래, 나도 용서를 받아야지. 그런데 권위자는 미안하다는 말을 안하더라.

    그래서 다시 회개한다. 공개적인 책망이 아니라 공개적인 비난을 했던 모든 말들을 회개한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이 있다. 사랑하는 자의 상처들은 신실하다고 인정해주는 오늘 잠언의 말씀이 내게 말하지 않는가. 내 마음의 동기를 주께서 알아주시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말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도 괜찮아, 주님 앞에 엎드리면 되, 예수님이 알아주시면 되는 것이다. 아멘.

  • 잠언 24장 묵상: 오만을 버리고 회개로 일어서라

    잠언 24장 성경묵상으로 오만을 버리고 회개와 인내로 다시 일어서라. 잠언 24장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지혜와 명철로 세워지는 성전의 삶을 묵상하며 실천하자.

    잠언 24:9-10
    “우둔한 자의 간계는 죄며 오만한 자는 사람에게 가증하다. 네가 환난 날에 약해지는 것은 네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직역성경)

    오만은 하늘과 땅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사탄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천사들의 1/3을 꾀었다. 오만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모를 거역하며 형제를 원수로 만든다. 오만한 마음은 파괴를 낳고, 입술은 고생을 말한다. 오만은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오만을 깨닫는 순간이 회개의 시작이다. 내 속의 오만함은 여전히 나를 괴롭게 하지만, 회개할 때마다 마음이 새롭게 된다. 마음이 상한 만큼 회개하지 못하면, 복수심과 비뚤어진 말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진실한 회개는 내 안의 성전을 다시 세운다.

    환난 날에 약해지는 이유는 내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지혜와 명철로 집이 세워지고, 나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내 안의 지혜께서 그분의 집을 짓도록 맡겨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인내로 구원을 이루고, 회개로 믿음을 지켜야 한다.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고, 주님의 은혜로 굳건히 서야 한다. 각 단락의 시작부터 ‘오만’, ‘회개’, ‘인내’ 키워드를 반복 강조하며 메시지를 강화한다. 그렇게 할 때 여호와의 성전의 기둥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 믿음과 구원의 길은 인내로 완성된다.

    나의 목숨을 지키시는 여호와께서 각자의 행위대로 보상하신다. 그러니 달려가자. 끝까지 인내하며 여호와를 경외하자. 주님이 도우시고 지키시며 붙들어 주신다. 아멘.


    묵상 원본

    오만함은 하늘과 땅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사탄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천사들의 1/3을 꾀어냈다. 오만하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모를 거역하며 스스로 형제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파괴를, 입술은 고생을 말한다.

    그것이 내 속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나를 괴롭게 한다. 나의 마음이 상해 있는 만큼, 깨닫지 못해 회개하지 않은 만큼, 복수하려는 마음과 비뚤어진 입의 말들이 나가는 것이다.

    환난 날, 오만한 자의 지배를 당할 때 약해지는 이유는 나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할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묵상하는 것이다. 지혜와 명철로 집이 지어진다. 나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집이다. 그러니 내 안에 계신 지혜께서 그분의 집을 지으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오직 다시 일어나는 것뿐이다. 인내함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 회개하여 일어나고, 또다시 회개하여 일어나고를, 다시는 넘어지지 않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여호와의 성전의 기둥과 같은 존재가 되어져간다. 나의 목숨을 지키시는 여호와께서 각자의 행위대로 보상하신다.

    그러니 달려가자. 끝까지 인내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자. 주님이 도우시고 지키시고 붙들어 주신다. 아멘.

  • 잠언 21:2 묵상 – 여호와께서 마음을 달아보신다

    잠언 21:2 말씀 묵상. 사람은 자기 길이 옳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진심과 동기를 보신다. 삶의 서투름 속에서도 하나님은 교훈과 회개의 길로 인도하시며, 중심을 중요시하시는 주님의 시선을 묵상한다. 오늘의 삶에서 존중과 사랑을 실천하며 마음을 점검하는 도전과 울림을 제공한다.

    “각 사람의 모든 길이 자기 눈에는 바른 듯하나 여호와께서 마음들을 달아보신다.” (잠언 21:2, 직역성경)

    마음 중심을 보는 하나님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믿지만 하나님은 겉보다 마음을 보신다. 인간은 미숙하고 불완전하며, 권위자조차 완전하지 않다. 하나님은 결과보다 마음의 방향을 달아보신다. 마치 어린아이가 넘어지면서도 손길과 사랑을 배우듯, 우리의 부족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선한 마음을 보신다.

