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지혜

  • 잠언 5장 묵상: 음녀의 길 안전하게 피하는 방법

    잠언 5장 6-8절을 통해 음녀의 길이 얼마나 위험하며, 예수님의 순종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묵상합니다. 오늘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지혜와 놀라운 깨달음을 함께 나눕니다.

    “Lest thou shouldest ponder the path of life, her ways are moveable, that thou canst not know them. Hear me now therefore, O ye children, and depart not from the words of my mouth. Remove thy way far from her, and come not nigh the door of her house.” (Pro 5:6-8, KJV)

    음녀의 길의 위험

    오늘 잠언 5장 6-8절을 들여다보면, 음녀의 길이 움직이므로 우리는 그 길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에도 길이 변할 수 있어, 잘못된 발걸음은 끝없는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그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퍼즐처럼 비밀을 아는 자만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 길을 걸으셨고, 완전한 순종으로 안전한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걸으신 길만 따라가면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에서 떠나지 않으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입니다.

    반복과 회복

    하지만 이 길은 쉽지 않습니다. 훈계와 책망이 따라오고, 우리는 넘어지고 회개하며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반복 속에서 음녀의 길을 멀리하고 그녀 집 문에 가까이 가지 않는 삶을 배워갑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결국 안전하게 그 길을 지나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적용해 보세요. 아멘.


    묵상 원본

    오늘 이 잠언의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음녀의 길이 움직인다. 그래서 너는 그것들, 음녀의 길을 알 수가 없다. 딱 이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피하나? 나의 한 걸음을 바닥에 놓는 그때에 음녀의 길이 나의 발밑으로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올무 아닐까?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디디는 순간 땅이 꺼져 끝없이 떨어지는 그런 길. 퍼즐, 즉 비밀을 아는 자만 꺼지지 않는 정확한 지점을 밟아 그 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누가 먼저 앞장서겠는가?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가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셨다. 그러니 그분이 밟고 가셨던 그 자리만 밟으면 된다. 예수님만 그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쉽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입의 말들을 듣고 행하며 그 말씀으로부터 떠나지 않는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어렵다. 그러니 훈계와 책망이 따라온다. 듣고 회개하면 주께서 다시 회복하여 주신다. 잘못 발을 디뎌 떨어지기 직전의 상황으로 되돌려 주신다. 이제 다시 예수님만 따라가면 된다. 넘어지고 회개하고, 또다시 넘어지고 회개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음녀의 길을 멀리하고 그녀 집 문에 가까이 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길 끝까지 다 가 있을 것이다. 아멘.

  • 잠언 25장 묵상 – 왕 같은 제사장의 삶과 하나님의 숨은 보물

    잠언 25장을 묵상하며 하나님이 숨기신 보물을 발견하고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배우세요. 겸손과 경외로 지혜를 구하며 감사와 신뢰로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일을 숨기는 것이고 왕들의 영광은 일을 살피는 것이다.” (잠언 25:2, 직역성경)

    왕의 교과서, 잠언

    믿는 자들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다고 기록되었다. 우리는 모두 왕이다. 잠언 25장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왕의 교과서다. 하나님이 숨기신 보물을 찾도록 부르신 책이다. 잠언은 반복해서 말한다. 은과 금보다 지혜를 구하라, 지혜가 더욱 귀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재물과 영광이 따를 것이다, 훈계를 버리지 말라.

    겸손이 왕의 지혜다

    하나님의 일을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겸손히 그분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로 기뻐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신뢰하며 감사하라. 그러면 지나온 모든 시간이 해석될 것이다.

    단 한 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 나의 실수까지도 아시고 피할 길을 미리 준비하신 그분의 손길을 보게 된다.

    과거 속에 숨은 하나님의 포석

    과거의 모든 사건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왕으로 세우기 위한 포석이었다. 바둑의 한 수, 체스의 한 칸처럼 그분의 계획에는 의미 없는 일이 없다.

    이제 우리는 과거를 감사로 보고, 현재를 신뢰로 살며, 숨겨진 하나님의 일을 찾아가야 한다.

    “너희는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아멘.

  • 잠언 24장 묵상: 오만을 버리고 회개로 일어서라

    잠언 24장 성경묵상으로 오만을 버리고 회개와 인내로 다시 일어서라. 잠언 24장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지혜와 명철로 세워지는 성전의 삶을 묵상하며 실천하자.

    잠언 24:9-10
    “우둔한 자의 간계는 죄며 오만한 자는 사람에게 가증하다. 네가 환난 날에 약해지는 것은 네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직역성경)

    오만은 하늘과 땅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사탄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천사들의 1/3을 꾀었다. 오만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모를 거역하며 형제를 원수로 만든다. 오만한 마음은 파괴를 낳고, 입술은 고생을 말한다. 오만은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오만을 깨닫는 순간이 회개의 시작이다. 내 속의 오만함은 여전히 나를 괴롭게 하지만, 회개할 때마다 마음이 새롭게 된다. 마음이 상한 만큼 회개하지 못하면, 복수심과 비뚤어진 말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진실한 회개는 내 안의 성전을 다시 세운다.

