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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녀 양육과 ‘부지런한 손’의 의미 – 잠언 10장

    잠언 10을 중심으로 자녀 양육과 신앙적 책임을 묵상합니다. 부지런함과 방임의 차이, 목자로서의 부모 역할, 실천적 신앙생활에 대한 고백과 적용을 쉽게 정리했습니다.

    잠언 10
    3-5 여호와께서 의인은 굶기지 않으시나 악인들의 탐욕은 밀어내신다. 게으른 손은 빈곤을 만드나 부지런한 손은 부유하게 한다. 여름에 모으는 자는 분별력이 있는 아들이나 추수 때 깊이 잠자는 자는 부끄러운 아들이다. (직역성경).

    자녀를 주님 손에 올려드리는 것과 방임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게으른 손과 부지런한 손의 차이는? 자기 밭에서 부지런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밭에서 모으고 추수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지런한 손이다. 그리고 여력이 있으면 남의 밭을 도와주는 것이다. 언제가 여름이고 추수 때는 어느 때인가. 그러니 남의 일에만 부지런한 것도 내가 보기엔 게으른 손이다. 정작 자기 해야 할 우선순위를 뒤로 미루었기 때문이다. 자녀를 주님 손에 올려드린 자는 아무 염려 없이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겠지만, 방종하는 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술로 인생을 탕진하는 어떤 가장처럼. 어쩌면 억지로 잡아끄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나는 나의 양들을 잘 보살폈는가. 과거를 돌아보면 그렇지 못했다. 분노로 이글거리며 나의 틀에 끼워 넣으려 하였었다. 사랑으로 하지 않았다. 나도 말로 인한 상처를 많이 받고 자라서인지, 가족들에게 말로 상처를 많이 주었었다. 내 것이라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하였었다.

    나도 장남이고, 내 딸도 장녀다. 그러니 내게 있던 그 많은 말의 상처들이 장녀에게로 다 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아이를 망치지 않으려고 주님 손에 올려드린 후에 나는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방임하고 있는가. 저녁에 어린 아이들과 놀아주지 않으면서 그들이 서로 싸운다고 뭐라고 하고 있으면, 그것은 아이들을 방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을 섬기며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배려하는 것을 알려주면서 그들의 마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아빠라면, 더욱이 그들이 내 자녀가 아니라 왕의 자녀들로 인식하며 그렇게 대우하고 있다면, 나는 그들을 방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손에 올려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저녁에 집 근처 놀이터로 나간다. 자기 입에서 “아빠 이제 집에 가요”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실컷 놀아준다. 그러면 나보고 만점아빠란다. 나는 전혀 누려보지 못한 삶이다. 사춘기 장녀에게도 비슷할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바운더리를 잘 쳐주어야지. 학생으로서의 신분을 잘 지키도록 해야지.

    나의 큰 아이에게도 고민이 있다. 둘째에게도 그렇다. 둘이 성향은 다르지만 그렇다. 그때에는 고민이 많을 때라고 그러고 말겠는가. 자기 뜻대로 하도록, 아니면 상황이 안 되니 그냥 체념하도록 두어야 하겠는가. 아빠의 뜻 밖으로 나갔으니 네 아픔에 나는 관심 없다 하겠는가. 자녀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나도 귀하게 여겨야 하고, 자녀가 아파하는 것에 나도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아빠에게 얘기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함께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구해보자고 그들의 마음을 공감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아이들이 내게 툭툭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나도 예수님처럼 선한 목자라면, 그들의 고민을 듣고 흘려버리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기도라도 할 것이다. 왕의 자녀로 든든히 서도록, 마지막 때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기도부터 해야 할 것이다.