    삶에서 배우는 교훈

    나의 인생도 그렇다. 대인관계에 서툴고 표현이 부족했지만 마음까지 거짓된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고 싶었으나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런 나의 중심을 아신다. 아이들이 나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배움을 주고,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는 순간, 나는 겸손과 존중을 새롭게 배운다. 이러한 경험은 독자들에게도 삶의 교훈과 공감을 남길 것이다.

    연약함 속에서도 회복을 원하시는 하나님

    중독이나 습관 같은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정죄보다 회복을 원하신다. 선한 마음을 가진 자는 넘어져도 괴로워하며 다시 일어나려 한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달아보시고 고치시며 새롭게 하신다. 이는 마치 불완전한 도자기를 조심스럽게 빚어 완전하게 만드시는 장인처럼, 우리의 마음을 다루시는 섬세한 손길을 보여준다.

    가정을 통한 배움과 겸손

    가정 안에서도 배움이 있다. 아내를 통해, 자녀를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보고 교만을 버린다. 존중과 사랑을 배우며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곧아진다. 오늘도 나는 결심한다. 존중과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마음을 따라 살아가겠다고. 이 결단을 마음에 새기고 매일 실천하며, 독자도 자신의 삶에서 동일한 결단을 실천하도록 도전받기를 바란다. 이 결단이 반복될 때, 삶 속에 깊은 울림으로 남게 될 것이다.


    묵상 원본

    왜 여호와께서 마음들을 달아보실까. 사람은 미련하고 미숙하기 때문이다. 모든 권위자가 다 불의하기 때문이다. 나의 자녀들만 해도 나와 아내보다는 더 좋은 환경에서 조금 더 나은 권위자 아래에서 성장하지 않는가. 그러니 자녀들이 나보다 모든 면에서 탁월한 것이다. 나처럼 대인관계가 서투른 사람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그 부분에서는 아이들이 나의 선생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사람이 하는 어떤 일들의 결과물을 보시지 않는다. 그 마음들을 보시는 것이다. 나처럼 서투르고 모난 곳이 많은 사람은 정말 모르니 그게 최선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선생님들에게 많이 맞았고, 악명 높은 배문중고등학교에서는 왜 맞는지 이유도 모르고 맞았고, 시험 점수 떨어졌다고 맞았고, 숙제 놓고 와서 맞았고, 쳐다본다고 맞았고, 출석부로 얼굴도 맞고, 허구한 날 단체 기합에, 이래저래 맞았고, 주일에 교회 간다고 맞았고, 기계공으로, 그다음 군대, 거반 30살까지 남자들만 득실대는 세상에서 살면서 매 맞고, 수근거림당하고, 뭐 그랬다. 그때는 다 그리 살았다. 당연한 건 줄 여기고 살았다. 그러니 어찌 알겠는가.

    나도 존중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나의 마음이 여호와 앞에서 굽어졌는가. 악한 마음으로 그리 하였는가. 아닐 것이다. 인간관계하는 법을 모르니, 표현하는 법을 모르니,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하니,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했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닐 뿐이다. 그렇다고 나의 마음까지 거짓된 것은 아니다.

    몰라도 괜찮다. 배우면 된다. 잘못을 깨달으면 회개하면 된다. 그러나 마음의 근본 동기는 어떻게 하겠는가. 예를 들어 습관적인 중독이 있다고 하자. 마음이 선한 자는 그것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끌려간다. 좋아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안 되는 것 알면서도 끌려간다. 나도 아직 끊어야 할 그리 좋지 않은 습관들이 있다. 버럭하는 것, 조급한 것, 가끔 뉴스 보는 것 등.

    그러면 그들의 마음도 악한 것인가. 아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마음들을 달아보신다고 생각한다. 달아보시고 도와주시려고, 고쳐주시려고, 구원하시려고, 새롭게 하시려고, 알려주시려고, 새 힘 주시려고, 존중하고 섬기는 사람 되라고, 사랑을 배우게 하시려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시려고, 기쁘게 받고, 자기 짐을 나누어 지는 방법을 알게 하시려고, 붙들고 있는 우상을 놓을 수 있게 하시려고 등등…

    우리 집의 아내는 나의 도움이요, 큰아이들은 나의 선생들이고, 어린아이들은 나의 과거를 비추는 거울들이다. 아직도 나는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내가 전에는 알지도 못했고 깨닫지도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고 회개하면서 이제서야 하나하나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교만하겠는가.