    환난 날에 약해지는 이유는 내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한다. 지혜와 명철로 집이 세워지고, 나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내 안의 지혜께서 그분의 집을 짓도록 맡겨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인내로 구원을 이루고, 회개로 믿음을 지켜야 한다.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고, 주님의 은혜로 굳건히 서야 한다. 각 단락의 시작부터 ‘오만’, ‘회개’, ‘인내’ 키워드를 반복 강조하며 메시지를 강화한다. 그렇게 할 때 여호와의 성전의 기둥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 믿음과 구원의 길은 인내로 완성된다.

    나의 목숨을 지키시는 여호와께서 각자의 행위대로 보상하신다. 그러니 달려가자. 끝까지 인내하며 여호와를 경외하자. 주님이 도우시고 지키시며 붙들어 주신다. 아멘.


    묵상 원본

    오만함은 하늘과 땅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사탄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천사들의 1/3을 꾀어냈다. 오만하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모를 거역하며 스스로 형제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파괴를, 입술은 고생을 말한다.

    그것이 내 속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나를 괴롭게 한다. 나의 마음이 상해 있는 만큼, 깨닫지 못해 회개하지 않은 만큼, 복수하려는 마음과 비뚤어진 입의 말들이 나가는 것이다.

    환난 날, 오만한 자의 지배를 당할 때 약해지는 이유는 나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할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묵상하는 것이다. 지혜와 명철로 집이 지어진다. 나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집이다. 그러니 내 안에 계신 지혜께서 그분의 집을 지으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오직 다시 일어나는 것뿐이다. 인내함으로 나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 회개하여 일어나고, 또다시 회개하여 일어나고를, 다시는 넘어지지 않을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여호와의 성전의 기둥과 같은 존재가 되어져간다. 나의 목숨을 지키시는 여호와께서 각자의 행위대로 보상하신다.

    그러니 달려가자. 끝까지 인내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자. 주님이 도우시고 지키시고 붙들어 주신다. 아멘.

  • 거만 뒤 따라오는 수치, 겸손이 부르는 지혜 – 잠언 11:2

    잠언 11:2 말씀과 나의 경험을 통해 거만과 수치, 겸손과 지혜를 깨닫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묵상. 본문 전체의 중심 말씀으로, 묵상과 경험의 배경을 안내한다.

    잠언 11:2 [직역성경] – “거만함이 들어올 때 수치가 들어오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지혜가 있다.”

    거만함과 수치

    잠언 11:2 [직역성경] 말씀처럼, 혈기를 부린 후 대부분 혼자 있고 싶었다. 집에서든 어디서든 화를 낸 뒤에는 씩씩거리며 담배 한 가치 물고 혼자 어딘가로 가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이게 바로 수치가 거만함을 따라오는 것이다.

    언쟁 후 성찰

    말씀처럼,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조근조근 입을 열었더라도 언쟁 후 숨고 싶다면 스스로 거만하다는 증거다. 누가 처음부터 지혜롭고 겸손하겠는가? 우리 모두 처음에는 거만했다. 나도 자녀, 아내, 아랫사람들에게 불완전한 권위자였다.

    겸손과 지혜의 길

    딸이 말했다. “아빠, 그때 나 14살이었어.” 나는 웃으며 갱년기 같다고 말했지만, 혈기 많은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그러하다. 입을 열고 난 후 수치심을 안다. 거만이 따른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지혜를 구한다. 잠언 11:2 [직역성경]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겸손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예수님을 신뢰하며 거만을 끊기 위해 오늘도 걸어간다. 아멘.


    원본

    나의 경험상, 혈기를 부린 후 대부분 혼자 있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는 말이다. 일을 하며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집에서든 어디서든 화를 낸 이후에는 대부분 씩씩거리며 담배 한가치 물고 혼자 어디론가 가더라. 이게 다 무엇인가. 바로 수치가 거만함을 따라 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꼭 큰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도, 잔잔히, 조근조근 입을 열었다 하여도 언쟁이 끝난 후에 혼자 어디론가 숨고 싶다면 이는 분명 본인이 거만하다는 증거임을 기억하자.

    그러나 어느 누가 처음부터 지혜롭겠는가. 누가 처음부터 성숙한 권위자이겠는가. 누가 처음부터 겸손하겠는가. 권위자의 상처가 나의 부모님만 해당되겠는가. 아니다. 학교, 상사, 영적 권위자 다 포함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처음에는 모두 거만하였다. 나도 자녀들에게, 아내에게, 그리고 나의 아랫사람들에게 똑같이 불의한 권위자이다. 그러니 할 말 있는가. 나의 딸이 “아빠 그때 나 이제 14살이었어” 라는 말을 잊을만 하면 한번씩 한다. 그 아이 14살때 나는 딸에게 어떤 아빠였는가. 불과 5년 전 나의 모습이다.