    내게 맡겨주신 자녀들이 나의 양떼라면 그들은 주님의 양떼이기도 할까. 저 아이는 내게 순종하지 않으니 내 양이 아니야 하실까. 전에 나는 큰 아이를 그렇게 대했다. 그랬더니 자신이 쓰레기인 줄 알더라. 아빠에게 버림받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더라. 얼마나 많이 회개했는지 아는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가. 순종은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 가치를 깨닫고 스스로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그 아이는 보석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 이제는 그 아이 자신도 인정한다. 정말 감사하다. 그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받을 수 있는 말만 전했다. 오래 걸렸다. 학교 다닐 때도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지만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어쩌겠나. 나도 몇 달, 몇 년을 기다려 한마디 건낸다. 그러나 아직도 어렵다. 방임인지 주께 올려드린 것인지.

    내게 지금까지 어린 아이들을 양육하도록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어린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길에서 처음 보는 아기들도 나를 보고 웃는다. 왜 그들은 주일마다 내게 와서 놀이터 언제 가냐고 삼촌만 쳐다보고 있나. 자기 아빠도 있는데 말이다. 무엇이 부지런한 손인가. 여름은 언제인가. 바로 지금이다. 아이들이 내게 모이는 이때, 내가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베풀 수 있는 이때, 지금이 나의 여름이다. 주께서 내게 허락해주신 작은 행복이고 선물이다. 나의 자녀가 아니어도, 내게 순종치 않아도 괜찮다. 무리 중에 도망가는 양을 위해 목자는 찾아 나선다. 다른 무리들을 뒤로 하고서라도 말이다. 어쩌면 나의 양들이 아니라 나의 주님, 왕의 양떼들이다. 그들이 내게로 올 때 나는 무엇을 하겠는가. 나는 그저 예수님처럼 왕의 양떼를 치는 선한 목자이고 싶을 뿐이다. 그 길을 배워가는 중이다. 아멘.

  • 잠언 5: 삶과 영적 싸움 – 나의 모든 길을 여호와께서 살피신다

    잠언 5장 말씀을 중심으로, 인간의 본성과 영적 싸움, 교만과 음란에 대한 성찰을 다룹니다. 나의 모든 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지켜보시는지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잠언 5
    21 참으로 여호와의 눈앞에 사람의 길들이 있으니 사람의 모든 길을 그가 살피신다. (직역성경)

    사람의 모든 길, 즉 나의 모든 길을 그가 살피신다. 성경은 직설적으로 말한다. 사랑스런 네 아내의 젖가슴으로 흡족해하라. 어찌하여 이방 여자의 가슴을 안고 있느냐? 네 모든 길이 여호와 앞에 있어서 그가 너의 모든 길을 살피고 계신다.

    요셉은 이것을 알았다. 그래서 청년 때에 한순간의 큰 범죄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더라도 차라리 그 편이 그에게는 여호와 앞에서 득죄하는 것보다 더 좋았다.

    일흔이 넘은 은퇴한 어느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다가,

    “내 안에 음란이 그대로 있어, 욱하는 것이 아직도 그대로 있어, 35년이 넘도록 이것과 싸웠는데, 그런데 그것들이 내 안에 그대로 있어. 나는 아직도 이것으로 인해 회개해야 돼”

    하시며 운다. 또 백세 넘으신 자기 아버지 목사님이

    “나의 교만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지금도 나의 교만함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 내 안에 교만함이 그대로 있거든, 아들 박 목사야. 나는 언제까지 이것과 싸워야 할까? 언제까지 이것을 회개해야 할까?”

    하시며 아들 목사를 끌어안고 우셨다는 고백을 들었다.

    그분들의 고백을 들으며 흐르는 내 눈의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단 한 순간의 동정일까, 아니면 나 또한 그것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기 때문일까.