    어제도 하나 배웠다. 아빠, 잘해주려고만 하지 말고 존중해주려고 해보세요. 그래서 그걸 해보려고 한다. 여호와께서 오늘 나의 마음 달아보시고 기뻐하신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아멘.

  • 잠언 15장 4절 묵상 –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 말 한마디가 영혼을 살린다

    잠언 15장 4절 묵상은 온유한 혀가 생명나무임을 보여준다.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요, 패역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우리의 말은 영의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다. 생명을 살리는 말과 성결한 혀를 회복하는 길을 다루는 말씀 묵상.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이나 패역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잠언 15:4 (직역성경)

    잠언 15장 4절 묵상은 우리의 말이 얼마나 깊이 영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은 귀로만 듣지 않는다. 마음과 혼, 그리고 영으로도 듣는다.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영의 흐름이다. 왜곡된 말은 영을 상하게 하고, 온유한 말은 영을 살린다. 말의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힘이 존재한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왜곡된 생각이 영을 상하게 한다. 낙심과 두려움이 밀려올 때, 사탄은 거짓된 말들을 생각 속에 뿌린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영이 약해진다. 이는 참소의 말에 동의한 결과다.

    나 또한 무심코 왜곡된 말로 이웃의 영을 상하게 한 적이 있다. 입술을 통해 생명이 아닌 왜곡이 나간 것을 회개한다. 그리고 내 생각과 혀가 더 이상 대적의 통로가 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한다. 내 마음과 입술이 여호와 앞에서 정결하고 거룩하게 되기를 구한다.

    이 묵상을 통해 오늘 다시 선포한다. 나의 혀가 생명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말 한마디로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입술이 되게 하소서.

    주여, 내 생각과 말을 정결케 하소서. 사탄의 참소에 동의하지 않게 하시고, 온유한 혀로 생명의 말을 전하게 하소서. 내 입술을 통하여 영이 살아나게 하소서. 아멘.


    원 본

    잠언 15:4 온유한 혀는 생명나무이나 패역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직역성경)

    사람의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혼으로도 어떤 말과 생각을 듣는다. 패역한 혀, 곧 뒤틀리고 왜곡된 혀는 영을 상하게 한다. 말은 곧 영의 세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영의 현실이 말을 통해 전달되어진다. 그러니 사람의 영이 온유한 말을 들을 때 살아나고, 뒤틀리고 왜곡된 말로 인해 상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 특별히 누구로부터 어떤 입의 말을 듣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자신의 영을 상하게 할 때가 나는 있었다. 최근에도 그랬다. 즉 어떤 환경과 상황이 나의 영을 상하게 하였다. 영이 상하여 잠시 낙담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오늘 말씀을 읽으며 깨닫게 되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탄이 나의 생각과 귀에 뒤틀린 혀의 말들을 뿌린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받은 것이다. 즉 대적이 뿌린 참소의 혀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의한 것이다. 나의 영이 상함을 입었다면 이것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입이 비뚤어지고 왜곡된 말들의 통로가 되어 이웃에게 나갈 때도 있다. 이 시간 나도 모르는 사이 사탄의 참소하는 말에 동의한 것을 회개한다. 그리고 나의 입이 대적의 통로로 사용되어진 것들을 회개한다. 그리고 더욱 깨어 생각과 마음을 여호와 앞에서 성결할 것을 다시 선포하며 기도한다. 아멘.

  • 의인의 희망과 악인의 두려움, 기쁨으로 끝나는 삶 – 잠언 10장

    나는 잠언10장을 읽으며 의인의 희망과 악인의 두려움을 비교하며 생각해보았다. 기쁨으로 끝나는 삶은 의인의 갈망이 이루어질 때 주어지고, 악인의 두려움은 폭풍처럼 사라진다. 여호와를 신뢰하지 못해 아이들을 붙잡던 내 마음, 혈기에서 벗어나 회개와 성령의 도움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실제 경험을 나눈다.

    잠언 10 24-25,28 (직역성경)
    악인은 두려워하는 것이 그에게 오나 의인들은 갈망하는 것이 주어질 것이다. 폭풍이 지나갈 때 악인은 없어지나 의인은 기초가 영원하다. 의인들의 희망은 기쁨으로 끝나고 악인들의 기대는 사라진다.