    딸이 내게 그러더라. 아빠 요즘 갱년기 같다고. 내가 웃었다. 갱년기는 홀몬의 변화 반응이지. 그 혈기 많고 소리 지르던 아빠의 요즘 모습이 딱 갱년기 증상이라는 것이다. 내가 아직 육십도 안 되었는대 무슨 갱년기인가. 그런데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 혈기 충만한 80세 여성도 나는 보았다. 우렁찬 목청으로 엄청 지르더라. 갱년기를 격는다고 혈기가 빠지나.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입이 열린 후의 수치심을 이제 나는 안다. 내가 거만하여 그것이 따라온것도 안다. 그 느낌이 싫다. 그래서 지혜를 더욱 구하는 것이다. 겸손하려고, 겸손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려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자 되어 거만, 곧 선악나무의 열매들을 끊기 위하여 지금도 걸어가는 것이다. 아멘. 예수님 도와주세요.

  • 지혜로운 아들과 오만한 자의 차이 – 잠언 13장

    잠언 13장을 중심으로 지혜로운 아들이 아버지의 훈계를 듣는 것과 오만한 자가 꾸지람을 듣지 않는 차이를 묵상합니다. 일상에서의 죄와 순종, 행동으로 증명하는 신앙을 다룹니다.

    잠언 13
    1 지혜로운 아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나 오만한 자는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 (직역성경).

    훈계를 듣고 바로 회개하여 고치는 것이 듣는 것이다. ‘그렇게 할게요’ 하고 하지 않으면 그것은 듣지 않은 것이다. 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말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죄를 짓게 하는 습관들, 무엇이 죄인가. 부부가 떨어져 있는 것이 죄이다. 애인과, 혹은 아내와 데이트 하면서 딴 여자에게 눈이 따라가는 것이 죄이다. 해봐라, 곧바로 이글거리는 분노의 질투를 느낄 때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나와 교제하기 원하시는데, 기도해야 하는데, 그것을 알고 느끼면서 유튜브 틀고 뉴스 보고 있으면 그것이 죄이다. 즉,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이 죄이다. 말만 하면서 행동이 따라가지 않아도 그것이 죄인 것이다. 그러니 아이에게 부모님 말씀에 바로 순종하도록 양육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즉각 순종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그러니, 내가 아이들에게, 가족에게, 이웃에게 할 말이 있을까. 없지. 나나 잘해야지. 그렇지. 이따금씩, 혼자 뉴스 틀고 있는 것이 주님께 죄송할 때가 있다. 그래서 이제는 나 혼자 안 보고, ‘예수님 내 옆에 계세요 같이 봐요’ 한다. 나쁜 걸 보는 게 아니니, 뭐 괜찮을까. 그러다 “이제 꺼라, 그만 봐라” 하시는 것 같은 감동을 받으면 최대한 바로 끄고 잔다. 아니면 기도한다. 이도 저도 아닐 때는 말씀을 읽는다. 말씀을 꼭 밥으로만 먹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간식으로도 먹을 수 있다. 영이 출출할 때 언제든지 말씀을 읽어요.

    뭐 이런 문제들은 괜찮다. 그러나 오만한 자는 어떻게 하는가. 왜 그래야 되요? ‘나는 그렇게 말고 다르게 하고 싶어요. 싫어요, 안 해요’ 하며 부모를 대적한다. 그리고 하지 말라 하는 것은 그렇게 한다. 결국은 손바닥이나 엉덩이에 맴매를 맞게 되는 것이 있다. 인내하며 타이르고 가르치는 것보다, 때로는 따끔한 맴매 몇 대가 더욱 효과적일 때도 있다.

    아이들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오늘 훈계를 받는다. 대부분 나에게서 배운 것들 아닌가. 그러니 어쩌겠나, 나부터 회개하고 끊고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주여, 살려주세요, 아멘.

  • 이웃을 대하는 태도와 명철한 자의 삶 – 잠언 11장

    잠언 11장 12-14절 말씀을 통해 이웃을 멸시하거나 험담하는 삶이 아닌, 명철하고 신실한 삶의 길을 묵상합니다. 성경 66권을 자문관 삼아 살아가는 지혜와 자녀 교육의 교훈까지 함께 나눕니다.

    잠언 11
    12-14 그의 이웃을 멸시하는 자는 생각이 부족한 자나 명철한 사람은 가만히 있다. 험담하고 다니는 자는 비밀을 드러내나 영이 신실한 자는 일을 숨긴다. 전략이 없으면 백성이 쓰러지니 승리는 많은 자문관으로 인해 생긴다. (직역성경).