    나 또한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음란과 싸우고 있다. 교만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회개한다. 그런데도 음란한 생각들과 욱하는 마음들, 복수하여 찢어버리고 싶은 생각들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것이다. 사탄이 뿌리는 가라지도 있다. 즉시즉시 처낸다. 그러나 본성은 내 속에서 올라오는 것이다. 물론 분리하면 된다. 그러나 악한 영들의 활동 이전에 나의 육체의 본성이 그것을 원한다. 이제야 인생의 반박에 안 살았으니 뭐 할 말이 있겠냐만은…

    육체는 그렇다. 늘 음란하고 정욕적이며 자기 중심적이다. 그러니 평소 얌전하던 맹수도 굶주림 앞에서는 다른 생명을 잡아 찢어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순한 양들 중에서도 그리로 안 가겠다고 버티며 냅다 도망치는 양들이 더러 더러 있는 것이다. 자기의 씨를 퍼트리기 위하여 암컷을 놓고 서로 싸운다. 이게 육체다. 내가 옷처럼 입고 있는 그 육체. 그러니 이 옷을 입고 있는 한 나는 죽을 때까지 음란과 정욕, 그리고 교만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나의 모든 길이 여호와와 하나님의 눈앞에 있다. 더하여 그분이 나의 모든 길을 지금도 살피고 계신다. 내가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떠나서, 지금 얼마나 세상과 자신과 싸우고 있느냐,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가, 오늘도 예수님 한 분만을 사랑하려고 몸부림쳤는가. 내 온 마음을 주님께만 드리려고 하였는가, 아내를 내 목숨처럼 사랑하려고 하였는가, 어린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대우하였는가 등등 이런 것들, 나의 마음을 살펴보신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주님이 지금도 살피시는 것은 단 하나일 것이다. “기범아, 너는 나의 신부인가? 나의 신부로 살았는가? 오늘도 나의 신부로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등불을 준비하라.” 아멘. 오늘도 예수님 앞에서 살도록 주님, 나의 마음을 지켜주세요.

  • 잠언 3장: 지혜의 길, 고통을 통한 평안과 부귀의 비밀

    잠언 3장은 지혜의 길이 은혜와 평안을 주며, 고통 속에서 평안을 배우는 비밀을 보여줍니다. 다윗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참된 승리와 평안을 알아보세요.

    잠언 3
    16-18 날들의 길이가 그녀의 오른손에 있고 부귀와 영광이 그녀의 왼손에 있다. 그녀의 길들은 은혜의 길들이고 그녀의 모든 통로는 평안이다. 그녀는 그녀를 붙잡는 자들에게 생명나무니 그녀를 잡는 모든 자는 행복하다고 불릴 것이다. (직역성경).

    평안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최악의 평안을 누리느니 막강한 전투력을 키워 상대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연약하신 분이 아니다. 다윗 왕국의 평안도 결국은 그의 손에 묻은 수많은 피의 대가였다. 테러를 제압하는 군인들은 최소한 그 칼에 맞는 것과 비슷한 고통 정도는 느껴봐야 한다고 하더라. 다윗은 사자와 싸우며 그러한 고통을 미리 경험하였고 골리앗 앞에서 결코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이 모형 칼이라도 그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고통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한다.

    하나님 나라의 군대로 부름받은 군사라면, 전쟁에 능한 용사로 부름받았다면, 주먹에 맞을 때, 화살에 관통당할 때, 전쟁 상황에서의 두려움, 목숨의 위협 등등의 고통을 모의 상황에서 미리 느껴보는 것이다. 고통을 아는 자가 더 잘 대처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쟁에 능한 용사가 되는 것이다.

    지혜의 길들은 은혜의 길들이고 그녀의 모든 통로는 평안이다. 그러나 그녀의 가장 큰 지혜는 십자가였다. 그렇게 사랑하시던 예루살렘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처절한 고통을 맛보며 죽으심으로 대신 갚으신 것이다. 그러니 그분은 전쟁에 능한, 항상 승리하시는 왕 중의 왕이 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지혜를 따라, 그녀의 가장 큰 지혜를 따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말 그대로 상처받은 치유자로 일어서는 것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자본주의 바탕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겠지만, 그 통로가 막힐 때도 나는 평강을 누릴 수 있겠는가. 대적이 나의 정신을 무너뜨리려 할 때, 나는 누구를 의지하여 일어나겠는가. 요셉처럼, 노예로 끌려갈 때에도, 억울하게 감옥에 갇힐 때에도 여호와 앞에서 신실하겠는가. 여호와 앞에서 좁은 길을 가려 하는 자 앞에 왜 자꾸 불편한 일들이 벌어지는가. 가문에 흐르는 저주인가. 뭐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것들 모두가 어쩌면 고통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일 것이다. 돈을 움켜쥐고 믿는 자들의 마음을 훔치려는 대적의 모든 공작에 당당히 맞서 싸우라는 선물이다.