    잠언 10:24-28을 보면서, 악인과 의인의 삶이 이렇게 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 악인은 두려움이 임하고, 폭풍이 지나가면 사라진다.
    • 의인은 갈망하는 것이 주어지고, 희망은 기쁨으로 끝난다.

    내가 두려워하던 것이 내게 임하면, 그것 자체가 악이 된다.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으면 분노와 범죄로 이어진다. 모든 두려움은 결국 수치와 고통을 동반하며, 폭풍처럼 사라질 것이다.

    아직 어린 자녀들을 놓지 못하고 있다면, 내 마음도 여전히 주님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해 두려움으로 붙잡고 통제하려 한다. 아이들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혈기가 올라온다. 이런 반응들은 상처와 트라우마의 결과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는 것을 회개하고, 그 사건들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모든 두려움이 떠나가고, 사랑으로 행하는 의인의 갈망이 주어지며, 기쁨으로 끝날 수 있다.

    한 가지 감사한 변화가 있다. 전에는 혈기로 시작해서 혈기로 끝났다. 요즘에는 시작 톤도 낮아졌고, 끝은 기쁨으로 맺어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혈기가 올라와 입이 살짝 열려도 바로 회개가 되며, 스스로를 통제할 힘이 생긴다. 성령께서 나의 입술을 닫아주시고, 주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셨다.

    이제 조금 더 아이들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힘을 빼겠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원본

    의인들의 희망은 기쁨으로 끝난다. 의인들의 갈망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욥이 “내가 두려워하던 것이 내게 임하였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악이다.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으면 분하여 범죄한다. 모든 두려움은 선악과의 열매이다. 수치가 따라온다. 폭풍이 지나갈 때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던 것이 내게 올 것이고, 선함으로 갈망하는 것도 내게 주어질 것이다.

    내가 아직 어린 자녀들을 놓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여전히 주님을 신뢰하지 않아 두려움으로 아이들을 붙잡고 통제하려 하는 것이다. 내 뜻대로 아이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혈기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다 상처와 트라우마의 반응이다.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내가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는 것을 회개해야 한다. 그 사건들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모든 두려움이 떠나가고, 사랑으로 행하는 의인의 갈망이 주어지도록, 기쁨으로 끝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감사한 것이 있다. 전에는 혈기로 시작하여 혈기로 끝났다. 그러나 요즘에는 전보다 많이 낮아진 톤으로 시작하고 끝도 기쁨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혈기가 올라와 입이 살짝 열려도 바로 회개가 되며, 스스로를 통제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주님의 도우심이 있었다. 성령께서 나의 입술을 닫으시는 것이 있다. 얼마나 감사한가. 이제는 조금 더 아이들을 잡고 있던 손을 놓겠다. 조금 더 힘을 빼겠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 총명을 구하고 온전하게 걷는 삶, 크리스천 실제 사례 – 잠언 2

    잠언 2:3-5,7 묵상글. 총명을 구하고 명철을 얻어 회개와 성숙을 경험하며, 천로역정 크리스천 사례로 실제 신앙 여정을 배우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잠언 2:3-5,7
    오직 총명을 위하여 부르짖고 명철을 위하여 네 소리를 높여 은처럼 그것을 구하고 숨겨 둔 보물처럼 그것을 찾으면 그때 네가 여호와 경외하는 것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지식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바른 자들을 위하여 온전한 지혜를 쌓아 두셔서 완전하게 걸어가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니 (직역성경).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완전한 자는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인 욥도 여호와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다. 그러면 누가 바른 자들인가. 온전히 걷는 자들은 누구인가. 예를 들자면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 같은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의 시점은 일반적으로 지금에 고정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예수 믿고 구원 받았어도 아직 이러고 있잖아, 넘어지고 다시 회개하기를 반복하고 있잖아,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예수님은 나의 미래를 보신다. 지금의 모습에 연연하지 않으신다. 언젠가는 되어질 것 아닌가. 넘어지고 다시 울며 회개하여 일어서기를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죄악이 끊어진다. 반드시 끊어지게 되어 있다. 다시는 그 죄에 대해서 넘어지지 않을 때가 반드시 온다. 그러면 그때서야 회개가 된 것인가. 아니다. 그 과정 전체가 하나다.

    5살 기범이가 지금의 나를 막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를 반드시 예수님께로 데려갈 것이다. 그래서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돌파하여 이 땅에서의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 가는 것이다.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은 구원을 받았는가? 받았다. 언제 받았나? 좁은 길의 여정을 출발할 때 받았다. 그 길을 따라가다가 수도 없이 걸려 넘어져도 그는 바르고 완전하게 걸어가는 자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방패가 되신다. 5살 기범이도 성장하게 되어 있다. 반드시 성장한다.