    이웃을 멸시하는 자, 험담하고 다니는 자, 자녀들에게 함부로 말하고 다니는 일반적인 혈기 많은 부모의 모습이다. 직장 상사나 동료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군대에서도 그런 사람을 만난다. 나는 이런 부류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나도 어느 때에는 이웃을 멸시하고 험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략을 받아 명철하여 영이 신실한 자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다. 이웃의 험담거리를 숨기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럼 전략이 오는 많은 자문관들은 누구인가. 멀리 볼 것 없다. 바로 성경이다. 성경 66권, 모세로부터 사도 요한의 글들까지, 이 모든 저자들이 곧 나의 자문관들이다.

    무개념, 노개념의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하나하나 가르치는 생활 규범들, 성도로서 살아가는 방법과 이유들, 왜 서로 사랑하는지 등등의 수많은 가르침들이 아이들 뒤를 따라가나, 나는, “우와, 이런 것도 가르쳐야 돼? 우와, 이것도 알려줘야 하는 거야? 우와, 당연한 것 아니야?” 하고 있다.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아이들에게는 전혀 생소하며 왜 그러면 안 되는지 이해를 못 하는 경우도 참 많지 않은가. 아이들과 다니다 보면 정말이지 당혹스러운 노개념에 아연실색하며 실소를 머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런 것들을 인식이나 하며 세상을 사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몸이 그냥 알아서 반응하는 것이다. 마치 운전할 때처럼 그렇게 가는 것이다. 운전할 때 별의별 희한한 사건들을 다 만나지 않는가. 정말 골 때리는 현장이다.

    그러니 그때그때, 날마다, 오늘 내게 필요한 자문관들을 찾아 그들의 글을 읽고 기도하며 그대로 행하려고 날마다 연습하는 것이다. 한 권 한 권씩 정독하며 저자의 신앙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 열정, 순종하는 모습들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운전 연습할 때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인 하루하루가 나의 삶을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오늘로 만들어간다. 생각이 부족한 내가 명철한 사람이 되어가며 이웃의 비밀을 드러내던 입이 점차 다물어지는 것이다. 나의 입이 멸시하며 험담하는 말들을 잊을 때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멘.

  • 지혜와 예배로 하루를 채우는 삶 – 잠언 8장

    잠언 8장을 통해 주님의 지혜와 예배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삶의 무게 속에서 회개와 순종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법을 배워 보세요.

    잠언 8
    내 입의 모든 말은 의롭고 그것들 안에는 비뚤어짐이나 굽어짐이 없으니 깨달은 자에게는 그것들 모두가 정직하며 지식을 발견한 자들에게는 바르다. 은 말고 내 훈계를 취하고, 정제된 금보다 지식을 취하여라. (직역성경).

    주님의 지혜는 그것을 깨달은 자에게만 꿀 같고 진주 같은 것이다. 그분의 지혜를 듣는 자는 먼저 그분의 훈계를 듣고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속도가 빠르다. 오늘 아침, 또 다른 삶의 무게가 나를 누르려고 한다. 이때 나는 무엇을 하겠는가. 그 무게의 감정을 내가 받아들이려 하는 자신을 보면 회개하고, 동시에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니 주님 손에 던져버린다. 나의 감정을 주님께 다 쏟아 드린다.

    예배는 매주 몇 번 교회 가서 드리는 것이 다가 아니다. 매일, 시간마다, 순간순간 주님을 경험하며 양처럼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양들이라면 모두가 다 그렇게 할 것이다. 세상의 어떤 은금보다도 지금 이 시간에 주님을 만나 그분을 예배하는 것이 가장 귀하다. 이처럼 나의 하루를 온전히 예배로 채우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나의 친밀한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땅, 즉 내 안에 이루어지도록, 그래서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모든 시험에서 주님이 지켜주시도록, 그분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잘 따라가는 것이다. 오늘 일용할 양식은 내 알 바 아니다. 그것은 목자가 주시는 것이다. 나는 그저 오늘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그것 한 가지를 붙들고 순종하면 그만이다. 입을 닫는 것이다. 교만하여 패역한 입(이것을 지혜가 미워한다)을 닫는 것이다. 내 입이 언어를 잃어버릴 때까지 입을 닫는 것이다. 모세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다.

    외국에 사는 나의 가족을 보니 한국말도 어눌하고, 그렇다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뭐 참 애매하다. 전에 보니 우리 교회 태필린도 잘 못 따라 읽더라. 나의 입도 그렇게 닫혀질 수 있을까. 혀가 어눌하여 패역한 말 자체가 잘 안 나올 때까지 입을 닫을 수 있을까.

  • 잠언 3장: 지혜의 길, 고통을 통한 평안과 부귀의 비밀

    잠언 3장은 지혜의 길이 은혜와 평안을 주며, 고통 속에서 평안을 배우는 비밀을 보여줍니다. 다윗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참된 승리와 평안을 알아보세요.