    삶이 끊어질 것 같은, 목숨이 나갈 것 같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을 맛본 사람들은 결코 탐욕에 잡히지 않는다. 다시 넘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담대하게 주님을 의지하여 승리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선물은 평강이며 보상은 부귀와 영광이다. 아멘.

  • 잠언 25: 지혜의 꿀처럼 조금씩 깨닫는 삶의 교훈

    잠언 25장을 통해 배우는 지혜와 삶의 교훈. 꿀처럼 달콤하지만 한 번에 다 먹을 수 없는 지혜, 원수에게 선을 행하는 의미, 잠언 묵상의 중요성을 풀어봅니다.

    잠언 25
    16 꿀을 네가 발견했으면, 필요한 만큼만 먹어서 네가 그것으로 배를 불려 토해내지 않게 하여라. 21 너를 미워하는 자가 굶주리면, 그에게 빵을 먹이고 그가 목마르면, 그에게 물을 마시게 하여라. (직역성경)

    맛있는 꿀 한 통을 다 먹는 방법은, 조금씩 필요한 만큼만 먹는 것이다. 지혜의 말씀도 이와 같아서 한 번에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주님이 오늘 말씀하시는 것도 하나, 딱 하나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어느 하나에 몰입하도록 만드셨다. 결코 멀티가 아니다.

    어느 날 잠언 묵상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평생의 좋은 습관으로 만들기에 이만한 것이 없어 보인다. 주님의 모든 말씀이 다 그렇지만, 특히 잠언은 파도 파도 끝없이 솟아 흐르는 샘물 같다. 내가 잠언에서 취하고 있는 부분은 아직도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아직 접근도 할 수 없는 말씀들이 왜 그리 많은지, 그리고 하나하나 깨달아 갈 때마다 그렇게 내 영혼에 달고 귀한지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평생 먹어도 다 먹을 수 없는 꿀 한 통이 있다면, 지혜 중의 지혜, 성경 중에서도 바로 잠언의 말씀이라 생각한다.

    나는 21절의 말씀이 늘 어렵다. 원수에게 선을 행하는데, 이것이 원수의 머리에 숫불을 쌓는 것이란다. 여호와께서 보답하신단다. 이 원수가 사탄도 아니고, 나의 가족이고 친구일진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어려웠다. 그러나 고대 근동의 문화에서 상대의 머리에 숫불을 쌓는 것은 곧 그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이라 하더라. 그래서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게 된단다. 그렇게 되려면 도대체 원수에게 얼마나 선을 행해야 하나? 그러나 나는 원수가 없다.

    요셉에게는 형들, 다윗에게는 사울, 예수님께는 유다? 아니야, 예수님은 그를 끝까지 “친구여” 하셨다. 내게는 그만한 원수가 없다. 과거에는 있었지만, 더 이상 그들은 나의 원수가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다른 원수감들이 내 앞에 나타나게 될까? 아하! 나를 미워하는 할머니가 딱 한 사람 있기는 하다. 불쌍한 여인이 있다. 생각해보니 그 할머니에게 선을 행해 본 적은 없네. 피하려고만 하였지. 근데 그 할머니 잘 먹고 잘 산다. 굳이 선을 행해야 하나? 고민 좀 해봐야겠다. 예수님, 어떻게 하죠? 도와주실래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