    예수님께서 나는 어떻게 보실까? 동일하다. 끝에서 이기면 그가 승자이다. 경기도 전쟁도 다 똑같다. 50년째 죄에 지고 있어도 끝에 이기면, 그래서 다시 넘어지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가 승자이다. 마치 지금 나의 눈이 여자들에게서, 음녀에게서, 음란물에서 지켜지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안 보는 것이 아니다. 볼 수가 없다. 보고 싶어도 더러운 음란물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나의 눈이 그것에서 돌려진다. 더럽고 징그럽다. 나의 육체는 그것을 원하나 영은 두려워 떠는 것이다. 찰나의 생각조차도 용납되지 않는다. 바로 쳐내지는 것이다. 온전한 수동태이다. 그렇게 되어진다. 전에는 애쓰고 힘써도 끊을 수 없었던 그것이 지금은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되어진다. 할렐루야.

    이제는 5살 기범이와 함께 내 안의 큰 거역을 끊을 차례이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그것, 내가 큰 아이에게 물려준 그것, 그 거역을 끊어내겠다. 선악나무의 열매들을 걷어낼 차례이다. 거역이 끊어질 때 예하도 자신의 상처를 이기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한동안 잠잠하였지만 이제 다시 부르짖고 또 부르짖겠다.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하여 말이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아멘.

  • 지혜로운 자의 말은 깊은 물, 솟아나는 강이다 – 잠언 18장

    잠언 18장 4절 말씀을 묵상하며 지혜로운 사람의 말이 어떻게 깊은 물과 솟아나는 강처럼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지 살펴봅니다. 참된 사랑과 성령 충만의 언어를 배웁니다.

    잠언 18
    4 지혜로운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이고 솟아나오는 강이며 지혜의 근원이다. (직역성경)

    성령님으로 내면에 충만한 사람, 그의 입에서는 깊은 물, 솟아나는 강 같은 말들이 나온다. 이웃을 살리고 자신을 살리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말들이 나오는 것이다. 사람의 입에서 지혜의 근원이 나올 수 있다면 그는 분명히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일 것이다.

    단순히 귀에 달콤한 말들이 아니다. 죄와 수치는 덮어두고 서로 좋은 게 좋은 것이니 하면서 단지 감정만을 위로하는 말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웃의 죄를 지적하여 찌르고 정죄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 둘 다 사탄이다.

    사랑은 억지로 잡아끄는 것이 아니다. 무력으로 강요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노예일 뿐, 사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랑은 이웃의 눈의 티를 보기 전에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본다. 결코 이웃을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혜로운 사람의 입이 내는 말들은 사랑으로 시작하는 말들일 것이다. 예수님처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너희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이며, 주린 자들은 배부를 것이며, 우는 자들은 웃을 것이다. 나로 인해 고난 받는 자들에게는 하늘의 상급이 크다. 그러나 부유하고 배부른 자들, 세상에서 높임받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다.”

    지혜로운 자의 입은 죄인의 마음을 돌이켜 구원받는 회개의 자리로 인도한다. 그 뒤에는 이웃을 위한 끝없는 기도와 섬김이 있을 것이다.

  • 지혜와 예배로 하루를 채우는 삶 – 잠언 8장

    잠언 8장을 통해 주님의 지혜와 예배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삶의 무게 속에서 회개와 순종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법을 배워 보세요.

    잠언 8
    내 입의 모든 말은 의롭고 그것들 안에는 비뚤어짐이나 굽어짐이 없으니 깨달은 자에게는 그것들 모두가 정직하며 지식을 발견한 자들에게는 바르다. 은 말고 내 훈계를 취하고, 정제된 금보다 지식을 취하여라. (직역성경).

    주님의 지혜는 그것을 깨달은 자에게만 꿀 같고 진주 같은 것이다. 그분의 지혜를 듣는 자는 먼저 그분의 훈계를 듣고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속도가 빠르다. 오늘 아침, 또 다른 삶의 무게가 나를 누르려고 한다. 이때 나는 무엇을 하겠는가. 그 무게의 감정을 내가 받아들이려 하는 자신을 보면 회개하고, 동시에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니 주님 손에 던져버린다. 나의 감정을 주님께 다 쏟아 드린다.