    잠언 3
    16-18 날들의 길이가 그녀의 오른손에 있고 부귀와 영광이 그녀의 왼손에 있다. 그녀의 길들은 은혜의 길들이고 그녀의 모든 통로는 평안이다. 그녀는 그녀를 붙잡는 자들에게 생명나무니 그녀를 잡는 모든 자는 행복하다고 불릴 것이다. (직역성경).

    평안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최악의 평안을 누리느니 막강한 전투력을 키워 상대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연약하신 분이 아니다. 다윗 왕국의 평안도 결국은 그의 손에 묻은 수많은 피의 대가였다. 테러를 제압하는 군인들은 최소한 그 칼에 맞는 것과 비슷한 고통 정도는 느껴봐야 한다고 하더라. 다윗은 사자와 싸우며 그러한 고통을 미리 경험하였고 골리앗 앞에서 결코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이 모형 칼이라도 그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고통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한다.

    하나님 나라의 군대로 부름받은 군사라면, 전쟁에 능한 용사로 부름받았다면, 주먹에 맞을 때, 화살에 관통당할 때, 전쟁 상황에서의 두려움, 목숨의 위협 등등의 고통을 모의 상황에서 미리 느껴보는 것이다. 고통을 아는 자가 더 잘 대처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쟁에 능한 용사가 되는 것이다.

    지혜의 길들은 은혜의 길들이고 그녀의 모든 통로는 평안이다. 그러나 그녀의 가장 큰 지혜는 십자가였다. 그렇게 사랑하시던 예루살렘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처절한 고통을 맛보며 죽으심으로 대신 갚으신 것이다. 그러니 그분은 전쟁에 능한, 항상 승리하시는 왕 중의 왕이 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지혜를 따라, 그녀의 가장 큰 지혜를 따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말 그대로 상처받은 치유자로 일어서는 것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자본주의 바탕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겠지만, 그 통로가 막힐 때도 나는 평강을 누릴 수 있겠는가. 대적이 나의 정신을 무너뜨리려 할 때, 나는 누구를 의지하여 일어나겠는가. 요셉처럼, 노예로 끌려갈 때에도, 억울하게 감옥에 갇힐 때에도 여호와 앞에서 신실하겠는가. 여호와 앞에서 좁은 길을 가려 하는 자 앞에 왜 자꾸 불편한 일들이 벌어지는가. 가문에 흐르는 저주인가. 뭐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것들 모두가 어쩌면 고통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일 것이다. 돈을 움켜쥐고 믿는 자들의 마음을 훔치려는 대적의 모든 공작에 당당히 맞서 싸우라는 선물이다.

    삶이 끊어질 것 같은, 목숨이 나갈 것 같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을 맛본 사람들은 결코 탐욕에 잡히지 않는다. 다시 넘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담대하게 주님을 의지하여 승리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선물은 평강이며 보상은 부귀와 영광이다. 아멘.

  • 잠언 29장 11절: 화를 다스리고 영을 가라앉히는 지혜

    잠언 29:11을 통해 화를 내는 순간과 지혜로운 마음의 차이를 배우고, 속사람의 회복과 영적 성장을 경험하는 방법을 알아봅니다.

    잠언 29
    1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모든 영을 나오게 하나, 지혜로운 자는 뒤로 가라앉힌다. (직역성경).

    화가 납니까? 네, 화가 납니다. 왜 화가 납니까? 이래저래서 화가 납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가, 화를 내고 있는가. 씩씩거렸는가, 콧김이 나오나. 당신은 또 졌다. 뭐, 내 얘기인 것이다. 나는 가끔씩 진다. 그래도 얼른 회개한다. 그러나 비슷한 영역에서 자꾸 지다 보면 맷집이 쌓인다. 이거 은근히 중요하다. 맷집 없으면 한 방에 나가떨어지거든. 그런데 맷집 있으면 버틸 수는 있다. 속은 뒤집어져도 입이 전처럼 안 열리거든. 일단 버티기라도 해야 나중에 돌파를 하든 할 것 아닌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면 이길 재간이 없다. 내 모든 영을 확 다 쏟아붓고는 뻗어버린다. 그러나 스무 대를 버틸 수 있으면, 그 사이에 한 방을 노릴 틈이 보이는 것이다.

    맞고 있는 줄도 모르면 어렵겠지만, 그것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어디에서 어떻게 뚫리는지도 관찰하고 있다면 대적이 공격하는 패턴도 곧 읽히게 된다. 그 틈을 타서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나의 영을 나오게 하는 영역이 있다. 왜 그 부분에서 나의 모든 영을 나오게 하는지 관찰하고 또 관찰한다. 요즘은 모두는 아니다, 아주 일부분의 영만 나오게 한다. 묻고 또 묻다 보면, 동시에 회개하고, 또 넘어지면 또 회개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주께서 치유해 주시는 영역이 있다. 그럼 내가 승리한 것이다. 일단은. 이제는 뇌와 신경을 타고 반사적으로 흐르는 회로를 다시 그려야 한다. 뒤로 가라앉히는 회로를 신경줄기에 새겨야지.

    특별히 주일예배는 나의 속사람이 치유받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난 주일에는 주님께서 나의 발을 씻겨 주셨다. “기범아, 너도 해야지” 하시면서 말이다. 미치는 줄 알았다. 그만 씻기시라고요. 완전히 내게 입 틀막을 하신 것이다. 오늘은 손가락으로 나의 이마를 톡톡 치시는 것 같았다. 행복했다. 주님은 나를 온유한 자로 만들어 가신다. 아멘

  • 잠언 26장 묵상: 교만과 어리석음, 그리고 말씀 앞에서의 깨달음

    잠언 26장은 교만과 어리석음의 위험을 경고하며,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자의 끝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 묵상을 통해 교만의 견고한 진을 허물고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길을 함께 생각해 봅니다.

    잠언 26
    12 너는 자기 눈에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을 보았느냐? 그보다는 어리석은 자에게 희망이 있다. 16 게으른 자는 판단력 있는 충고자 일곱 명보다 자신을 더 지혜롭게 여긴다. (직역성경).

    잠언 26장은 온갖 악의 모음집처럼 읽혀진다. 소식과 잠언을 어리석은 자에게 두는 것 자체가 죄악일 수 있다. 그는 우둔하여 온갖 죄악을 짓고 다니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많은 악이 어리석은 자의 입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럼에도 이 모든 악을 무색하게 하는 단 하나의 성경 말씀이 있다면 12절이 아닐까 한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 즉 모든 지혜자들보다 자신을 더욱 지혜롭게 여기는 자이니 곧 교만하여 누구의 말도, 어떤 조언과 책망도 듣지 않는 자이다.

    사람이 교만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인생의 막대기로 인해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여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왜 교만함을 좋아할까. 아기들과 함께 있다 보면 깜짝 놀라고 당황스러울 때가 참 많다. 무개념, 노개념이 참 무섭다. 그것은 정말 거시기하다. 저러다가 위험할 수도 있겠다 하는 순간들이 이따금씩 발생한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일일이 하나하나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이미 탑재되어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 모든 규칙들이 어쩌면 말씀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견고한 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무너져 내린 나의 사고의 틀만 봐도 참 많지 않은가. 처음에 나는 이렇게, 이러한 가치관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자녀를 양육하리라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무너져 내리지 않았는가. 내가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배웠던 소위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방법들과 규범들은 어찌 보면 시대의 변화에 맞게 재구성되거나 폐기되어야 할 것들이 참 많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것의 견고한 진으로 자녀들을 누르고 있게 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 그러다가 시대의 장벽 앞에서 어느 순간 박살이 나면, 참 마음이 어려운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이지. 이러한 견고한 진들이 모이고 모여,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하게 되고 그것이 곧 교만이라는 높은 바벨탑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 결국 내 앞에는 주님의 말씀만 남는다. 저 교만한 자를 정의하는 오늘의 말씀 앞에서, 나는 저기에 지극히 작은 일부분이라도 해당되지 않는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보다 스스로를 더욱 지혜롭게 여기는 부분이 있는가. 말씀을 대적하여 일어선 아직 깨닫지 못한 견고한 진이 있는가, 그것이다.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주님 아니면 안 됩니다. 아멘.

  • 잠언 25: 지혜의 꿀처럼 조금씩 깨닫는 삶의 교훈

    잠언 25장을 통해 배우는 지혜와 삶의 교훈. 꿀처럼 달콤하지만 한 번에 다 먹을 수 없는 지혜, 원수에게 선을 행하는 의미, 잠언 묵상의 중요성을 풀어봅니다.

    잠언 25
    16 꿀을 네가 발견했으면, 필요한 만큼만 먹어서 네가 그것으로 배를 불려 토해내지 않게 하여라. 21 너를 미워하는 자가 굶주리면, 그에게 빵을 먹이고 그가 목마르면, 그에게 물을 마시게 하여라. (직역성경)

    맛있는 꿀 한 통을 다 먹는 방법은, 조금씩 필요한 만큼만 먹는 것이다. 지혜의 말씀도 이와 같아서 한 번에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주님이 오늘 말씀하시는 것도 하나, 딱 하나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어느 하나에 몰입하도록 만드셨다. 결코 멀티가 아니다.

    어느 날 잠언 묵상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평생의 좋은 습관으로 만들기에 이만한 것이 없어 보인다. 주님의 모든 말씀이 다 그렇지만, 특히 잠언은 파도 파도 끝없이 솟아 흐르는 샘물 같다. 내가 잠언에서 취하고 있는 부분은 아직도 지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아직 접근도 할 수 없는 말씀들이 왜 그리 많은지, 그리고 하나하나 깨달아 갈 때마다 그렇게 내 영혼에 달고 귀한지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평생 먹어도 다 먹을 수 없는 꿀 한 통이 있다면, 지혜 중의 지혜, 성경 중에서도 바로 잠언의 말씀이라 생각한다.