    예배는 매주 몇 번 교회 가서 드리는 것이 다가 아니다. 매일, 시간마다, 순간순간 주님을 경험하며 양처럼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양들이라면 모두가 다 그렇게 할 것이다. 세상의 어떤 은금보다도 지금 이 시간에 주님을 만나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 가장 귀하다. 이처럼 나의 하루를 온전히 예배로 채우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나의 친밀한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땅, 즉 내 안에 이루어지도록, 그래서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모든 시험에서 주님이 지켜주시도록, 그분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잘 따라가는 것이다. 오늘 일용할 양식은 내 알 바 아니다. 그것은 목자가 주시는 것이다. 나는 그저 오늘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그것 한 가지를 붙들고 순종하면 그만이다. 입을 닫는 것이다. 교만하여 패역한 입(이것을 지혜가 미워한다)을 닫는 것이다. 내 입이 언어를 잃어버릴 때까지 입을 닫는 것이다. 모세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다.

    외국에 사는 나의 가족을 보니 한국말도 어눌하고, 그렇다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뭐 참 애매하다. 전에 보니 우리 교회 태필린도 잘 못 따라 읽더라. 나의 입도 그렇게 닫혀질 수 있을까. 혀가 어눌하여 패역한 말 자체가 잘 안 나올 때까지 입을 닫을 수 있을까.

  • 잠언 5: 삶과 영적 싸움 – 나의 모든 길을 여호와께서 살피신다

    잠언 5장 말씀을 중심으로, 인간의 본성과 영적 싸움, 교만과 음란에 대한 성찰을 다룹니다. 나의 모든 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켜보시는지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잠언 5
    21 참으로 여호와의 눈앞에 사람의 길들이 있으니 사람의 모든 길을 그가 살피신다. (직역성경)

    사람의 모든 길, 즉 나의 모든 길을 그가 살피신다. 성경은 직설적으로 말한다. 사랑스런 네 아내의 젖가슴으로 흡족해하라. 어찌하여 이방 여자의 가슴을 안고 있느냐? 네 모든 길이 여호와 앞에 있어서 그가 너의 모든 길을 살피고 계신다.

    요셉은 이것을 알았다. 그래서 청년 때에 한순간의 큰 범죄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더라도 차라리 그 편이 그에게는 여호와 앞에서 득죄하는 것보다 더 좋았다.

    일흔이 넘은 은퇴한 어느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다가,

    “내 안에 음란이 그대로 있어, 욱하는 것이 아직도 그대로 있어, 35년이 넘도록 이것과 싸웠는데, 그런데 그것들이 내 안에 그대로 있어. 나는 아직도 이것으로 인해 회개해야 돼”

    하시며 운다. 또 백세 넘으신 자기 아버지 목사님이

    “나의 교만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지금도 나의 교만함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 내 안에 교만함이 그대로 있거든, 아들 박 목사야. 나는 언제까지 이것과 싸워야 할까? 언제까지 이것을 회개해야 할까?”

    하시며 아들 목사를 끌어안고 우셨다는 고백을 들었다.

    그분들의 고백을 들으며 흐르는 내 눈의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단 한 순간의 동정일까, 아니면 나 또한 그것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기 때문일까.

    나 또한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음란과 싸우고 있다. 교만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회개한다. 그런데도 음란한 생각들과 욱하는 마음들, 복수하여 찢어버리고 싶은 생각들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것이다. 사탄이 뿌리는 가라지도 있다. 즉시즉시 처낸다. 그러나 본성은 내 속에서 올라오는 것이다. 물론 분리하면 된다. 그러나 악한 영들의 활동 이전에 나의 육체의 본성이 그것을 원한다. 이제야 인생의 반박에 안 살았으니 뭐 할 말이 있겠냐만은…

    육체는 그렇다. 늘 음란하고 정욕적이며 자기 중심적이다. 그러니 평소 얌전하던 맹수도 굶주림 앞에서는 다른 생명을 잡아 찢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순한 양들 중에서도 그리로 안 가겠다고 버티며 냅다 도망치는 양들이 더러 더러 있는 것이다. 자기의 씨를 퍼트리기 위하여 암컷을 놓고 서로 싸운다. 이게 육체다. 내가 옷처럼 입고 있는 그 육체. 그러니 이 옷을 입고 있는 한 나는 죽을 때까지 음란과 정욕, 그리고 교만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나의 모든 길이 여호와와 하나님의 눈앞에 있다. 더하여 그분이 나의 모든 길을 지금도 살피고 계신다. 내가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떠나서, 지금 얼마나 세상과 자신과 싸우고 있느냐,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가, 오늘도 예수님 한 분만을 사랑하려고 몸부림쳤는가. 내 온 마음을 주님께만 드리려고 하였는가, 아내를 내 목숨처럼 사랑하려고 하였는가, 어린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대우하였는가 등등 이런 것들, 나의 마음을 살펴보신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주님이 지금도 살피시는 것은 단 하나일 것이다. “기범아, 너는 나의 신부인가? 나의 신부로 살았는가? 오늘도 나의 신부로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등불을 준비하라.” 아멘. 오늘도 예수님 앞에서 살도록 주님, 나의 마음을 지켜주세요.

  • 잠언 29장 11절: 화를 다스리고 영을 가라앉히는 지혜

    잠언 29:11을 통해 화를 내는 순간과 지혜로운 마음의 차이를 배우고, 속사람의 회복과 영적 성장을 경험하는 방법을 알아봅니다.

    잠언 29
    1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모든 영을 나오게 하나, 지혜로운 자는 뒤로 가라앉힌다. (직역성경).

    화가 납니까? 네, 화가 납니다. 왜 화가 납니까? 이래저래서 화가 납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가, 화를 내고 있는가. 씩씩거렸는가, 콧김이 나오나. 당신은 또 졌다. 뭐, 내 얘기인 것이다. 나는 가끔씩 진다. 그래도 얼른 회개한다. 그러나 비슷한 영역에서 자꾸 지다 보면 맷집이 쌓인다. 이거 은근히 중요하다. 맷집 없으면 한 방에 나가떨어지거든. 그런데 맷집 있으면 버틸 수는 있다. 속은 뒤집어져도 입이 전처럼 안 열리거든. 일단 버티기라도 해야 나중에 돌파를 하든 할 것 아닌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면 이길 재간이 없다. 내 모든 영을 확 다 쏟아붓고는 뻗어버린다. 그러나 스무 대를 버틸 수 있으면, 그 사이에 한 방을 노릴 틈이 보이는 것이다.

    맞고 있는 줄도 모르면 어렵겠지만, 그것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어디에서 어떻게 뚫리는지도 관찰하고 있다면 대적이 공격하는 패턴도 곧 읽히게 된다. 그 틈을 타서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나의 영을 나오게 하는 영역이 있다. 왜 그 부분에서 나의 모든 영을 나오게 하는지 관찰하고 또 관찰한다. 요즘은 모두는 아니다, 아주 일부분의 영만 나오게 한다. 묻고 또 묻다 보면, 동시에 회개하고, 또 넘어지면 또 회개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주께서 치유해 주시는 영역이 있다. 그럼 내가 승리한 것이다. 일단은. 이제는 뇌와 신경을 타고 반사적으로 흐르는 회로를 다시 그려야 한다. 뒤로 가라앉히는 회로를 신경줄기에 새겨야지.

    특별히 주일예배는 나의 속사람이 치유받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난 주일에는 주님께서 나의 발을 씻겨 주셨다. “기범아, 너도 해야지” 하시면서 말이다. 미치는 줄 알았다. 그만 씻기시라고요. 완전히 내게 입 틀막을 하신 것이다. 오늘은 손가락으로 나의 이마를 톡톡 치시는 것 같았다. 행복했다. 주님은 나를 온유한 자로 만들어 가신다. 아멘

  • 잠언 26장 묵상: 교만과 어리석음, 그리고 말씀 앞에서의 깨달음

    잠언 26장은 교만과 어리석음의 위험을 경고하며,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자의 끝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 묵상을 통해 교만의 견고한 진을 허물고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길을 함께 생각해 봅니다.

    잠언 26
    12 너는 자기 눈에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을 보았느냐? 그보다는 어리석은 자에게 희망이 있다. 16 게으른 자는 판단력 있는 충고자 일곱 명보다 자신을 더 지혜롭게 여긴다. (직역성경).

    잠언 26장은 온갖 악의 모음집처럼 읽혀진다. 소식과 잠언을 어리석은 자에게 두는 것 자체가 죄악일 수 있다. 그는 우둔하여 온갖 죄악을 짓고 다니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많은 악이 어리석은 자의 입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럼에도 이 모든 악을 무색하게 하는 단 하나의 성경 말씀이 있다면 12절이 아닐까 한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 즉 모든 지혜자들보다 자신을 더욱 지혜롭게 여기는 자이니 곧 교만하여 누구의 말도, 어떤 조언과 책망도 듣지 않는 자이다.