    나는 21절의 말씀이 늘 어렵다. 원수에게 선을 행하는데, 이것이 원수의 머리에 숫불을 쌓는 것이란다. 여호와께서 보답하신단다. 이 원수가 사탄도 아니고, 나의 가족이고 친구일진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어려웠다. 그러나 고대 근동의 문화에서 상대의 머리에 숫불을 쌓는 것은 곧 그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이라 하더라. 그래서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게 된단다. 그렇게 되려면 도대체 원수에게 얼마나 선을 행해야 하나? 그러나 나는 원수가 없다.

    요셉에게는 형들, 다윗에게는 사울, 예수님께는 유다? 아니야, 예수님은 그를 끝까지 “친구여” 하셨다. 내게는 그만한 원수가 없다. 과거에는 있었지만, 더 이상 그들은 나의 원수가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다른 원수감들이 내 앞에 나타나게 될까? 아하! 나를 미워하는 할머니가 딱 한 사람 있기는 하다. 불쌍한 여인이 있다. 생각해보니 그 할머니에게 선을 행해 본 적은 없네. 피하려고만 하였지. 근데 그 할머니 잘 먹고 잘 산다. 굳이 선을 행해야 하나? 고민 좀 해봐야겠다. 예수님, 어떻게 하죠? 도와주실래요? 아멘.

  • 잠언 24장: 지혜로 집을 짓고 미래를 준비하는 삶

    잠언 24장 말씀을 통해 지혜가 우리의 삶과 집, 그리고 미래를 세워가는 과정을 묵상합니다. 생업과 준비,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삶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잠언 24
    14 지혜가 네 영혼에 그와 같은 줄 알아라. 만일 네가 그것을 발견하면 미래가 있고 네 희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직역성경)

    지혜로 인해 집이 지어진다. 태초에 온 땅과 하늘들의 기초를 놓은 분도 지혜, 그분이셨다. 그는 마치 장인과 같았다. 그 지혜로 인해 나의 미래, 희망이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밖에서 일을 준비하고 땅에서 내게 맞도록 한 다음에 나의 집을 짓는 것이다. 곧 생업을 준비하는 시간들이 어쩌면 지혜를 발견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나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 아닌가. 지혜는 나를 결코 무너지지 않을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 가신다. 그러므로 지금은 나의 집을 짓기 전에 바깥일을 준비하고 밭일을 정리하는 때인 것이다. 놀고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땅에서 살려면 반드시 자기의 생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 사실 때 일을 하셨다. 생업을 하면서 지혜를 배워 간다. 집 지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분이 나를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집으로 만들어 가신다. 여기에 나의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는 것이다. 아멘.

  • 지혜와 온유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 잠언 19장

    잠언 19을 묵상하며 지혜로운 삶과 온유한 마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방법을 나눕니다. 화를 참고, 명철과 훈계를 통해 삶에서 복을 발견하는 실제적인 깨달음.


    잠언 19장
    8 지혜로운 마음을 얻은 자는 그의 목숨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발견한다. 11 분별력 있는 사람은 화를 오래 참으니, 그의 영광은 범죄를 간과하는 것이다. 20 네 마지막이 지혜롭게 되기 위하여 조언을 듣고 훈계를 받아라. (직역 성경)

    지혜로우면 막 살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안 산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무엇이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지 생각하고 스스로 삼가며 자신의 입과 행동을 절제한다. 복을 얻으려고 명철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선물을 바라고 부모 앞에서 잘하는 아들은 아직 아이인 것이다.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늘 장난감이 문제 아닌가. 그것이 없는 곳에서는 어찌 그리 서로 행복하게 잘 노는가. 그러나 장난감이 있으면 그걸로 싸운다. 아이들은 또 다른 장난감 선물을 바라고 부모 앞에서 잘하려고 무지 노력한다. 그러나…

    장성하면 그런 것은 쳐다도 안 본다. 주님이 주는 선물보다도, 그분 자체가 좋은 것이다. 그냥 아빠가 좋은 것이다. 그분 앞에 자꾸 나의 얼굴을 보이고 싶을 뿐이다. 주님을 만나고, 사춘기가 지나가면, 그 아들은 알아서 자기 할 일을 한다. 문제는 부모, 즉 불의한 권위자이다.

    그러니 나도 나의 마지막을 주님 앞에서 더욱 지혜롭게 하기 위해, 오늘 지혜와 훈계를 받으려 하는 것이다. 화를 오래 참아 범죄를 간과하는 자가 되려 하는 것이다. 혈기와 분노로 충만한 나의 가문에서 모든 죄악의 통로들을 닫고, 온유한 자로서의 주님의 부르심을 이루기 위하여 오늘 나아갈 뿐이다. 모세를 넘어, 예수님처럼 온유한 자, 나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이다.