    사람이 교만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인생의 막대기로 인해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여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왜 교만함을 좋아할까. 아기들과 함께 있다 보면 깜짝 놀라고 당황스러울 때가 참 많다. 무개념, 노개념이 참 무섭다. 그것은 정말 거시기하다. 저러다가 위험할 수도 있겠다 하는 순간들이 이따금씩 발생한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일일이 하나하나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이미 탑재되어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 모든 규칙들이 어쩌면 말씀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견고한 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무너져 내린 나의 사고의 틀만 봐도 참 많지 않은가. 처음에 나는 이렇게, 이러한 가치관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자녀를 양육하리라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무너져 내리지 않았는가. 내가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배웠던 소위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방법들과 규범들은 어찌 보면 시대의 변화에 맞게 재구성되거나 폐기되어야 할 것들이 참 많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것의 견고한 진으로 자녀들을 누르고 있게 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 그러다가 시대의 장벽 앞에서 어느 순간 박살이 나면, 참 마음이 어려운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지. 이러한 견고한 진들이 모이고 모여,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하게 되고 그것이 곧 교만이라는 높은 바벨탑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 결국 내 앞에는 주님의 말씀만 남는다. 저 교만한 자를 정의하는 오늘의 말씀 앞에서, 나는 저기에 지극히 작은 일부분이라도 해당되지 않는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보다 스스로를 더욱 지혜롭게 여기는 부분이 있는가. 말씀을 대적하여 일어선 아직 깨닫지 못한 견고한 진이 있는가, 그것이다.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주님 아니면 안 됩니다. 아멘.

  • 삶의 불확실함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법

    삶의 불확실함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법

    삶의 염려와 두려움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의 여정. 가장으로서 책임감 속에서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방법을 나눕니다.

    잠언 8장

    10 은 말고 내 훈계를 취하고 정제된 금보다 지식을 취하여라. 17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할 것이니 나를 애타게 찾는 자들이 나를 발견할 것이다. 21 내 사랑하는 자들에게 있어야 할 것들 유업으로 주어 그들의 창고들을 내가 채울 것이다. (직역성경).

    믿음으로 하나님 인도 신뢰하기

    가끔은 내가 지원하지도 않은 곳에서 일해달라고 연락이 올 때가 있다. 처음 직업을 구할 때 그랬고 그 이후에도 비슷한 일들이 한두번 일어났다. 사람과의 만남도 그랬다. 뜻하지 않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은 나의 삶을 이끌어가셨다. 아내도 그렇게 만났다. 전혀 뜻박의 장소에서 뜻박의 방법으로. 그 뿐인가 글파도 그렇게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일행들과 저녁 먹고 잠시 들른 마포의 어느 카페에 김목사님이 거기 계셨고, 유튜브에 잠깐 비친 목사님의 얼굴을 아내가 알아보고 인사를 나눴었지. 이게 다 무언가. 아, 학교도 그랬다. 어떻게 입학해서 어떻게 편입해서, 그 다음 어떻게 진학 하고, 뭐 그랬다.

    그럼에도 여전히 삶에 대한 조금의 염려가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는 이유는 무얼까. 내게 그렇게 믿음이 없나. 오늘 주님이 내게 주시는 훈계의 말씀은 믿음에 관한 것 같다. 모처럼 나의 어떤 자녀가 신나게 지도를 그렸다. 여지껏 치우면서 마음 한켠에, 앞에 놓인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한 분주함이 몰려온다.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 잠시 일들을 뒤로 하고 말씀 앞에 앉았다.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당신이 사랑하여 그들에게 있어야 할 것들을 유업으로 주고, 창고들을 가득 채우겠다. 이 말씀 앞에서 나는 그저 나의 믿음 없음을 회개할 뿐이다. 여전히 주님께서 나의 삶을 붙들고 이리 저리 인도해 가실 것들 더욱 믿음으로 취하리라. 그분이 나를 어디로, 어느 곳으로 인도하실지 모르지만, 신뢰하면, 사랑하면, 어떤 두려움도 나를 삼키지 못한다. 가장으로서 식구들의 먹을것을 책임 져야 한다는 거짓된 모든 부담감도 다시 내려놓는다. 주님이 책임지신다. 나의 앞에는 오직 예수님과 나만 있을 뿐이다. 오직 예수님과 나만의 관계, 그게 다이다. 사랑하는 예수님, 오늘도 나를 도와주세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