    “기범아,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그 부르심은 열방에 나가 선교사가 되라는 부르심이 아니었다. 그래, 그렇다. 만점아빠, 온유한 자로 서라는 주님의 초청이었다. 그러니 예수님, 도와주세요. 나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을 이루도록 도와주세요. 아멘.

  • 여호와 의지와 부자의 의미 – 오늘을 사는 지혜 – 잠언 18장

    잠언 18을 통해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과 부자의 의미를 성경적 관점에서 살펴봅니다. 오늘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배우세요.

    잠언 18장

    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이 그 안에서 달리니 안전하다.
    11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읍이니, 그의 망상 안에는 높은 성벽 같은 것이 있다.
    15 깨달은 자의 마음은 지식을 사고, 지혜자들의 귀는 지식을 찾는다.
    (직역 성경)

    누가 견고한 망대를 의지할까? 의인은 여호와를, 부자는 재물을 의지한다.
    나의 견고한 성읍은 여호와일까, 재물일까? 나는 부자인가?
    집이 있고 냉장고에 먹을 음식이 있으면 부자라고 하셨다.
    나는 차도 있으니 상위 1% 부자다.
    권위자께서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것이고, 말씀이 그렇게 말하면 말씀에 맞는 것이다. 현실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부자인 이유는 여호와께서 지극히 큰 나의 상급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1년 치 생활비를 한 번에 다 주시면, 나는 매년 한 번씩만 기도할 것이다. 사람이니까. 살 만하니까.
    나의 자녀들이 1년에 한 번만 나를 보러 온다면, 나의 마음은 매우 슬플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나 보다. 매일 자녀의 얼굴을 보시려고 말이다.
    어디서 들은 말이지만,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기숙사에서, 어디에서, 집 나가 있던 아이들이 요즘 집에 다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밤을 새우고 늦게 자던, 다음 날 겨울잠 자고 방에서 나오든 상관없다.
    그냥 행복할 뿐이다. 날마다 아이들 얼굴 볼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것이다.
    어젯밤에 큰아이가 설탕과 올리고당을 잔뜩 넣어 딸기 스무디를 만들어 주었다. 내가 거의 다 먹었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를 의지하려고 한다.
    오늘도, 또 미래의 오늘도, 또 저 멀리 있는 미래의 오늘도, 여호와만을 의지하고 싶다.
    그분 안에서 놀면 안전하다. 미래가 있다.
    반드시 나의 소망이 있으니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이 내게 주어질 것이다.

    그렇게 오늘을 살기 위하여, 나의 마음을, 나의 귀를 지식의 말씀에 기울인다.
    말씀과 기도로, 회개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간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아멘.

  • 거만과 수치, 그리고 겸손이 주는 지혜 – 잠언 11장

    거만과 수치, 그리고 겸손이 주는 지혜 – 잠언 11장

    잠언 11:2 말씀을 통해 ‘거만함이 수치를 불러오고, 겸손이 지혜를 가져온다’는 영적 원리를 묵상합니다. 가인의 선택과 우리의 일상 속 반응을 연결하며, 수치에서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나눕니다.

    잠언 11:2
    거만함이 들어올 때 수치가 들어오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지혜가 있다. (직역성경)


    오늘은 수치에 관한 메타인지를 하는 날이다. 수치는 거만할 때 들어온다. 예를 들면 아이들에게 버럭 할 때조차도 수치가 들어온다. 그러니 내게는 쌓여 있는 수치가 그만치 많은 것이다. 가장의, 어른의 뜻에 따르지 않는 아이에게 분노가 올라올 때, 왜 씩씩거리나. 그 이면에 있는 것이 두려움과 수치이다.

    가인은 자기의 수치를 해결하려고 그의 근원을 제거(살인)하는 쪽을 택하였다. 오늘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부모를, 권위자를, 자녀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없으니 미워하며 자신을 죽이는 쪽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게 모두 죄의 열매, 즉 선악과의 열매 아닌가. 거만하여 두려움과 수치가 따라오니 다른 사람에게 버럭하며 분을 내는 것이다.

    거만할 때 수치가 들어오지, 혈기를 내야 수치가 오는 것이 아니다. 입을 다물어도, 입술을 지켜도 그 전에 교만하면 수치는 그냥 들어온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할까. 회개해야지. 나의 상처를 계속 내어드려야지. 성령이 만지실 때, 수술하실 때 고통스러워 구르면, 그분은 잠깐 하시고 멈추시는 것 같았다. 그때에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은 여기까지만 하시나 보다 할 것인가, 나 괜찮으니 계속 하시라고, 통째로 다 가져가시라고 힘써 그분의 손을 끌어당기겠는가.


    예수님, 도와주세요, 오늘 나의 상한 심령을 다 가져가 주세요. 나를 긍휼히 여겨 주세요. 아멘.